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교시 채운샘 강의 정리>
랑시에르의 <프롤레타이라의 밤>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몇몇 구절은 반복해서 읽어도 그래서 이렇다는 것인가 저렇다는 것인가? 쉽사리 결론지을 수 없었기에 더욱 어렵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채운 샘께선, 랑시에르의 문제의식 및 그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1830년대 프랑스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전체 맥락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노동자라는 계급의 출현
랑시에르는 알튀세르 제자였는데 그의 막시즘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자기의 길을 걷게 됩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노동자의 꿈 아카이브라는 부제? 가 붙여진 것처럼, 랑시에르가 프랑스 문서 보관소에 있던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를 많은 시간을 들여 정리하고 공부하여 쓴 박사 논문입니다. 특히 그때 발견한 목수 고니는 랑시에르의 철학적 개념을 대변하는 페르소나 같은 존재가 됩니다. 랑시에르의 이러한 연구 방법 자체가 그가 연구한 자들의 노동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가령, 왕빙 감독의 한 영화는 하루에 15시간 노동하는 청년들을 그 15시간 동안 찍고 15시간을 들여 상영토록 합니다. 관객은 15시간 동안 영화를 보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 15시간을 노동하는 자, 그것을 찍는 자, 그것을 보는 자 뭐가 같고 다를까요?
책에서 계속 등장하는 ‘노동자’ 란 무엇을 뜻할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산 계급', '유산 계급'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땅, 기계, 공장(자본)과 같은 생산 수단을 소유했는가 여부에 따라 나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이 생산수단에서 비롯된다는 신화를 구축하며 작동합니다. 사실 생산은 사람의 노동이 없으면 안 되는데 이를 쏙 빼고 생산수단이 없으면 노동자가 어떻게 일을 해?라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킨 거죠. 무산계급은 사실, 못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이 없는 자들, 그래서 그것을 가진 자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생산수단(자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무력하게 느끼게 만들어야 유지가 가능한 체계입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신화가 당연한 것으로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모든 활동은 무가치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고 내가 벌어 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있다는 공포심을 사람들 스스로 내면화하게 하여 알아서 일터에 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안과 공포심을 기반으로 사람들은 마지못해 일터로 내몰리고 이때 받은 착취와 억울함과 피로는 휴식을 필요로 하고 나아가 쟁취해야 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휴식-주말, 여가, 휴가 등은 일한 자가 그 보상으로 얻는 것이 되지만 이는 종속을 전제로 한 것이죠.
초기 자본주의는 너희들이 공장 덕에 산다는 신화를 주입하며 자리를 잡습니다. 당시 농부들은 왜 자신이 정해진 시간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농사도 고된 일이긴 하지만 오랜 시간 자연의 리듬과 호흡하던 신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공장에서 하는 일의 방식과는 달랐습니다. 사람들의 고혈이 만들어 낸 생산력 증가를 생산수단을 신화화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주입하며 이제 사람들은 예전에는 자신들이 만들어 쓰던 것을 벌어서 돈을 주고 사야 하고. 그 돈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회로 속에 갇히게 됩니다. 자본주의는 가치를 화폐로 임금을 받게 되면서, 과거에 자신이 만든 물건에 대한 자부심 등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오롯이 돈을 쓰는 것으로서, 그 하루의 플렉스를 위해 6일을 ‘개’같이 일해야만 삶의 헛헛함을 달랠 수 있는 (니체에 따르면) 천박한 방식으로 전락했습니다. 노동 현장도 너무 열악한 가운데 이러한 비참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죠.
-생시몽주의와 목수 고니들
랑시에르가 이 책에서 주목한 프랑스의 1830년에서 48년 사이는 혁명과 반동의 반복을 겪는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책에서 많이 나오는 생시몽주의는 막시즘 이후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대비하여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립니다만, 채운 샘께서는 이때의 ‘사회주의’라는 말이 보통의 사회주의 용법과는 약간 다르게 ‘범 인류적’이라는 뉘앙스를 띠고 ‘공상적’이라는 말 역시 당시 착취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일종의 유토피아주의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생시몽주의는 위와 같은 부조리를 인식한 귀족들이 비참함을 겪는 사람들을 향한 인류애가 발동하며 그러한 비참함을 어떻게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기 능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식인들에게 감화를 받고 동조한 노동자들이 있었는데요. 랑시에르가 본 목수 고니‘들’이 이들이죠. 이들을 통해 우리는, 뭔가 다르게 해볼 수 있다는 꿈과 자신의 존재를 바꿔보려는 노력이 아직 낙관적 분위기 속에 있었던, 아직 꿈을 꾸던 시대, 그 꿈을 비관적으로 포기하지 않던 시대를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등장한 막스는 이러한 생시몽주의 방식의 지식인의 한계를 지적하였는데요. 막스는 그것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보았기에 계급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위해 노동자들의 명확한 계급의식이 필요함을 주장했습니다. '계급의식'이란, 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이러이러한 조건 속에 있고 그것은 여러 사회와 역사의 관계 속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죠. 막스는 그러한 계급적 각성을 중심으로 떨쳐 일어나 노동자가 혁명적 주체가 되어야 혁명이 가능함을 설파했습니다.
