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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레이>가 다루는 테마가 매우 흥미롭지만, 현대 예술의 흐름을 잘 모르는 우리에겐 좀 어렵게 느껴지는 지점도 많았습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이 책을 통해 예술의 개념을 확장적으로 보는 것을 염두에 두라고 하시면서 간략하게 현대미술의 흐름을 짚어 주셨습니다.
현대미술을 일컫는 말이 Modern art와 Contemporary art가 있는데요. 주로 근/현대미술을 같이 말할 때 전자를 쓰고 지금, 현재의 동시대 예술을 말할 때 후자를 씁니다. 보통 ‘마네’를 서양 현대회화의 시초라고 많이 얘기하는데요. 그 이유는 마네는 ‘회화가 2차원 조건에서 그림을 그린다 즉, 회화는 2차원이다’라는 것을 처음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이죠. 마네 이전 회화는 자신의 2차원 조건을 감추고, 3차원인 척하였는데요.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우리는 그림을 볼 때 그것이 뻔히 그림인 줄(물감인 줄) 알면서도 그 물감을 ‘사물’인 것처럼 보아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두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네는 이것을 폭로하며 ‘2차원으로써 그림’이라는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후, 20세기에 뒤샹이 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으로 미술관에 전시하면서 ‘무엇이 예술이 되는가?’의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요. 그리고 나서 유럽은 제1,2차 세계 대전과 파시즘을 겪게 되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에 대한 저항이 68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격변을 겪은 후 뒤샹의 질문에 이어 ‘예술이 뭘까?’ 즉 예술 자체를 질문으로 하는 6-70년대 예술을 컨템포러리 아트라고 봅니다.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에서 예술의 본질은 개념(concept)에 있다고 보는 개념미술이 등장하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재료 자체의 물성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 등이 등장하게 됩니다. <오버레이>의 저자 루시 리파드는 이러한 예술의 변화를 정리 고찰하며 동시대의 예술을 보는 동시에 미래의 예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고대 예술을 들여다보는 것은 예술의 원형에 대한 탐구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예술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어떤 한 천재적 개인의 예술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 중요합니다. 앞서 현대 회화의 시초를 마네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변화된 시대의 감수성이 마네의 회화로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이지 마네 개인이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새롭게 그러한 회화를 창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마네가 회화의 조건으로써의 2차원 평면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의 배치 속에서 형성된 특정한 사고 체계 속에서 발생한 특정한 감수성을 감각으로 포착하고 회화의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네의 감각은 마네의 것이 아니라 마네 이전에 마네가 살던 시공간의 배치로부터 발생된 것입니다. 예술가는 그러한 배치로부터 그 변화의 징후/조짐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자들이고 그것을 탁월하게 번역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니체는 그가 살던 세상, 사람들이 유토피아라고, 핑크빛 세상이라고 보던 시대로부터 그 시대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허무를 누구보다 빨리 감지하였고 그것에 대해 긴박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허무가 지금 우리 시대의 우울과 무기력으로 드러나고 있죠. 이처럼 철학과 예술은 무엇보다 아직 오지 않은 때의 조짐을 민감하게 포착하며 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알아챌 기회가 있는데요. 바로 우리가 경험한 것으로부터이죠. 그러나 아무리 겪을 당시 경험이 크고 놀라운 것이라 하더라도 경험만 한다고 그것이 다 우리에게 지혜로 작동하진 않습니다. 우리는 숙고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잊고 너무나 쉽게 그 경험 이전과 동일하게 살아갑니다. 경험이 환기하는 메시지를 읽지 않는 것이죠. 몇 년간 전 세계가 유례없는 팬데믹을 겪었음에도 우리는 지금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는가 싶을 정도로 그 이전과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분명 우리에게 환경 변화를 비롯한 많은 우리의 생활 양식들을 돌아보고 근본적으로 재점검하며 우리 삶의 형식이 이전과는 달라져야 함을 환기했음에도, 우리는 팬데믹이 줬던 경고 사인을 그저 하나의 예외로 치부하며 없던 일 취급합니다. 코로나는 우리와 무관한 어떤 예외적 무언가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 갑작스럽게 난입하여 우리를 불행하게 한 것. 우리는 이렇게 우리와 코로나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저는 채운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메를로퐁티의 ‘살’ 개념이 와닿았는데요.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산을 본다는 것을 나의 살(눈)과 산의 살이 합성되는 것입니다. 즉 메를로퐁티는 신체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본다는 행위는 봄과 보여짐이라는 상호 뒤섞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마치 불교에서 ‘촉(觸)’에 보는 것을 포함시키는 것처럼, 본다는 것은 세계 만물이 서로서로 접촉되며 그 살들의 뒤섞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보고 감(感) 할 수 있습니다. 즉 느낀다는 것은 나와 어떤 다른 신체들의 만남 속에서 무엇이 계속 발생하며 그와 동시에 나와 그 신체들이 서로 녹아드는 것입니다. (베르그손의 녹아듦!)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느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살들과 만나고 있구나!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로 인해 우리와 함께 발생한 우리 자신과 분리 불가능한 문제이구나. 이때 우리가 이 낯선 살들과의 만남을 우리를 확장하는 지혜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만남이 발생시킨 정동을 번역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느낀다는 수동은 그것을 번역하는 능동과 함께 작동할 때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이 됩니다.
