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 차에는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와 이에 대한 김종철 선생님의 평론을 함께 읽었습니다. 조별 토론 관련 후기는 각 조 담당 선생님들께서 정리해 주실 거라 저는 채운 선생님 강의와 제가 배운 점 위주로 간단한 후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겪음(사건)에 대한 무능
채운 선생님께선 먼저 우리가 사건을 겪는다는 게 뭘까? 란 질문을 하셨죠. 우리는 지금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겪는 중이고 그 이전에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911 테러 등의 큰 사건들을 목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을 때마다 우리의 생각은 ‘더 잘하면 된다/기술 발전이 이러한 일을 막아줄 거야’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요. 채운 선생님께선 이런 관점이 바로 근대의 믿음이며 우리가 이 틀 밖을 벗어나 다른 지혜를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 근대의 무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태를 이런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한다는 것이 결국 '더 잘 아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과 동일시되어 버리겠죠. 전문가의 의견들은 물론 중요합니다만 문제는 우리가 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역량이나 힘을 발휘하는 법을 잃어 버리게 되죠.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우리가 점점 삶을 전문가에게 의지하게 될수록 우리는 점점 무력해집니다. 니체도 생명의 본질을 다소 과격한 말로 착취이자 전유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생명은 ‘자신이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 어떤 힘을 ‘자신이 소화하는 가운데’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명체로서 우리 자신을 능동화하는 과정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능동화 과정이란 사건의 겪음을 어떻게 내 것으로 소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죠.
*예술을 통해 어떤 사건(겪음)을 '다르게 겪을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예술의 효용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채운 선생님께서 오티 때도 말씀하셨지만 예술은 우리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는 거죠. 인간은 관성의 동물이라 사건을 겪는다고 무조건 기존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기존에 생각해 왔던 방식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넘기려 하죠. 결국 매번 사건을 만나고 그 계기가 깨달음의 기회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놓쳐 버리죠. 더구나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겪는 실질적 경험의 한계도 분명 존재하고요. 예술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사유하는가, 즉 ‘감수성’의 측면을 다루기에 예술을 향유함으로써 우리 각자의 좁디좁은 경험 세계들을 넘어 어떤 일을 느껴보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사건을 겪을 때 '이렇게도 경험할 수 있구나'라고 느끼도록 도와줍니다. 즉 예술은 우리에게 ‘다르게 겪기’를 배울 수 좋은 재료가 됩니다.
*예술을 바라보는 낡은 이분법 두 가지 – 개인적인 것인가 vs사회적인 것인가, 현실을 반영하는가 vs 아닌가
그런데, 예술로부터 우리가 이러한 점을 배우려면 먼저, 우리에게 뿌리 깊게 새겨진 예술에 대한 낡은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조별 토론에서도 관련된 문제들이 얘기되었었죠. 현 시대의 우리에게 김종철 선생님의 관점이 너무 큰, 일종의 ‘대의‘처럼 거대한 무언가로 느껴지고 그래서 다소 멀고 잘 와닿지 않는다라는 의견, 혹은 지금 시대는 이런 식의 말하기로 사람들이 잘 설득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좀 더 개인적인 것, 만약 똑같은 생태주의적 관점이더라도 좀 더 소소하고 좀 더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얘기하는 방식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등. 그런데 채운 선생님께서는 일단 그런 개인과 사회, 대의와 소의를 나누는 구분법 자체가 맞지 않는다고 얘기해 주셨습니다.
즉, 어디까지를 개인으로 볼 것이며 사회로 볼 것인가 그 경계를 결정지을만한 타당한 기준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루는데 그때 그것은 소설 주인공 개인의 문제인가, 광주의 문제인가, 우리나라의 문제인가?를 생각해 볼 때, 여기서 개인과 사회의 구분은 무의미하죠. 작가 이시무레가 다루고 있는 미나마타병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고해정토를 읽으면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오버랩되곤 했었는데 이와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건은 개인적 차원, 각 개인을 ‘통’해서 발생하게 마련이지만 실은 우리의 삶 그 어디에도 사회적 관습과, 맥락 등이 안 얽혀 있는 것이 없죠. 그런 까닭에, 예술에서 그 어떤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만으로 보이는 것도 이미 사회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 예술작품이 말하고 있는가, 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 말을 듣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낡은 이분법 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 현실을 반영하는가 아닌가이죠. 우리가 예술작품을 접할 때마다 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현실을 잘 반영하나? 그래서인지 늘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물에는 이 작품이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채운 선생샘께서는 예술이 현실을 반영하나?라고 우리가 물을 때 과연 그 현실은 무슨 현실이며 그것을 반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고해정토는 미나마타병을 앓은 사람들의 현실을 반영하는가? 이 소설은 이 병과 그것을 대처하는 과정에서의 부조리, 공권력의 문제에 대한 폭로 즉, 사회고발이 목적인가? 정말 우리는 그것을 읽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소설이 르포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르포 형식, 혹은 뉴스 같은 것이어야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한 것인가?