-랑시에르의 논점: 분할선을 의심하라. (정치 VS 치안)
이러한 맥락에서 랑시에르가 비판하고 있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보수적인 판본이 있는데요. 이는 대표적으로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서민정치?를 한답시고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등의 연출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딘가에 ’가난한 자들‘ ’서민‘ 이 있을 것이고 그들 자신이 가지 않는 곳에 서민이 있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미지의 타자에 대해서 자신이 경험하지 않는 대립적인 것을 덧씌워 타자를 자신과 정반대의 이미지로 관념화하는 것이죠. 다음으로, 혁명적 판본(마르크시스트의 판본)이 있는데요. 노동자의 존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실체화하고, 선은 노동자계급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자를 완벽한 타자로 보든 혁명적 주체로 보든 단일한 정체성이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어떠한 것들 사이에 작동하는 분할선을 문제 삼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것이 바로 ‘정치’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치는 랑시에르의 용어로 ’치안‘에 가깝습니다. 가령, 장애인을 ’위해‘ 운동한다는 것의 한계는 이미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기존의 분할선을 전제하고, 그렇게 출발한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그 분할선을 더욱 강화시키며 아무리 외쳐도 ’치안‘에 머물게 됩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경계를 흐리는 것을 하는 것만이 정치입니다.
랑시에르에게 분할선을 의심하는 정치의 문제는 곧 사유의 문제이자 미학의 문제가 되는데요.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이후 펴낸 <감성의 분할> 연구의 토대가 됩니다. <감성의 분할>은 어떻게 존재에 대한 분할선으로부터 사유의 위계가 생기는지, 사유와 능력과 감성의 위계를 허무는 것을 다룹니다. 이후 87년 저작인 <무지한 스승>은 가르침이, 많이 아는 사람에서 적게 아는 사람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모델 - 계몽적 모델을 비판하며 지적인 것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논지를 펼칩니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는 어떻게 사유할 수 없는 자들이 사유할 수 있는가. 사회에서 몫을 갖지 못하고 배제된 자들이 사유할 수 있는가를 다룹니다.
결국 목수 고니들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는 것으로 나오지만 결과의 성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그것을 고수하며 그것에 의해 무엇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계속 분열을 겪고 자신의 실존을 구축하려고 하는 자들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무엇을 시도하려고 했는가, 어떻게 목수 고니들은 ‘너는 이런 존재야’라고 외부에서 주입된 정체성에 저항하며 끊임없는 고통과 분열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 머무르지 않으려 그 분할선을 넘는 시도를 하였는가?를 우리는 앞으로 배울 것입니다.
[2주차(2/24) 공지]
1)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3장까지 읽으시고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금요일(23) 저녁 8시까지 올려 주세요. + 각 조별로 정해진 발제자는 발제문 올려주세요.
2) 단톡에 올려드린 3편의 시 - ‘노동의 새벽’ ‘서시’(새폴더.pdf 파일입니다), ‘꽃피는 아버지’ 를 읽으시고 랑시에르의 분할선과 관련하여 각각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메모해 오세요.
3) 사진팀은 <사진의 이해>를 2부까지 읽어오세요. 영화팀은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이론 <몽타주>를 다 읽어 오시면 됩니다.
4) 채운샘께서 나눠드린 프린트물 읽어오세요.
5) 다음주 간식-후기-정리는 연희샘, 해민샘께 부탁드려요~🙏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인 분할선에 대한 의심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노동자나 장애인을 시혜를 베풀어야 할 완벽한 타자로 보거나 혁명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 모두 어떤 정체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같기에 우린 이 전제에 대해 질문해야한다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프롤레타리아에게 필요한 건 착취에 대한 인식과 부르주아 자리의 맞바꿈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향한 정념과 욕망이다."이라는 문구가 와닿았습니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운동이 대개 기존의 분할선을 문제삼기 보다는 자리의 이동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쉽지는 않겠지만 랑시에르의 글을 따라가며 우리에게 어떤 분할선이 가로지르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요. 😉 힘들고 바쁜 상황에서 수업내용을 정성스럽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 공지 감사합니다.👍💚
짝짝짝!!!! 지안샘 ~ 신속하고도 정확한 보도에 찬사를 보냅니다.
저도 왕빙의 15시간이 의문으로 남았는데요. 어째서 15시간이 어떤사람에게는 참고 견디는 시간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탐구의 시간이며 어떤사람에게는 향유의 시간이 될까? 하나는 시간을 죽인 댓가로 돈을 받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살리는 댓가로 돈을 내죠. 사고 판다고 할 때 여기서 정확히 무엇을 사고 판다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는 시간을 죽이는 댓가로 받는 임금노동을 당연시 하게 된 걸까ᆢ생시몽주의자 ㅡ목수 고니의 피가 제게도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랑시에르의 문장에 마치 기억상실증이 부분 회복되는 것 같은 전류를 느꼈죠.
강의를 글로 듣는 것 같습니다. 감사히 읽고 복기합니다~
지옥의 문과 천국의 문을 넘나들며 새로운 바빌론을 찾아나서는 프롤레타리아들의 밤의 여정. 손가락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고 유튜브 숏폼과 함께 꿀맛같은 잠을 쳐자는 나는 프롤레타리아인가 2024 쁘띠 프롤레타리아인가?... ㅋㅋㅋ 쉽지 않은 텍스트지만 우거진 수풀을 헤쳐가듯이 힘겹게 찾아가 보는 맛도 쏠쏠하네요.. 겨우 1주차 지났는데 다시 생활리듬이 타이트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각자의 밤의 역사를 기록하는 마음으로,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며 분할선을 넘는 마음으로 ㅋㅋ랩 힘차게 이어나가 보아요!! 지안쌤의 정리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