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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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매혹적인 책입니다. 그는 우리의 견고한 분할선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A 또는 B라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지요. 그의 언어는 시적이라 전체 글이 마치 산문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이 글이 무려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프롤레타리아의 밤>의 부제는 ’노동자의 꿈 아카이브‘입니다. 랑시에르는 10여년 동안 19세기 노동자들의 편지와 저널 등에 관한 아카이브를 파고들며 노동계급 해방의 다양한 형상을 조사해왔고, 이것의 성과가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밤>입니다. 우리가 역사, 소설 등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은 이데올로그, 지식인, 문필가의 시각으로 본 것인데, 랑시에르는 그 시대에 목소리를 드러내기 어려웠던 자인 노동자들이 어떻게 사유하고 얘기하는지 직접 자료를 보면서 기존 역사관에 균열을 냈습니다. 그의 역사는 반 역사(anti-history)가 아닌 대항 역사(counter-history)로 그는 자료를 통해 19세기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접속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지요. 낮엔 목수 일을 하면서 밤엔 사유하며 시를 쓰는 고니는 우리가 갖는 노동자에 대한 분할선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저번 주 수업에서도 채운샘이 강조하셨듯이 우리에게는 ‘노동자’, ‘장애인’ 등 타자에 대한 견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요. 대개 이런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인물과 사건을 판단하고요. 노동운동의 기원에는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가 있을 거라는 전제도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다움, 학생다움 같은 정체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노동자, 학생이란 건 없습니다. 시공간적 조건이 노동자다움을 형성하는 건데 우리는 그걸 마치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받아들이죠. 니체가 얘기하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것입니다. 오래된 과거나 문화가 다른 지역에 관한 걸 읽거나 볼 때도 우리의 견고한 관념은 작동하는데요. 예컨대 근대 이전의 인간을 바라볼 때도 우리는 먹고사니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을 떠올리며 판단하게 됩니다. 노동자에 대한 상도 비참하게 일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공부 및 사유하고는 거리가 먼 존재라고 간주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노동자를 보편적인 개념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고니는 노동자로 분류해야 할까요? 아니면 시인으로 봐야 할까요? 오롯이 이 사람을 A라고 규정할 수 없고, 무수한 노동자들은 단일하게 환원되지 않습니다. 모든 계급은 오염되어 있고, 혼재되었습니다. 고니는 다양한 감각과 감정을 느끼고 여러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고유한 개체로 존재합니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는 해방, 기존의 위계에서 뒤집거나 자리를 바꾸는 방식으로의 혁명은 해방을 가져오기 어려운데요. 랑시에르는 기존의 분할선에 대해 질문을 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가는 걸 해방으로 봅니다. 노동자에서 부르주아로 가는 것처럼 A에서 B로 가는 게 아니라 경계를 흐리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새로운 삶의 양식, 활동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지점이고, 잘못 생각하면 매우 거창하게 느껴지는데, 이건 어떤 신적인 요소, 정답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있는 시공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소유를 멀리하고 노자처럼 살아야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또 다른 유토피아를 지향하거나 맹목적인 관념을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요. 일단 가깝게 나는 공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에서 출발해봐도 될 거 같습니다.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을 때 노동자가 시를 썼다고 말하거나 고니를 주경야독 한 자, 노동자면서 시인으로 규정하는 걸로 오해하면 안 되는데요. 이것 또한 노동자와 시인, 일과 공부에 대한 견고한 분할선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공부라는 환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시간이 많아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공부나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여기네요. 이런 전제하에서는 오히려 철학과 예술은 삶과 유리되어 버립니다. 실제 철학과 예술이 융성했던 시기를 돌아보면, 큰 전쟁, 위기 등이 발생했을 때 오히려 이런 활동이 활발했네요. 그런 측면에서 철학할 시간이 없는 자야말로 철학을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가 부족하고 장애물이 많은 우리는 참으로 공부하기에 좋은 조건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각자 자리에서 올라오는 고통과 번민이라는 우물에서 한 바가지의 사유를 끌어올려 봅시다!!
타인과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가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로 구성된 유토피아 같은 공동체를 꿈꾸기도 하는데요. 이런 세계가 실제 작동한다면 어떨까요? 너무 균질적이어서 지루하고 권태로울 것 같고, 조금이라도 다른 걸 받아들이지 못해 파시즘적인 체제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행히도 이런 곳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각종 불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정치에서 조화, 균형을 얘기하는 자들과 달리 랑시에르는 불화를 중시하는데요. 우리 존재 자체가 모순적이지요. 고니는 목수의 감각과 시인의 감각이라는 굉장히 거리가 있고 일치할 수 없는 감각을 다 갖고 있습니다. 이런 불일치를 통해 우린 고통을 받기도 하고 질문을 하게 되는데요. ‘나’라는 주체는 견고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분열적입니다. 그렇기에 우린 모순을 느끼면서 의문을 품고 새로운 길로 나갈 수 있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카프카는 엄한 아버지, 가족, 보험회사라는 시공간 속에서 살아갔고, 여기에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이 삶의 조건에서 사회적인 억압과 명령이 작동하지 않는 틈을 만들어냈지요. 그 자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글을 써냈습니다. 그는 관료제,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거나, 이들로부터의 탈출을 그리지 않았는데요. 다만 그 안에서 자유의 틈을 만들거나 슬며시 미끄러집니다. 카프카에게는 적도 없고 그를 구원할 자도 없지요. 우리도 자신의 자리에서 무엇이 해방인지 질문을 하고, 이런 화두를 기반으로 랑시에르의 글과 접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 자신조차도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존재인데 하물며 이런 자들이 모인 사회는 어떻겠습니까? 억압이 없고 모든 게 조화로운 세계는 매우 관념적일 뿐 실제 사회는 불화로 가득합니다. 이런 사회를 통일하고 동일화하는 게 오히려 폭력적이란 생각이 드네요.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모두가 달라서 매번 싸우고, 매번 생각하면서 합의에 이르지 않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과 다르네요. 다른 개인들끼리 다수결이든 회의든 설득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방식이 민주주의라고 여겼는데 말이죠. 이런 불화로 우린 문제를 겪으면서 사유하고 매번 다른 나로 태어납니다.