즉,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모두가 다 실은 다릅니다. 예를들어 똑같이 미나마타에서 산 사람이라 하더라도,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과 공장 사람들의 현실은 완전히 다르겠죠. 그러므로 ‘어떤’ 현실이 있을 뿐이지 반영하고 말고 할 단단한 하나의 굳건한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채운 선생님께서 《볼링 포 콜럼바인》이라는 영화와 《엘리펀트》라는 영화를 비교해 보라고 말씀하셨죠. 둘 다 학교의 총기난사 사건을 다룹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세계를 그립니다. 전자는 (다큐가 아니라) 분명 영화이지만 르포나 고발 다큐의 형식을 취하면서 총기 규제를 강력하게 촉구하는 어조를 취하죠. 반면 후자의 영화는 그 사건에 대해, 사고로 죽은 12명의 학생들의 마지막 행적을 그저 그릴 뿐입니다.
푸코 얘기도 해주셨는데요. 푸코가 <나, 피에르 리비에르>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살인자를 대변해서 쓴 글입니다. 푸코는 말하죠. 철학자는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이미 매번 들리는 목소리만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르포 형식의 사회 고발은 무언가 정당한 것, 진짜를 얘기하는 것 같지만 대단히 편협하고 편파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떤 앵글에서 어떤 방식으로 찍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영화든 다큐든 뉴스든, 앵글과 형식으로 프레임 된 어떤 특정한 현실을 볼 뿐입니다. 우리는 고해정토를 왜 읽을까요? 우리는 문학작품의 무엇을 읽는 걸까요? 내용을 읽는 걸까요? 그런데 내용은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겠죠. 고해정토는 미나마타병을 앓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데 사실 그런 내용을 위한 거라면 - 미나마타병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굳이 이 책이 아니어도 되죠. 더 잘 설명한 보고서나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술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 얘기를 많이 하죠. 그런데 이 둘은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술에서 형식은 곧 내용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가가 그 내용의 전부이죠. 앞서 총기 사건을 다룬 두 영화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 있죠. 다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가, 어떤 형식- 어떤 어조와 목소리를 취하는가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각각의 실질적 내용 - 메시지가 되겠죠.
*샤먼으로서의 예술가
고해정토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나마타 사건과 관련된 보고서나 기사 등이 있고 다른 하나는 병을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병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신의 사소한 삶에 대해 얘기하죠. 작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김종철 선생님께선 ‘샤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말을 잃은, 혹은 의식 속에선 뚜렷하게 뭔가 말을 하고 있지만 겉으로 나오지 않는 소리들,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빙의가 되어서, 그들이 했음직한 말을 전달하는 일종의 영매와 같은 것입니다. 김종철 선생님의 관점에서 근대 이후, 근대 너머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가는 바로 이러한 샤먼과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라고 제안합니다. 작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런 목소리들을 듣지 못합니다. 작가가 어떤 자리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 거죠. 예술가는 누구의 목소리에 빙의될 것인가.
*비평에 대해
마지막으로 비평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비평적 관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평’은 그 자체로 이미 관점을 전제한다고 얘기해 주셨죠. 비평가가 비평할 작품을 고르는 것부터가 이미 그의 관점입니다. 들뢰즈는 <비평과 진단>에서 비평을 (비판도 비난도 아닌) 진단이나 임상으로 말합니다. 즉 비평은 읽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지를 진단하고 스스로에게 임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비평은 비판의식이 있지만 비판과 비난은 분명히 구별돼야 하고 더더구나 작품에 대한 비판/비난도 아닙니다. 비평가는 우선 작가에게서 무언가를 배워야 하고, 작품이 말하고 있는 것을 통해 말하지 않은 것을 읽어내서 독자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또한 작가가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만들어 낸 어떤 것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대지로 회귀한다는 것
토론에서 많이 나왔던 문제,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이라는 것이 어떤 뜻일까에 대해 채운 선생님께선 그것이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전혀 아니고 어떤 절실함, 대지라고 하는 우리 삶의 생존적 생명 조건에 대해 문학이 말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문학’이란 그 자체로 근대의 산물이기에 이미 태생적으로 엘리트주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 경향이 심화되다 보니 한편으로는 근대 초기에는 주로 계몽적인 방향으로 흐르거나 혹은 그 이후 부터는 우리 삶과는 너무 요원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방향으로 전도되어 버렸죠. 김종철 선생님의 ‘대지’는 그가 루쉰의 잡문을 예로 든 것처럼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를 돌아보고 그것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과정과 결을 함께 하는 것이 또한 샤먼으로서의 예술가/작가가 되겠지요.
