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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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미술과 페미니즘, 시공간의 형태, 의식(儀式) 등 방대한 주제를 담은 루시 리파드(Lucy R. Lippard)의 <오버레이>를 다 읽었습니다. <오버레이>는 선사시대에서 현대까지 아울러 예술이 무엇인지란 질문을 계속 일깨우는 텍스트였는데, 많은 예술가가 예술의 상품화에 저항하고, 예술에 대한 규정성을 벗어나 새로 길을 내는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는 걸 알려주었습니다. 너무 많은 현대 미술가와 작품들이 소개되고, 개념미술, 대지미술, 생태미술 등 생소한 분야가 한꺼번에 펼쳐져서 이것을 다 소화하기에는 무리였지요. 하지만 방대한 시공간과 넓은 스펙트럼만큼 토론할 주제가 많아서 조별 토론은 매우 풍성했습니다. 조별 후기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각 조에서 나눈 얘기들도 샘들의 개성만큼 달랐던 것 같아요. 채운샘은 내용의 맞고 틀리는 걸 떠나서 조별 토론을 통해 웃고 떠들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공부를 통해서 현대 미술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백화점에서 ‘일상 속의 예술’을 내세우며 아트 마케팅을 펼치는 등 예술의 상품화가 공고해지면서,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없지 않죠. 그런데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예술의 물질성으로 비롯되는 상품화 가능성 등에 저항하며 비물질적 예술을 시도하고 다양한 퍼포먼스를 지속해온 예술가들이 존재합니다. 8주차 수업 끝나고 시간되는 크크랩 샘들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를 관람했는데요.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아갔다는 서슬 퍼런 시대에 김구림 선생님 등 여러 예술가가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시도했던 것이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강변의 타살>, <1/24초의 의미>, <바디 페인팅>, <콘돔과 카바마인>, <걸레> 등 다양한 작품(퍼포먼스 영상 포함)이 전시되어 있고요. <공습 경보>, <남북통일 원칙 합의 호외>, <신문 읽기> 같은 작품에서는 1960~70년대 시대상이 잘 느껴졌지요. 김복영 선생님의 “예술이 언제나 위기에 직면하면서도 다시 소생의 길을 찾아낸다는 것은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이다.”라는 말씀처럼 예술가와 예술은 한계에 부딪히면서 계속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콘텐츠와 작품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뭘 잘 만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 경험하는 것보다 잘 겪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는 자유의지, 의도대로 뭘 한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들뢰즈는 수동적 종합을 얘기하는데, 여기에서 핵심은 수동입니다. 잘 겪는 것을 말하죠. 우리가 생각하는 만남, 생각은 사실 만나지고,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들뢰즈의 이런 사유는 우리가 감염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존재라는 스피노자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비록 감염의 결과가 슬픔, 고통일지라도 우리는 계속 타자와의 만남을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의 위대함은 변이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기쁨의 방식으로 겪을 것인가와 어떻게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기존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며 재해석하는 게 우리의 공부죠. 완벽해 보이는 이론과 종교일지라도 모든 담론은 고유한 한계가 있지만, 또한 사그라지지 않는 고유한 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담론에 대해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를 가릴 게 아니라 재해석을 해야 합니다. 담론은 해석을 통해 계속 변이합니다. 베르그손은 부정의 형식에 대해 비판했는데, 이것은 결여나 부족하거나 틀린 게 아니라 긍정에 뭘 덧붙인 것이라고 말하지요. 대체로 우린 내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부정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에 맞는 건 사유를 촉발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들이 생각을 추동하고 질문을 유발하지요. 저 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사과와 싸워야 합니다.
채운샘은 <오버레이>에 있는 논의들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낡아 보일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렇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논의들은 고유한 힘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많은 예술가가 고대, 페미니즘 등을 기반으로 예술이 근본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작품을 만들어왔습니다. 이번 주에 읽은 부분인 의식(儀式, Ritual)도 예술가들이 예술과 삶의 유리, 예술가와 관객의 거리감 등을 고민하며 예술을 좀 더 능동적인 모델로 바꾸고, 관객들을 참여자로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리파드는 의식을 ‘어느 믿음 체계에나 그 중심에 있는 개인과 집단, 이론과 실천, 목적과 행동 사이의 균형에 대한 관심’으로 정의했는데요. 다시 말하면 의식은 공동체를 지배하는 리듬이라고 볼 수 있지요. 어느 시대에나 의식이 있는데, 지금은 의식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제사, 명절, 공휴일 등 의식이 있지만, 많이 느슨해진 의식은 우리를 공동체로 느끼게 하는 것 같지 않네요. 그런데 중요한 건 어떤 리듬과 의식을 형성하느냐죠. 작품뿐만 아니라 삶의 리듬과 양식에 관심을 가진 예술가들도 있었는데요. 예컨대 저번 주 강의에서 들은 댄디를 들 수 있습니다. 여전히 지배적인 서양-남성-백인이라는 다수성에서 어떻게 탈주하여 어디로 달아날 것인지, 즉 새로운 리듬과 양식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계속 모색해야 합니다. 다만 들뢰즈가 말했듯이 무기를 들고 신중하게 판단해야겠지요. 무턱대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나아가는 게 탈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건 어디로 가야 할지 비전을 설정하고, 도주할 때 쓸 무기를 장만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버레이>의 마지막 장인 “집과 무덤과 정원”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작품에서 어떻게 죽음을 형상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예술품은 불멸성을 꿈꾸게 하지요. 세잔이나 마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작품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세잔과 마네가 온전히 그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작품은 물질적이기에 퇴색하는 등 변하는데요. 다큐멘터리 <내셔널 갤러리>에서 봤듯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작품들은 끊임없이 수정, 복원되고 있습니다. 작품들도 나름대로 생로병사와 사건을 겪습니다. 