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서야 고해정토 읽기를 마쳤다. 지난 금요일까지 읽었어야 하는 책이건만 대지의 상상력에 실린 김종철의 이 책에 대한 평론만 겨우 읽고 과제를 제출하는 것에 급급했다. 과제를 올리고 토요일 새벽에 읽기 시작해서 규문에 도착할 무렵에는 100쪽 내외를 부랴부랴 읽은 상태였다.
김종철이 대지의 상상력에서 ‘샤먼으로서의 비근대 작가’라고 평한 그 샤먼이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책을 마저 다 읽으면 접근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강의 중에 읽지 않은 사람들은 다 읽어보라는 채운샘의 말에 여느 때보다 더 강하게 맘이 동했다. 오전에 조별 모임에서 나온 이야깃거리 중에 고해가 왜 정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충분히 풀리지 않던 참이라 책을 마저 읽을 이유가 여럿 있었다. 그리고 토요일 새벽부터 규문에 도착하기까지 짬짬이 100쪽이 채 되지 않은 분량을 읽으며 흘린 눈물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야기 뿐 아니라, 호소카와 하지메 박사의 보고서를 읽는 순간에도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당혹스러웠다. 이 눈물은 뭐란 말인가.
샤먼
책을 읽는 동안 산소호흡기를 대듯 숨을 고르기 위해 안도감이 수시로 필요했다. 나 자신은 미나미타병을 겪는 그들과 다른 곳에 있으며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 사건과 무관함을 확인해야했다. 거리감에서 위로를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럴수록 ‘샤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샤먼으로써의 삶과 거리가 멀뿐더러 그런 삶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내 모습에 샤먼으로써 산다는 것의 가치를 더 크게 느끼게 했다.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지니고, 교감하고,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찾아 말해주는 신체를 지닌 자, 샤먼.
이시무레는 근대라는 것 자체를 ‘원죄’라고 규정합니다.(김종철, 『대지의 상상력』,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미나마타의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346쪽)
채운샘은 근대의 ‘원죄’를 인간의 삶 자체를 파편화하고, 사물과 인간과 타자와의 교감을 파편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연결되어있다는 감각과 교감에 무능하고자 함, 나에겐 이런 바람이 있다. 그럴수록 내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며, 누리고 있는 것을 덜 잃게 되고, 덜 귀찮아진다. 그래서 안락하고 편해질 것이라는 마음이 있다. 타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이나 ‘만물이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샤먼적 감각’(347쪽)이 마치 내 안락함을 위협할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거리를 확인하면서 책을 읽었고, 그 먼 거리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순간이나 책읽기를 멈추고 일상의 시간을 보내는 중에 고해정토를 읽으며 갖게 된 불편함이 내내 함께 했다. 채운샘의 말을 다시 한번 빌리면 ‘목소리를 갖지 않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상인 또는 정상적인 삶의 밖으로 밀려난 자들. 나는 채운샘의 목소리를 갖지 않은 자들을 그렇게 이해했다. 나 자신이 정상적인 범주 밖에 있다고 여기는 삶의 모습들이 있다. 그것들은 당연히 내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지도 않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내 안에서 내 삶은 아니길 바랐던 것들, 내 삶에도 목소리를 잃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나 자신이 외면하고 묻어두려했던, 내가 겪지 않기를 바랐던 엄연한 삶의 모습들이 미나미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읽으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병든 신체, 폭주하거나 무력한 신체, 감각의 상실, 먹거나 배설처리 등을 의지하는 것 등. 피해자들의 삶은 내 삶에서 겪어서는 안 되는 두려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인간이란 무엇이었던가, 살아있다는 것,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들이 마구 솟구쳤던 것 같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인간과 삶, 생명이 새로웠다. 나는 그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엄연히 존재하고 벌어지는 삶과 생명의 모습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려 애썼다. 고통과 불행해보이는 삶의 모습들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았으니까. 인간, 삶, 생명이라는 것에서 나는 정상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이 행복이고, 진짜(?) 삶인 것처럼.
2.정상성
갑작스레 무지와 미안함이 솟아올랐다. 어떤 해는 간혹 자폐, 지적장애, 신체적 장애를 지닌 아이가 내 반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 아이들과 관계 맺는 방식, 그 아이들을 바라보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교실에는 늘 소수가 존재한다. 나는 그 아이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 바뀌어야 하는 존재일 뿐. 자주 가던 콩나물국밥집이 중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안 뒤로 혹 위생상태가 엉망은 아닌지,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곳보다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품으며 국밥을 맛있게 먹지 못할 만큼 편견이 있다. 이유 없이 타자를 폄하하고 자신이 속한 것을 우위에 두려 하는 주류적 정서에 길들여져 있다.
미나마타병 환자 111명과 미나마타시민 4만 5천 명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라는 말들이 들불처럼 번지더니 갈수록 대합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시민들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착상이었을 터이다. (苦海淨土 고해정토, 285쪽)
좋은 착상. 38대 1, 23대 1, 16대 1, 나에게도 이런 착상이 있다. 교실에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학급구성원이 될 때마다 나는 이런 좋은 착상을 품었다. 좋은 착상은 나를 편하게 지내게 해준다. 숫자로 환원되는 인간과 삶. 구성원 중 1이 된 아이의 삶은 나에 의해 평가절하됐다. 그 아이는 다수를 위해 희생되고 마땅히 침묵해야 하는 존재였다. 다수라는 범주, 정상이라는 테두리를 강하게 부여잡고, 나는 ‘1’이라 칭한 아이와 인간 혹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관계하지 않았다. 저 몸에 무슨 삶이 있을까, 인간다움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고 감히 고백한다. 이시무레는 내가 외면했던 신체들 속에 있는 인간, 삶, 생명을 펼쳐보여 주었다. 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폭주하는, 영혼이 없다고 말해지는 그곳에 인간이, 삶이, 생명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겐 ‘온전하게’ 삶을 살 수 없는 개체일 뿐인 그들에게 이토록 찬란한 삶이, 이렇게 고통스런 순간이 있었음을 알아갈 때마다 눈물이 나왔던 것 같다.