[다음 주 - 2주차 (3/12) 공지]
다음주 2주차에는, 김종철 선생님의 <대지의 상상력>에서 ‘블레이크의 급진적 상상력과 민중문화’(21~83p),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 전체 다 읽어오시면 됩니다.
공통과제는 읽은 부분 중에서 같이 얘기하고 싶은 내용 위주로 자유롭게 써오시면 되고요.+ 블레이크 시 중에서 각자 제일 좋은 것 한 편 골라 오시면 됩니다.
간식-후기-뒷정리는 병덕 선생님, 난희 선생님입니다~!
채운 선생님께서 강의 중에 말씀하신 영화들 관련 유튜브 링크 공유드립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보세요~
아이고~~~ 이렇게 알뜰살뜰한 공지는 처음 봅니다. 엎혀서 가는 느낌입니다. 수고 많으셨고요. 감사합니다~~
지안
2022-03-11 10:45
저는 난희샘께 업혀가겠습니다!! ㅎㅎㅎ 알뜰살뜰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니
2022-03-07 13:25
아! 감사합니다. 수업 중 여러 영화를 말씀하셨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데
친절히 링크까지 알려주셨네요^^
지안
2022-03-11 10:46
저도 태국 감독님은 아피찻퐁 까지만 받아쓰고 나머지는 검색으로 찾았네요 ㅎㅎ 되게 유명하신 분이시더라고요~~~
주영
2022-03-07 14:07
꼼꼼하고 생생한 후기 고마워요.
매번 일이 발생하거나 안 좋은 사건이 있으면, 더 잘할 수 있거나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해왔던 걸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잘 겪을 것인가, 다르게 겪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드는데, 이번 크크랩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네요.^^
지안
2022-03-11 10:49
저도요.. 그것말고 어떤 다른 시도가 있을 수 있지?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해왔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영화 등을 볼 때에도 한번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앞으로 이런 관점에서 공부하니 훨씬 흥미로울 거 같아요.
반디
2022-03-07 16:32
와. 감사합니다!! 쉽게 찾을 수 없었는데., 영화 링크까지 친절하고 보내주시고.. 매우 유용할 것 같습니다 ^^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내가 찾고 있는 나가 아닐까요. 스스로에게도 같은 목소리에 질려 있는 거 같아요.
지안
2022-03-11 10:53
저도 어쩔 때는 저 자신을 통째로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거 같아요. 다름 아니라 질려서 ㅎㅎㅎ 어느 순간 늘 동일한 반응, 동일한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죠.. 반디샘 말씀대로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 이- 새로운 의미의 (내가 몰랐던) 나 찾기? 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고~~~ 이렇게 알뜰살뜰한 공지는 처음 봅니다. 엎혀서 가는 느낌입니다. 수고 많으셨고요. 감사합니다~~
저는 난희샘께 업혀가겠습니다!! ㅎㅎㅎ 알뜰살뜰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수업 중 여러 영화를 말씀하셨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데
친절히 링크까지 알려주셨네요^^
저도 태국 감독님은 아피찻퐁 까지만 받아쓰고 나머지는 검색으로 찾았네요 ㅎㅎ 되게 유명하신 분이시더라고요~~~
꼼꼼하고 생생한 후기 고마워요.
매번 일이 발생하거나 안 좋은 사건이 있으면, 더 잘할 수 있거나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해왔던 걸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잘 겪을 것인가, 다르게 겪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드는데, 이번 크크랩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네요.^^
저도요.. 그것말고 어떤 다른 시도가 있을 수 있지?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해왔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영화 등을 볼 때에도 한번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앞으로 이런 관점에서 공부하니 훨씬 흥미로울 거 같아요.
와. 감사합니다!! 쉽게 찾을 수 없었는데., 영화 링크까지 친절하고 보내주시고.. 매우 유용할 것 같습니다 ^^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내가 찾고 있는 나가 아닐까요. 스스로에게도 같은 목소리에 질려 있는 거 같아요.
저도 어쩔 때는 저 자신을 통째로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거 같아요. 다름 아니라 질려서 ㅎㅎㅎ 어느 순간 늘 동일한 반응, 동일한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죠.. 반디샘 말씀대로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 이- 새로운 의미의 (내가 몰랐던) 나 찾기? 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