인상주의 회화는 그 특유의 빛 표현으로 밝고 환한 느낌을 주는데요. 채운 선생님께선 이러한 인상주의는 사실 그 이전의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영국 산업혁명은 모든 관계를 수적인 것으로 치환하면서 모든 것을 척도로 환산했고 많은 공동체들이 무너졌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관념’ 그러나 관념뿐인,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켰고 이에 따라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합니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in Rainy Weather, 1877, 2122 × 2762 (mm)
https://en.wikipedia.org/wiki/File:Gustave_Caillebotte_-_Paris_Street;_Rainy_Day_-_Google_Art_Project.jpg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혁명으로 만든 이 사회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유럽, 특히 파리는 공동체의 기능을 중심으로 공간이 유기적으로 짜여 있었는데 부르주아들은 이 공간을 허물고 격자 도로와 광장 등으로 완전히 탈바꿈시킵니다. 이 당시에 들어선 것이 철도인데요 그러면서 표준시라는 개념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도시 계획은 많은 피란민들을 낳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슬럼은 눈에 보이진 않아도 도시와 비례에 증가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의 감각은 이러한 시공간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하는데요. 이때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등장하는데 바로 벤야민이 명명한 산보객(Flaneur)입니다. 이들은 일할 필요 없는 부르주아 계층 중 무목적적으로 도시의 아케이드 등의 시공간을 유영하듯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데요. 벤야민은 이들의 시선을 사진적 시선이라 부르며 시각의 특권화로 향하는 현대의 지각 방식을 포착하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용어가 ‘댄디’(Dandy)입니다. 이는 오늘을 우리가 쓰는 용법과는 좀 다른데요. 보들레르가 ‘현대적 삶의 화가(The Painter of Modern Life)’이라는 비평글에서 그려야 하는 것을 그리지 말고 지금 네가 경험하는(현대 생활)을 그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맞는 화가들을 ‘댄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즉, 이는 새로운 시공간을 감각하고 느끼는 자는 ‘자신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내야 함을 뜻하며 보들레르는 예술가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가 될 것을 환기합니다. 이후 푸코는 보들레르의 ‘댄디’ 개념을 자신의 삶을 자기 스스로 조형하는 미학적/시학적 태도 즉,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다르게 능동적으로 구성해 내고 다르게 살아갈 것인가의 ethos의 문제로 고찰합니다. 즉 댄디의 옷차림은 단순히 잘 차려입은 옷차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혹은 사회적 관념에 맹목적으로 의탁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등에서부터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재구축하는 역량을 함축합니다.
Henri Fantin-Latour, Homage to Delacroix, 1864, 160 × 250 (cm)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antin-Latour_Homage_to_Delacroix.jpg
산보객이 공간을 분절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쇼핑몰이든 공원과 거리든 어슬렁거리는 걸 좋아하는데요. 공간 자체를 스펙터클화하는 거죠. 그래서 기왕이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거리와 건물, 공원을 돌아다니려고 하고, 흉물스럽고 오래된 것들은 다 철거하여 시각에서 배제시키려고 합니다. <오버레이>에서는 고대의 유물, 신화 등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알려주는데, 이를 통해 우리의 감각이 어떤지 환기할 수 있었고, 공간을 어떻게 다르게 감각하고 관계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네요.^^ 샘의 일목요연한 후기 덕에 저번주에 다룬 내용 복습 잘 했습니다.👍
오~~~ 이렇게 복습을 도와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기억력은 가물거려도 읽으니 또 환기가 됩니다. 그저 반복만이 답이네요. 메를로 퐁티의 '살' 은 니체의 신체성을 좀더 육질적으로 번역한 개념으로 제게는 다가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살을 섞은 우리는 분명 다른 신체가 되었을 텐데, 그 신체성에 대한 각자의 해석역량이 부족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발생적 관점에서 신체를 마주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