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차 3교시 강의]
*자본주의의 추상화 과정
이번 장은 1830년 7월 혁명 직후, 자신이 기반하고 있던 삶의 영토로부터 내몰린 자들의 구체적 서사가 등장합니다. 여러 번에 걸쳐서 랑시에르는, 이들이 특별히 낙오된 무리들이 아니라 당시의 ‘보통 사람들’이었음을 강조하죠.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던 이들이 이런저런 예기치 못한 불행들을 맞이하며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 과정에서 어떻게 생시몽주의에 합류하는지 보게 됩니다. 채운 샘께선 초기 자본주의가 화폐, 노동, 땅 이 세 가지를 탈영토화 탈코드화를 통해 추상화하며 형성된다고 말씀해 주셨죠. (feat. 스콜세지 옹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 꼭 보십시다!)
자본주의는 먼저, 모든 것을 화폐로 환산토록 하며, 단일한 가치 척도 아래 둡니다. 만물을 기르던 땅은 이제 평 단위로 분할 가능한 것이 되면서 등질적으로 가치가 매겨지게 되고, 이전에는 각자 가진 다른 능력에 따라 저마다 다른 노동의 가치를 가졌던 노동은 단위 시간에 대한 임금으로 추상화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가치 척도로 추상화된 방식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도 이처럼 추상화 하는데요. 예를 들면, 각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질이 다름에도 시간을 양적으로 동일하게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공부와 스케줄을 잡곤 하죠. 이러한 자본주의의 추상화 작업은 근대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으로 매끄럽게 포장되며 독려되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이 화폐로 환원된 부를 통해,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분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들에 있어서 가문의 역할을 자신의 혈연관계-자신과 동일한 미니미-에 부여하며 축적한 부가 이 통로를 통해서만 흐르도록 합니다. 그 가문의 모든 것이 계속 그냥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물려준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가 없었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은 고생해서 부를 축적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재산을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존재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따라서 근대적 가족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피'의 혈연관계를 모든 관계의 최상위에 놓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공동체적 관계들은 해체됩니다. 숱한 공동체나 조직들이 가족관계와 상충하며 문제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목격하죠. 우리 사회는 그러한 가족주의의 절정인 (동시에 초개인으로 와해되는) 어떤 지점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조건으로서의 비참이 존재로서의 비참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가, 초기 자본주의에 휩쓸려 온갖 비참함을 경험하고 있는 당시 노동자들에게 빙의되어 본다면 생시몽주의는 어떻게 느껴질까요? 조별 토론에서 생시몽주의에 대해 각자 해석한 여러 결들을 읽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가진 믿음/비전 등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못했었는데요. 채운 샘께선, 생시몽주의의 가장 급진적 측면은 당시 천하디 천한 것으로만 여겨져 왔던 ‘노동'을 신성함의 외화(外化)로 보고 이에 대한 자부심을 많은 노동자들에게 불어넣은 지점에 있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몸 하나로 떠도는 자들이 비참함과 절망 속에서 누군가로부터 ‘신적인 것(고귀한 것)은 노동하는 당신들에게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복음처럼 마음을 울렸을까요. 저마다 이유는 달랐음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생시몽주의에 경도된 이유는 노동에 신성함을 부여함으로써, 노동자 자신들이 처한 조건의 비참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그 신성함을 각자의 현존과 일치시켜 스스로 존엄함을 느끼도록 해 준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채운 샘께선, 우리가 어떨 때 스스로 존엄하다고 느끼는지 질문하셨는데요.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우리 존재를 일치시키며, 우리의 존엄성이 조건에 좌우된다고 여기는 점입니다. 우리의 오류는 비참한 조건에선 내 존재가 비참해질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조건에선 내 존재도 그만큼의 가치를 갖는다는데에 있는데요. 랑시에르는 남들에게 보일 때의 비참이 (조건으로서의 비참이) 존재로서의 비참으로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을 통해, 존재의 존엄함이란 외부에 요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어떤 실천들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노동에 부여한 이러한 신성의 가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족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시몽주의 자체에 내재한 한계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서 있는 현실에서의 배치의 판이 바뀜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믿음으로 나를 긍정하게 해왔는데 내가 하는 노동을 도무지 긍정할 수 없게 되는 현실, 그 믿음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버거운 지점들에 봉착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는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믿음 속에서 - 그것이 내 존엄함을 지키는 일임을 알기에 -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자기분열이 일어나고 많은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은, 랑시에르의 논점이 결코 생시몽주의 자체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가를 내린다거나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결론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흔히 48년 2월 혁명이 계급의식을 장착한 노동자들의 단결된 각성으로 일어났다고 말할 때 가려지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구체적, 실질적 생각과 활동들에 있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우리가 계급이나 집단이라는 단일함으로 관념화하는 것이 수많은 불화와 불일치(개인 간 혹은 개인 안에서) 와중에 단지 임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더불어 이 불일치와 불화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분할선이 다르게 그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하죠.
*종교성
끝으로, 조별 토론에서 생시몽주의의 종교성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나왔었는데요. 채운 샘께선 우리가 어떨 때 ‘종교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먼저 물으셨죠. 우리는 흔히 초월성, 신성함 등을 종교성으로 꼽곤 하는데요. 채운 샘께선, 종교에서의 초월은 우리가 생각하듯 ‘지상을 훌쩍 뛰어넘어’ 완전히 다른 원리를 좇는 것이 결코 아니고, 현실 ‘속’에서 초월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보살’은 단 하나의 존재가 자기 번뇌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그 한 존재 때문에 내 해탈을 꿈꾸지 않는 존재. 가장 마지막에 문을 닫고 가는 존재입니다.
즉, 보살의 존재로 알 수 있는 것은, 종교의 초월은 번뇌로 요동치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그것을 넘어가는 길을 발명하려는 것에 있지 번뇌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길을 발명함에 있어서의 도구가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이고 기독교에서는 지성과 사랑인데요. 불교에서 지혜 없는 자비는 동정과 연민에 불과하고 자비 없는 지혜는 칼과 같은 것으로서 그 두 가지는 서로 동반해야 하는 것이자 얽혀 있는 것으로 봅니다. 생시몽주의에 종교성이 깃들어 있다면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요?
[6주차(3/23) 공지]
1)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8장까지 읽으시고 발제 및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금요일(22일) 저녁 8시까지 올려 주세요.
2) 다음주 미술사진팀은 <코끼리가 숨어 있다>를 책의 2/3까지 영화팀은 <필름메이커의 눈>을 책의 중반까지 읽어옵니다.
3) 다음주 간식-후기-정리는 지민샘, 산푸른샘께 부탁드려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고니스러운 한 주 보내시길! ^^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자신의 비참하고 열악한 조건에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고 역량과 존재가 일치하는 고니와 같은 노동자들의 삶이 놀랍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뜻대로 되지 않고 조건이 안 좋을 때 외부를 탓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방식으로는 설사 원하는 걸 이루더라도 자리 바꿈에 그치거나 삶의 일부분을 부정하게 됨에 따라 존재와 역량이 분리됩니다. 니체가 얘기하던 삶의 긍정성이 무엇인지 고니를 비롯한 노동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게되는 것 같네요. 노동의 이중적인 면모, 고귀함으로서의 노동이 또한 족쇄가 되어갈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노동 뿐만 아니라 삶에서 마주치는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이 없으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고귀함 삶을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난 어떤 걸 고귀하다고 여기는지도 봐야겠지요? 바쁜 와중에 주제별로 핵심적인 내용을 잘 정리해준 공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