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완성은 가치의 전도, 고독, 행복을 향한 끊임없는 행위를 기반으로 한다. 자신의 존재와 행위의 일치속에서 자기 소외나 부정을 넘어가게 된다. 자유, 연대, 평등의 확장의 문제도, 심지어 '박애'조차도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는 무한 긍정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사랑은 시작점으로 자리매김 가능하다.
(세계의 부패, 인간의 부패의 문제)
증오와 부정이 자기 소외와 만나는 지점은 파괴, 전쟁, 대립의 정점으로 끌어간다. 타인들을 구원하겠다는 헌신으로 시작된 혁명적 이데올로기 조차도 계급들 사이의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어떤 논리도 분리와 분열, 대립과 증오의 기반 위에 서 있다면 자신의 이기주의를 헌신으로 포장하게된다. 이것은 감춰진 권력의지로, 인간과 세계의 부패로 이어지게 만든다. 한 예로, 인민 연대를 추구하는 평등주의 원칙인 공산주의 사도의 헌신도 ’계급연대‘를 정치 사회의 불평등에 대립시키며 계급 분할과 이기주의, 부패로 이어지게 된다. 노동자 연합에서도 이익의 일치만 있고, 회원들은 남이 되고, 행위는 확장되지 않는다. 분할, 부정은 자신의 실존을 소외시키고 자신과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보편적 공모를 향한 개방성)
사랑은 사랑과만 교환된다. 또한 계산없이 주어짐으로써만 교환된다. 이 보편적 공모는 합리적 조직 형식과는 다르다. 사람을 모으는 소명이 아니라 폄훼하는 자신들의 자유를 구가 하려는 순결한 서광이다. 동일한 생각을 향유하지만 저마다의 고독속에 박힌다. 고귀한 행동에 대한 열정, 동료의 고통에 대한 부드러운 연민이 기초가 되지 않을까.
자신의 실존이 자신의 행동, 자신의 노동과 일치된다는 것은 완전히 자신을 소유한 상태에서 나오는 긍정적 삶의 태도이다. 이 지점에서는 심장의 뜨거운 피가 들끓고, 시인의 영감이 일어나고, 영혼의 목소리가 부활한다. 이 상태에서는 사도의 헌신도 프롤레타리아의 이기주의적 행복과 분리되지 않는 타자와의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계산 없이 주어지는 사랑이 진정한 연대의 출발점이 된다.
(사도와 노동자의 헌신의 지점)
자신의 이기주의적 향락과 동료들과의 연대를 희생시킨 선량한 가장/ 노동자의 헌신. 이 의미는 물질적/ 도덕적 이해 관계 사이, 투사의 탕진하는 헌신과 노동자의 절약하는 헌신에 공통적 척도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정이란 지나치는 마주침에서 시작한다. 자유의 두 실존 양식의 발생은 침전의 사유가 무르익는 사막과 밀도가 폭발력을 부여하는 극단의 군중 사이에서 여행하기 때문이다. 도시 인간 견유학자 디오게네스는 무소유로 소유하는 반란의 개인성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든다 (소비 억제를 통해서 착취의 군림에서 빠져나가는 근대적 수도자로서 본성의 위엄을 개별적으로 재발견하는 이런 자유는 현재의 능동적 도덕을 만족하는 철학이다).
사막 인간 세례요한은 오성의 규정 너머에 위치하며 무 매개적인 의미에서 반란 정신이다. 고통에서 멀어지는 상상력은 고독한 명상 속에서 인간성의 슬픔과 희망을 모은다. 미래 해방에 대한 비젼을 갖는다. 복수조차도 노예의 분노가 아니라 ’신성한 봉기‘이며, 도시의 혁명을 사막의 지평위로 해방된 실존을 위한 중단없는 발견과 연결한다.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꾼다)
이기주의적 행복의 물결 앞에서 물길을 틀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모두에게 인정 될 수 있는 다른 원칙을 지닌 역의 물결을 조직하는 것이다. 사도와 대중의 에너지가 결합하고 각각의 부분이 서로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 사도가 실천하는 헌신을 대중에게 가르치기 위해 근사한 가정을 바라는 성실한 노동자의 동경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권리 및 의무가 향락 및 희생과 동일시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사도의 보존된 위험과 대중의 되찾은 위엄을 동시에 표상하는 원칙이다. 문제는 자아의 동일시가 아니라 타자들과의 동일시에 있다. 이것은 고독한 자를 자기 동료들인 숭배하는 군중과 화해시킨다. 이는 포로가 된 영혼의 목소리가 ’사막에서 망각된 채로 죽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영혼의 소명을 선민의 사명으로 삼기 위함이다. ‘노동하는 계급이 스스로의 권리와 이해관계와 자유를 방어하기 위해 언젠가 완수해야 할 의무를 예견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
목수 고니가 제화공 부알로에게 찬양의 순결한 서광으로 바친 찬가는 꽃이 이슬에 바치는 詩로 표상된다. 자신과 타자의 긍정, 헌신, 신성한 연대, 우정과 사랑은 어떤 조건에서도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고양 시키는 전제로 작동한다. 공모를 향한 개방성으로 ....
“ ... 이슬은 결코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해 떨어지는 법을 알지 못하며, 꽃은 다른 꽃들로부터 자기 향기를 숨기는 법을 알지 못하고, 식물은 고통의 치유를 삼가는 법을 알지 못한다 ... ’
규문의 트럼프라는 별명과 함께 자본주의 예찬론자로 불리기도 했던 동주샘, <프롤레타리아의 밤>과 찐하게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신 것 같네요.^^ 이번 장에서 저는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문제의식을 끌어내고 삶에서 다양한 실험을 했던 노동자들을 보면서 감동했고, 배움과 사유는 어디에서든지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는데요.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 삶의 긍정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통해 느낀 생각들과 함께 고니의 멋진 시로 마무리한 샘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샘께서 ‘ 자유, 연대, 평등의 확장의 문제도, 심지어 '박애'조차도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는 무한 긍정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사랑은 시작점으로 자리매김 가능하다.’ 라고 써주신 부분에서 연합의 한계를 지적한 랑시에르의 분석이 다시 떠올랐어요. 연합 사랑 우정이라는 여러 연대의 방식이 소개되며 확장이 ‘사랑’을 거쳐 가능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샘께서 사랑을 자기긍정을 내포한 연대의 시작점으로 보신 지점에 특히 공감했습니다~~! 멋진 후기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