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강의 정리]
*공부: 나의 동일성을 해체하기, 함께 공부한다는 것
공부를 한다는 게 무엇일까?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세미나 형태로 여러 샘들과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얘기하고 웃고 떠들고 하는 공부를 하다 보니 사실 이전에 혼자서는 뭘 어떻게 했었나 싶을 정도로 공부=세미나 이런 공식이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채운 선생님께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 뭔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계속 자기이려고 하는 동일성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우리는 나를 자극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통해서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 불편함을 통해서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 당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내 욕망이 무엇인지 등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공부는 ‘원래 그런 나’와 끊임없이 투쟁하는 과정입니다.
이때 내게 이러한 불편함과 각종 거슬림을 주고 늘 딴지를 걸어주는 타자들에게 우리는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선별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은 내 동일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 - 우리는 익숙함들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기분 좋게’ 느껴지기 때문에 나를 도와주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 이러한 것들이 아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야말로 나의 견고함을 와해시킬 수 있는 진정 긍정적인 것으로,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죠.
규문에서 우리가 하는 공부와 그 방식은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으며 나아가 표준적 앎에 균열을 내는 데에 있습니다. 푸코가 ‘앎들을 봉기하게 하라’는 멋진 말로,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인권을 말할 때, 직접 살인자의 목소리를 그 스스로가 확성기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준 것처럼, 표준적 앎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논리 없고 근거 없는 것으로, 그리하여 이른바 소음이나 ‘헛소리’로 분류되기 일쑤인 얘기들을 가감 없이 해볼 수 있는 그러한 장이 바로 우리의 세미나이고 우리의 토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장자리의 소리들을 우리가 우리만의 바운더리에서 우리 만의 우물에서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채운 선생님은 우리가 우리의 이러한 헛소리, 아무것도 아닌 소리들을 각자 나만의 골방에서가 아닌 실질적 싸움터에서 링 위에서 해야 의미가 있다고 하셨죠. 그것이 바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이며 또한 그렇게 함께 전투에 참여함으로써만이 비로소 나의 역량을 알게 되고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책을 읽고 말이 안 되는 말이라도 더듬더듬 각자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내고 함께 이에 대해 말하는 것, 그러한 항상된 성실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식이 곧 내용이듯, 우리가 예술과 비평에 대해 공부하는 것, 감각에 대해 공부하는 것과 자신과 타자를 각자의 동일성의 굴레로부터 상호 해방시켜 주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매주 서로를 향한 존중과 예의를 갖추며 즐거운 투쟁의 링에 성실히 오르는 것 즉, 매주 성실히 참여하고 과제를 수행하고 서로의 얘기들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꼭 유념하고 공부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에세이에 관하여
에세이에 대해 채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정리합니다.
- '서론, 본론, 결론 / 들어가며, 나가며(금지어!)' 이런 식으로 구성하지 말고 구체적인 소제목을 붙여서 구성할 것. 소제목은 해당 단락들을, 제목은 전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고 진지하게 고심해서 잘 붙일 것. (금지 제목: ~의 개념으로 본 ~의 회화 등)
- 작품과 개념을 기계적으로 꿰 맞추지 말고 작년에 이어 1학기까지 우리가 배운 그림 분석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개념을 그림에서 작동시킬 것. (느낌/감상으로 우기지 말 것 ^^)
- 너무 많은 개념들을 넣지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핵심 하나를 깊게 정리하여 글이 잘 수렴하도록 할 것.
- 작품 선정 자체부터 중요한데, 어떤 작가의 작품들의 공통된 경향성 속에서도,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준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을 고르고, 고른 3-5작품들을 따로 흩어지게 하지 말고 하나의 계열로 묶이도록 할 것.
- 마네는 왜 유사성을 거부했을까? 와 같이 질문에 이미 전제가 규정된 방식으로 질문하지 말 것 + 화가가 왜 이걸 이렇게 그렸을까?처럼 주체를 화가에게 두고 묻지 말고, ‘내게 이 작품이 어떻게 다가왔는가? 기존에 내가 그림 보는 습관이 이 그림으로 인해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는가?’ 등에서 시작하며 거기에 배운 개념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분석을 펼칠 것.
- 철학자의 개념과 화가의 작품은 그것이 무엇과 싸우는, 무엇을 전복하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하고 쓸 것.
*모네
지난 시간에 인상주의자들의 아스라하고 반짝이는 풍경들이 프랑스 혁명과 그 뒤의 파리코뮌 투쟁의 피 위를 마치 없던 것처럼 말끔히 치우고 그 위에 철과 유리의 매끈함으로 무장한 새로운 근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고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예민한 감수성으로 가장 먼저 포착한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항상 그러한 시대의 징후들이 먼저 포착됩니다. 1848년 쿠르베의 석공 그림이 그랬고, 마네의 올랭피아가 그랬죠. 모두 첫 등장에서 한 마디로 주류적 기준에서 헛소리, 소음 등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인상주의도 마찬가지였는데요. 1874년 인상주의 1회 전시는 ‘저기 무슨 그림이야? 인상이지?’라는 폄하를 들어야 했죠. 그리고 인상주의라는 명칭에는 그러한 조롱이 들어있었습니다.
