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평론가 되기 과정 – 크크랩’이 드디어 개강했다. 세미나가 열리는 규문각의 공간성이 좀 낯설게 느껴졌다. 20여 명의 ‘미래 예술평론가’들로 가득 차 생기가 넘쳐났기 때문인가. 20대부터 50대까지로 구성된 우리가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게 ‘행운’처럼 보인다. 어디서 이런 조합으로 세미나를 할 수 있을까. 일반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기회다. 서로서로 다른 힘들의 상호작용으로 열띤 토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제, 우린 그런 토론을 했다.
김종철의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은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에 대한 비평을 다루고 있다. 비평가는 어떤 작품의 문제점을 꼬집어 매섭게 비판하는 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나에게 김종철의 비평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아서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이 비평적 글인 건가 라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어쩌면 비평이 뭔지 잘 몰랐기에 그런 느낌이 든 것일 수도 있다. 『고해정토』는 미나마타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사건은 “근대적 산업활동으로 인한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질소비료회사가 수십 년 동안 산업폐기물을 마나마타의 바다로 유출해 그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독성물질의 피해를 입힌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언어장애가 생기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충주신경이 마비되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그런 사태들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 조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고해(苦海)에서 정토(淨土)로 나아갈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달리 말하자면 왜 이시무레 미치코는 그런 재앙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샤먼적 기록에 『고해정토』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말을 못하게 되고 사지가 마비되는 재앙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자신의 삶을 어떻게 비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시무레는 타고난 무당입니다. 이 작가가 미나마타의 비극 가운데서 포착해낸 것은 이 살아 있는 생명감각이 빚어내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극한적인 절망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 가고 있는 환자들을 통해서, 말하자면 고해정토(苦海淨土)의 원리를 발견한 거죠. 즉 지독한 절망과 고통이 도리어 축복이 되는 상황 말입니다.”(339~340)
고해정토는 말하자면 우리가 마주친 절망적인 우연한 사건을 어떻게 겪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살아있는 생명감각을 빚어낸다는 것은 근대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한다. 노동할 수 없는 사지 마비된 사람은 근대적 논리에선 무가치한 자로 여겨진다. 그 자신 또한 스스로를 살 가치가 없는 자로 비하하게 된다. 그곳엔 절망과 원한만이 가득 차서 스스로 삶을 파괴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시무레는 그런 비극에 처해있는 환자들에게서 살아 있는 생명감각을 포착하고 그것을 샤먼적 기록으로 남긴다. 이것 또한 이시무레 자신이 고해에서 정토로 이행해 가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이시무레는 환자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샤먼적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보도 형태인 르포가 아니라 환자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 교감하는 형태인 기록을 할 수 있었다. 샤먼적 감각이 곧 생명감각이며 그것이 바로 정토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토의 실현은 모든 만물이 근원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대지 위에서 가능하다. 대지적 삶의 긍정은 지독한 절망과 고통조차도 축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샤먼적 예술과 연결된다. 그런 면에서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수성, 대지에 귀 기울이는 감수성은 자신의 상태를,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긍정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한다. 이시무레는 너와 나의 경계를 상정하는 근대적 감각을 넘어 타자와 공감하고 접속하는 샤먼적 주술성을 빚어낸 작가이다. 그러니까 샤먼적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파편화된 우리의 근대적 감각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자인 것이다.
현주샘 핵심적인 내용을 잘 담은 후기 감사해요!!!
혼자 읽을 때에는 <고해정토>가 내게 준 울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웠는데, 이번 토론과 강의를 통해 그것이 만물이 연결되어있음과 삶에 대한 긍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네요.
지독한 절망과 고통이 도리어 축복이 되는 상황, 고해정토의 원리는 계속 화두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현주샘 후기 감사합니다~! 고해정토 제목에 대해 잘 정리해 주셔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새겨 보게 되네요. 고해에서 정토로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 차분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인 것 같아요. 마지막에 샤먼저 예술가를 근대적 감각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자로 연결시켜 주신 것도 푸코의 진단하는 비평의 관점에서 잘 이해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