따라서 시초의 관계를 뒤집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실존과 투쟁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자의 비밀이다. “상품의 비밀”이 아니고.
1주차에 많은 분들이 인용했던 부분입니다. 실존과 투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맑스가 밝혔던 상품의 비밀이 아니라 타자의 비밀이라고 랑시에르는 얘기합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상품이 어떻게 나왔고 이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했는데요. 이런 상품의 비밀은 사회주의 혁명을 추동하는 데 원동력으로 작용했고요. 그런데 이 상품의 비밀은 계급적 의식으로 뭉친 단일한 프롤레타리아의 제도적 혁명에는 유용했을지 모르겠지만,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실존과 투쟁에 대해서는 무력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견고한 정체성에 기반한 혁명은 이 분할선에 대해 묻지 않지요. 조별 토론할 때도 이 타인의 비밀이 무엇이냐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요. 타자에 관한 관심이나 나를 둘러싼 시공간적인 조건 등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있었지요. 채운샘은 비밀을 확 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우연히 엿본 타자의 삶과 즐거움 등이 비밀이 될 수 있고요. 예상하지 못한 비밀을 살짝 엿봤을 때 우리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 제10장 되기에서 흡혈귀를 가져오는데요. 되기는 흡혈귀에 물리는 것과 같은 감염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했었습니다. 이와 함께 흡혈귀가 사는 공간을 떠올려보면, 밤에 안개가 가득한 성 등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 연상됩니다. 안개 같은 것이 우리를 서서히 침투하는 것처럼 비밀도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지요. 채운샘은 규문에서 공부하는 우리가 각자의 생활공간에서 타인의 비밀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무용하고 어디에 쓸지 모르는 어려운 철학책을 읽으며 아무도 안 읽을 듯한 글을 쓰는 우리가 타인에게는 규정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비밀로 작동합니다. 한편 이 비밀은 우산에 낸 칼집을 통해 보게 된 카오스로 설명할 수도 있는데요. 우리는 각자의 우산을 쓰고 사는데, 우산에 그려진 것이 하늘이며 이것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우산에 그려진 그림이 질서, 즉 코스모스라면 예술가가 칼집을 내어 보이는 것이 카오스라고 간주할 수 있고요. 우린 예술을 통해 세계의 비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 등도 우리의 견고한 하늘에 선을 그어 그 틈으로 비밀을 보여줍니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우리가 그 비밀에 얼마나 매혹될 수 있는가인데요. 틈으로 보이는 낯선 걸 바로 기존의 그림으로 덧칠하거나 메운다면 비밀은 사라지겠지요.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틈, 비밀에 매혹되어 젖어 들면 우리의 우산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도 우리에게 프롤레타리아, 분할선 등과 관련하여 많은 비밀을 알려주는 만큼 우리도 깊이 매혹되어 보아요.^^
# 1학기 3주차 수업에 대해 공지합니다.
1)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4장 순찰로(141p)까지 읽어옵니다. 발제는 1조 신우샘, 2조 제현샘, 3조 인영샘께 부탁드려요. 공통과제는 금요일 오후 8시까지 올립니다.
2) 사진팀은 <사진의 이해>를 끝까지 읽어오고, 영화비평팀은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이론<시점>을 다 읽어옵니다.
3) 2주차 후기는 연희샘, 해민샘, 3주차 간식-후기-정리는 휵샘, 신우샘께 부탁드려요.
즐거운 한 주 보내시고 다음주에 건강한 모습으로 뵐께요.
지난 일요일에 어떤 영화대본을 보다가 남자주인공이 나는 나로밖에 살 수 없는 이 갇힌 세계가 너무 신물이 난다, 하지만 너(타자)로 인해 다른 세상을 엿볼 수 있어 좋다는 식의 대화를 읽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오직 노동이라는 세계에 갇혀 다른 것을 갖지 못한 존재였을 까?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실존과 투쟁을 정의하기 위해 '타자의 비밀'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데요.. 은밀하게 안개처럼 서로에게 침투되어 오는 '타자의 비밀'로 노동하는 이에게 노동이 아닌 삶과 노동의 삶의 혼종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산에 찢긴 저 칼자국을 외면하고 비정상성(chaos)으로 여기며 매혹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글을 쓸 수 있을까 질문이 생깁니다. 다들 한 주 <프롤레타리아의 밤>으로 인해 찢긴 칼자국에 매혹되어 또 한줄 써보자구요~~ 규문의 요약,정리의 여왕이신 주영쌤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공부라는 환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동에 대한 보상을 공부로 여기는 동지들이 있어 즐거운 나날입니다. 나의 일상-정체성이, 일-공부-놀이로 분할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것임을, 그러한 자각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해보는 한 학기가 될 것 같습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ㅎ
조금 떨어져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상하단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는 잡히지 않는 많은 것들을 어떻게든 명명하고 싶어하고 그 과정에서 누락된 많은 것들을 부정하게 되는 전도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토요일마다 하는 활동이 큰 비밀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채운샘 말씀에 빵 터졌는데요. ^^ 들뢰즈 말처럼 비밀은 비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비밀이라는 말이 동시에 떠오르네요 ㅎㅎ 정성스럽게 잘 정리해 주신 내용 감사히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