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후기는 1조의 세미나에서 나온 질문과 답변 중심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시간의 전복은 어떤 의미인가?’ 였습니다.
“퐁티의 경우처럼 낮과 밤의 단순한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니의 관점에서) 이런 전복은 또 하나의 예속일 뿐이다. 부르주아의 낮을 흉내내기 위한 밤의 희생이기에 사유의 전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라는 의견에 대해서 “그러나 퐁티의 일은 원래도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노동(넝마주이)이기에 밤에 오물을 수거하고 낮에 글을 쓰는 행위는 꿈을 꾸고 서점을 찾기 위해 필요한 자유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랑시에르는 고니의 입을 통해 퐁티의 행위를 비겁한 것, 자학에 빠진 것이라 말한다. 과연 그를 비루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라는 반론이 있었지요.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퐁티의 노동을 비루하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명예롭다고도 이야기하였다. 그럼에도 랑시에르가 고니의 입을 빌려 퐁티의 노동 형식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의 전복이 부르주아의 낮을 동경하는 방식으로 결국 동일한 원환의 착취와 억압의 체계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변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조금 다른 관점으로 시간의 전복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노동의 시간 속에 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 듯 하다. 그동안 회사에서의 퇴직만이 이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며 다른 지점이 보인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동료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기질과 성향을 파악하고 언행을 분석하다 보면 노동의 권태가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을 발견하며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다. 자신의 노동에서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는 것도 시간의 전복이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시간의 전복은 “고용주나 장인으로부터의 속박을 끊어내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시간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간을 소유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는 의견도 이어졌답니다. 1조의 샘들은 퐁티에 공감하고 퐁티에 대한 고니의 비판을 반박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후기를 쓰면서 생각해보니 고니도 퐁티도 당시에는 서로의 방법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친구란 그런 법이지요. 고니나 퐁티 중 한 사람이 맞다기 보다는 랑시에르는 당시 다양한 층위의 노동자들의 글에서 특히나 고니의 사유가 자신과 잘 공명하였기에 새롭게 그의 사유를 번역해낸 것이겠지요.
두 번째 질문은 “몸이 진흙탕 안에서 살아가는 곳에는 사유의 고양이 존재하지 않고, 영혼의 성화는 감각의 성화에 의해 일어난다(119p)”는 구절의 의미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이 구절은 참 해석하기도 어렵고 어찌 보면 랑시에르에 대한 오해를 낳게 하는 대목인 것 같아요. “고니는 퐁티가 오물을 치워주는 대가로 시의 하늘로 날아오를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만, 퐁티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복이나 시도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라는 반론이 나왔지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의견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진흙탕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퐁티가 오물을 수거하는 밤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부르주아의 낮의 생활을 모방하는 시공간을 진흙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감각의 성화란 시간을 전복하여 자신의 노동을 소유함으로 가능한데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는 영혼의 성화가 어렵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노동을 소유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날품팔이의 병인 ‘권태’를 탈피하여 자신의 노동과 사유를 본성상의 변화를 통해 자유의 열기로 행할 수 있을 때입니다. 저는 영혼의 성화는 이 순간을 감각할 수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라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저의 추론이고 다른 샘들께서 의미를 풀어보셨다면 댓글로 보완해주시면 좋겠네요! ^^
세 번째 질문은 ‘하나의 다른 인간성은 어떤 것일까?’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부르주아나 장인과 대치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종소리를 예상하지 않고, 감시자를 착취를 위한 회계원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전제의 인간이라는 대목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지요. 저는 이 지점에서 고니가 어떻게 당시의 상황에서 이런 감각과 사유를 가질 수 있었을까 감탄했습니다.
이에 “고니의 생각이나 방법은 너무 이상적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삶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고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이 끝나면 자신의 취미나 공부를 하며 퐁티처럼 살아가는 것을 반대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견도 있었지요. 여기에 대해 저는 고니의 꿈이 과연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고니 역시 수많은 실존적 노동의 경험에서 자신만의 과학적인 ‘수도자의 경제학’을 만들어 검약의 방법으로 자신의 꿈을 실천했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꿈을 꾸고 이상을 갖는다는 것이 과연 현실을 모르고 가능할까요? 고니는 누구보다 1830년대 노동자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사유와 이상을 꿈꾸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에 대한 모호한 메타포적 환상으로부터 대패질로 쪼개진 세계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분석이 있었기에 그가 자신의 꿈을 새롭게 추동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5장을 읽으며 4장의 후기를 다시 쓸려니 내용과 정체성의 혼종이 일어납니다. 후기를 쓰는 것도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ㅜㅜ 낮의 노동과 밤의 독서가 주는 불일치만큼 계속해서 혼란이 이어질 듯하니 이쯤에서 후기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서 5장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일하며 공부하는 밤을 보내시느라 다들 수고가 많으십니다! ^^
토론에서 나온 다양한 얘기를 질문과 답변의 구성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셨네요.^^ 시대상을 감안했을 때 퐁티의 방식도 의미가 있고, 우리는 그것조차도 실험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는 확실히 퐁티의 방식은 밤과 낮의 자리바꿈이란 생각이 들었고 기존의 밤과 낮의 분할선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고니의 비판도 공감이 갔습니다. 5장에서 여러 노동자의 실험들이 나오는데, 고니를 비롯해 삶 속에서 자기 철학을 구현해나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았고 이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네요.
참 영혼의 성화와 감각의 성화와 관련해서는, 이 영혼이라는 것이 신체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감각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와 영혼의 성화는 같이 가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5장에서도 일상업무(노동)가 존재방식과 관련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노동을 한다면 그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지, 감각하고 느끼는지를 봐야 그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구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찬 후기 덕분에 랑시에르가 우리에게 던진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ㅎㅎㅎ 4장과 5장 내용의 혼종도 좋네요^^ 1조에서 퐁티에 공감하는 의견들이 많았군요 흥미롭습니다. 질문들은 2조랑 겹치기도 했던 것 같아요. 2조에선 퐁티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그렇게 해서는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없고 그렇게 해서는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점에 의견에 좀 더 모여졌전 것같아요. 직장 생활을 마지못해 하는 일종의 버리는 시간으로 여긴다면 … 그것이 얼마나 내 인생자체가 허무해질까…
현실을 모르고 꿈과 이상을 가질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신 신우샘 의견에 공감이 되네요~ 저는 고니에 공감을 하면서도 고니의 방식이 현실 회피나 정신승리랑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거든요. 1조 토론 얘기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시고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