Claude Monet, Impression, Sunrise, 1872, 48 × 63(cm)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주의는 완전히 주류가 되었습니다. 기존 사물들이 가진 고유성이 빠르게 사라지고 자고 일어나면 달라진 세계 모습이 풍경으로 드러났고 그로 인해 자연은 이제 인간이 인간의 마음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에, 인상주의에서 ‘풍경’은 거의 6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보편적인 소재가 되었습니다. 인상주의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와 동시에 대중의 요구에 맞춰 스스로를 자기 복제하게 되며 1882년 마지막 전시를 끝으로 저물게 됩니다. 물론 대중은 계속해서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좋아하지요.
모네도 처음에는 아주 새롭게 앞선 감각으로 대중을 견인하던 인상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음을 감지하고 자신만의 방향을 모색하는데요. 모네는 인상주의의 극단에서 자기 눈에 보이는 것에 천착합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물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그립니다. 그리고 이때 같은 대상이 빛, 습도, 날씨 등이 달라지면 완전히 다르게 보임은 물론, 보는 나 역시 동일하지 않음을 깨닫죠. 돌로 만들어진, 그처럼 굳건해 보이는 루앙 대성당 그리기를 실험하며 모네는 그것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존재함을,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봅니다.
Claude Monet, Rouen Cathedral, West Façade, Sunlight, 1892, 100 × 65(cm)
Claude Monet, Rouen Cathedral, Portal and Tower Saint-Romain in the Sun, 1892-1893, 107 × 73(cm)
Claude Monet, Rouen Cathedral, Portal, Sunlight, End of the Day , 1892, 100 × 65(cm)
특히 말년에 모네는 백내장이 심한 상태에서 그림을 계속 그리는데요. 우리에게 유명한 수련 그림 등은 모두 이처럼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려진 작품들이죠. 채운 선생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못하는 상태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이 말이 정말 와닿았어요. 우리는 뭔가 완전히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만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없어서, 여건이 안되어서 실은 내가 무얼 하고 싶고 뭘 할 수 있지만 못한다고 말을 하죠. 그러나 눈이 흐리면 흐린 대로 그것이 포착하는 세계 또한 진실이고 그것 또한 세계인 것인 것처럼,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것은 그런 상태로 세계와 만나는 것일 뿐, 무엇이 결여된 상태가 결코 아닙니다. 즉 세계의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이러저러한 조건들 속에서 만나는 것이 곧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은 그저 온전한 세계인 것입니다.
Claude Monet, The Japanese Footbridge, 1920-1922, 89.5 × 116.3(cm)
[10주차(7/1) 공지]
1. 에세이 3쪽 분량 작성하셔서 6/30(금) 밤 11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이 시간까지 올린 에세이만 발표할 수 있습니다. 마감시간 엄수해 주세요.
2. 다음주는 9시부터 시작입니다. 노 지각 노 결석!!
3. 다음주 간식은 샘들 각자 함께 드시고 싶으신 것 조금씩 가져 오시면 되어요!
모두 에세이 화이팅!!! 🙂
주어진 여건 속에서 에세이를 쓰겠단 각오보다 또 푸념이 앞서려고 하네요. 습관이 또 발동. 우리 지안샘은 에세이를 쓰기 위해 습속에서 일단 자신을 끊어냈네요. 매주 과제를 저와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후미에 제출하는 귀한 벗이 공지를 빨리 올리다니. 화들짝 놀란 맘에 댓글이 절로 써집니다. 토요일의 링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까 ㅋ. 잘 읽고 마음을 다시 잡아봅니다.^^
경희샘 이번주에는 에세이라는 더 큰 고통이 제 등을 밀어 도와주었답니다.. 그래서 가만히 제가 돌이켜보건대... 금요일 저녁 세미나를 했던(모두가 무리수라고 비웃던)것이 이 습을 고치는데 가장 효과가 (그나마) 좋(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글쓰기는 왜이렇게 시작이 특히 더 어려울까요?
샘~~퐁티의 '살'의 깊이를 고민하시기도 벅찰 텐데ᆢ이렇게 강의 요지를 감동스럽게 올려주시다니 ᆢ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자폐의 청각장애를 벗어날 수 있겠지요? 링 위에 오르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런 비전을 믿기 때문일 겁니다. 그 밖에 달리 다른 길이 없음을 알기에, 기꺼이 링 위에 서는 거지요.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치만 도망치고 싶어" 복수적인 힘들의 투쟁이 펼쳐질 수 있는 링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규문이라는 체육관이 매주 문닫지 않고 열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샘들~~~ 에세이 즐겁게 쓰시기를요~~화이링!!
타자와 함께 뭔가를 같이 하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지만, 서로의 차이가 섞여 들어가며 동일성을 해체함으로써 발생하는 충만함이 있는 것 같아요. 세미나를 할 때 각자 써온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면서 우리의 지평이 넓어지는데요. 글을 쓰고 숙제를 하는 게 쉽지 않지만, 이걸 통해 사유라는 것도 하고 신뢰와 소통의 장도 마련하지요. 내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 신체에서 발생하는 정동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잘 엮고 싶은데, 참으로 힘든 과정입니다.ㅋㅋ 샘들이 어떤 작품을 들고 올지 기대됩니다. 다들 홧팅하시고요. 공부에 대한 태도와 에세이 가이드 등을 깔끔하게 정리해준 공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