이치무레를 통해 내 삶의 경계 밖에 있던 것과 만날 수 있었다. 나에게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정상이란 구도, 다수와 사회를 위해 희생되고 묻혀도 되는 생명과 사건들이 있다. 결국은 정상성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나의 안위와 안락함을 위협받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마음 속에서 타인은 내 삶의 풍요을 위해 미나마타 피해자나 우리 반 아이들처럼 희생할 존재일 뿐이었다.
비정상의 신체라고 칭하고 그 신체 속에 그들의 삶마저 감금시켜버렸던 나의 시선이 주던 편리함을 어떻게 떨쳐낼 수 있을까. 우리 조별 모임의 이야깃거리였던 고해가 곧 정토라는 관계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극한상황을 극복하고 빛을 발하는 사람의 아름다움’(고해정토 ‘작가후기’, 304쪽)이라는 이시무레의 말에서 고해정토의 의미를 찾은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극한상황을 겪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극한상황을 피하고 싶은 이에게 정토가 찾아올리 없다. 피해자들을 찾아 병원의 복도를 발소리를 낮춰가며 걷던 이시무레의 발걸음을 생각할 때마다 미안함이 생길 뿐 나는 아직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발짝도 뗄 수 없다. 그런 내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을 울리는 후기 감사해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삶의 목소리를 듣고 전해주는 샤먼과 같은 마음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내 일상으로 들어오면 '나만 아니면 돼'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네요. 이런 마음이기에 나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하고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경희샘 후기 덕에 왜 우리가 샤먼에서 멀어졌는지,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난희
2022-03-09 12:01
경희샘~~~ 무겁고도 진지한 성찰이 담긴 후기 고맙게 읽었습니다. 저도 과제를 하면서 고해와 정토의 사이를 어떻게 건너는가의 문제에 오래오래 멈춰있었지요. 고해 즉 정토, 이 말은 니체의 삶의 긍정만큼 무서운 말이라서 토론 때도 꺼내놓을 수가 없더군요. 나는 왜 앓고 있지 않는가, 나의 이 건강성에의 자부 밑에 깔린 어둠은 무엇인가. 내가 회복하거나 회귀해야 할 고해는 어디인가. 온갖 감정이 뒤섞인 읽기를 힘겹게 했더랬습니다. 신들의 마을로 다시 들어서서 고통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싶습니다.
경희샘, 울지 마요
2022-03-10 00:34
토닥토닥ㅠ... 이번에 '고해정토'를 함께 읽은 경험은 모두에게 특별했던 것 같아요. 이 책을 어떻게 '겪었는지' 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말로는 어찌 표현되지 않는데, 샘을 꼭~~ 안고, 먹먹한 마음이지만 한바탕 웃고 싶습니다...
지안
2022-03-11 11:01
후기에 경희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네요... 저도 고해정토를 읽으면서 울컥함과 죄책감과 저 자신의 비겁함과 여러가지 감정이 아주 복합적으로 올라왔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이시무레가 정말 대단히 강한 사람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러면서 저는 그녀와 같은 '샤먼'이라는 존재가,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그 자체로 대면할 수 있는 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울림이 깊은 소설에 울림이 깊은 후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을 울리는 후기 감사해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삶의 목소리를 듣고 전해주는 샤먼과 같은 마음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내 일상으로 들어오면 '나만 아니면 돼'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네요. 이런 마음이기에 나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하고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경희샘 후기 덕에 왜 우리가 샤먼에서 멀어졌는지,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경희샘~~~ 무겁고도 진지한 성찰이 담긴 후기 고맙게 읽었습니다. 저도 과제를 하면서 고해와 정토의 사이를 어떻게 건너는가의 문제에 오래오래 멈춰있었지요. 고해 즉 정토, 이 말은 니체의 삶의 긍정만큼 무서운 말이라서 토론 때도 꺼내놓을 수가 없더군요. 나는 왜 앓고 있지 않는가, 나의 이 건강성에의 자부 밑에 깔린 어둠은 무엇인가. 내가 회복하거나 회귀해야 할 고해는 어디인가. 온갖 감정이 뒤섞인 읽기를 힘겹게 했더랬습니다. 신들의 마을로 다시 들어서서 고통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싶습니다.
토닥토닥ㅠ... 이번에 '고해정토'를 함께 읽은 경험은 모두에게 특별했던 것 같아요. 이 책을 어떻게 '겪었는지' 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말로는 어찌 표현되지 않는데, 샘을 꼭~~ 안고, 먹먹한 마음이지만 한바탕 웃고 싶습니다...
후기에 경희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네요... 저도 고해정토를 읽으면서 울컥함과 죄책감과 저 자신의 비겁함과 여러가지 감정이 아주 복합적으로 올라왔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이시무레가 정말 대단히 강한 사람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러면서 저는 그녀와 같은 '샤먼'이라는 존재가,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그 자체로 대면할 수 있는 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울림이 깊은 소설에 울림이 깊은 후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