작품은 우리 눈에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 눈앞에 있는 작품들은 일초 전과 일초 후에도 똑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베르그손이 말한 바와 같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속에서 무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일초에도 몇 조번을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세계와 만물은 변화를 지속하고 있지만, 근대는 죽음을 삶에서 추방하여 마치 죽음은 없어져야 하고 피해야 할 것처럼 일상에서 죽음을 상기할 기회를 빼앗아버렸는데요. 예컨대, 근대 이전에는 사망 후 본인이 살던 동네에 묻혔다면, 근대 이후에는 교외에 넓은 묘지, 납골당을 구축하여 이들을 삶에서 보이지 않는 걸로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죽음 외에도 노화, 낡음, 장애, 비효율, 병 등을 배제하며 이들이 없는 세계를 꿈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깨끗한 도시 옆에는 슬럼이 존재하고, 지금 여기의 깨끗함은 저기의 쓰레기 더미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내 눈앞의 편안함, 쾌적함만 중요하게 생각할 뿐, 이를 위해 밀려난 무덤, 쓰레기장, 발전소, 감옥, 정신병원 등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몇몇 예술가들은 근대가 추방한 것들을 환기하고, 여기에서 비롯된 감각을 도입하여 실험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술적 실천은 비단 예술가들만의 문제일까요?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처럼 삶에서 예술적인 걸 발견할 수 있는데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예술 비평도 예술과 삶이 관계 맺는 방식 중의 하나입니다. 채운샘 말씀처럼 우리가 쓰는 에세이가 꽃으로 피어날 수 있게 노력해보아요.^^
미술사 시간에는 마네를 다시 만났습니다. 푸코, 메를로-퐁티, 발터 벤야민, 루시 리파드와 접속하느라 바타유와 마네는 벌써 기억 속으로 묻혀버렸는데요. 여러 번 봐도 매번 다른 인상과 느낌을 주는 마네의 작품들입니다. 기억을 되살리자면, 마네는 어디선가 영감을 받아 창의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기존의 작품들과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과거의 작품에서 구도를 빌려야 했지요.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고 다채로운 창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창출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조망하는 걸 좋아하기에 그의 작품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 등을 보면 매우 답답하고 불편합니다. 전자의 경우 거대한 수직선처럼 느껴지는 나무들이 시선을 불편하게 하고요. 후자의 경우 모든 인물이 튀어나와 보이며 이들은 마치 덩어리들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리 이질적인 걸 감각해도 우리는 익숙한 걸 믿고 이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많은 작품을 감상해도 기억에 남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아는 걸 확인하고 그냥 넘어갔기 때문 아닐까요? 그림으로 들어가는 무한한 입구가 있지만, 우리는 낯익은 몇 개의 문으로만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에세이 기간에는 각자 낯선 입구를 찾아 들어가 이전과 다른 감각 체험을 해봅시다.
마네의 그림은 시각적으로 아름답기보다는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오는데요. <죽은 그리스도와 천사>, <군인들에게 모욕당하는 예수>는 시선 때문에 종교적인 느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시선의 불일치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성을 제거해버립니다. 전자의 경우 예수는 비참한 고통을 겪은 자답지 않은 모습이면서 시선이 무표정합니다. 또한 왼쪽에 있는 천사는 자신들의 감정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예수에 대해 비통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그림도 일단 예수에게서 영적인 느낌을 얻을 수 없고 예수의 시선은 공허하며 뭘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의 오른쪽에 있는 자의 시선은 그림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들지요. 두 작품은 우리가 종교적인 그림을 통해 기대하는 파토스를 해체합니다. 한편, <피리부는 소년>의 경우 소년 뒤에 어떤 공간도 없습니다. 소년은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고 있는데요. <폴리-제르제르의 바>에서는 거울에 더 많은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거울에 여인 앞에 있는 남자,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울 속에서만 나타납니다. 남자는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거울은 거울 앞에 있는 걸 재현해야 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거울에 재현된 것과 거울에 비쳤어야 하는 것 사이에 왜곡이 발생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원본에는 없으나 사본에는 있는 걸 나타내면서 원본이 없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마네의 그림은 다양한 질문을 유발하고, 어떤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마네의 위대함이고, 그래서 많은 철학자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 2학기 9주차(6.24) 수업에 대해 공지합니다.
1) 에세이 개요를 작성하셔서 금요일 저녁 8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이번 에세이는 개념을 사유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개념이 잘 작동하도록 해야 하고 작품을 통해 개념을 더 구체화합니다. 물론 출발점이 있어야 하고 그 누구도 아닌 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바타유, 푸코, 메를로-퐁티, 발터 벤야민의 개념에서 주제를 선정하여 6명(다비드, 고야, 터너, 쿠르베, 마네, 모네)의 화가 작품 중에서 3~5개를 활용하여 분석합니다. 분석과 묘사는 다르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채운샘은 개념을 먼저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전시회 끝나고 샘들은 에세이 관련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내게 인상적인 작품을 정하는 게 먼저냐, 개념을 선택하는 게 우선이냐 옥신각신했지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린 개념들을 다시 되살리는 게 필요합니다. 텍스트를 다시 깊이 만나보시기를요.
2) 9주차 간식/정리/후기는 1조 희욱샘, 2조 지민샘, 3조 반디샘께 부탁드립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토요일에 만나요.^^
지난주 배운 내용이 한 큐에 잘 정리되네요 ^^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전시 관람도 함께 하신 분들은 배운 것들을 각자의 방식대로 작동시켜 볼 귀중한 경험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버레이’는 방대한 내용들로 어려웠지만 현대미술을 향한 저자의 애정과 비전, 그리고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도 많이 배우게 되어 좋았습니다. ^^ 세심하게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