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프롤레타리아의 밤』 2장과 3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글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아 어려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리 저리 엮어가며 읽게 되고, 읽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둥둥 떠다니던 물음표가 듣고, 말하고, 다시 읽는 과정에서 느낌표가 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쓰려고 보니 또 그 느낌표가 흐릿해져 있네요.ㅎㅎ 흐릿한 대로 나름의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이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랑시에르는 노동자라는 하나의 계급으로 뭉뚱그려져 추상화되었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노동자로 분류되던 집단 내의 통일되지 않는 목소리와 시선들을 보여주며 노동자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균열을 냅니다. 저희 조는 먼저 보석 세공사와 석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보석 세공사와 석공은 노동자로 분류되지만 작업 환경 때문에 전혀 다른 감수성을 지니게 됩니다. 보석 세공사는 화려한 장신구들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의 문화에 조금 더 가깝게 있기 때문에 석공을 하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자신들도 노동을 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위치는 부르주아에 더 가까운 것이지요. 사회적 경제적 위치는 프롤레타리아에 더 가깝지만 부르주아와 동일시하는 보석 세공사의 모습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제 모습과 겹쳐보였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벌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노동자들도 떠올랐습니다. 감수성의 영역에서의 분할선은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감수성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점에서 미학과 정치가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분류가 애매한 또 다른 이유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조건이 계속 바뀌면서 끊임없이 일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바뀌고 있기 때문 아닐까하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연대
분할선 자체가 의문시 될 때, 노동자로 묶이는 상황에서 겪게 되는 통일성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어요. 건설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때, 그 상황 안에서는 분할선이 선명하게 그어질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요. 지안샘께서 지난 시간 강의를 언급하시면서 그런 시선 자체가 이미 분할선을 내 안에서 작동시키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연대는 그들의 문제에 내가 참여한다는, 생시몽주의자들이 했던 방식의 시혜적인 연대일 뿐이라고 짚어주셨어요. 그리고 아래의 부분을 함께 읽었는데, 의문이 조금 해결되었어요.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여기게 만드는 원자화를 극복하면서도, 카스트들의 힘과 강제가 군림해 직인단의 자유의 이상을 상실하도록 전락시키는 구속적 성격을 이 단결에 부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잃어버린 사회적 위상을 다시 획득하는 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연대에 의해 진행된다. 장인에게 자신의 법을 부과하는 집단적 힘의 재발견만이 아니라, 획득되고 인정되어야만 하는 보편성. 이 보편성은 노동자들의 자리를 이성과 문명의 왕국 안에 내주는 적합한 관계들을 수립해야만 한다.”(72)
그러니까 랑시에르가 말하는 분할선 흐리기는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고 개인들만 있을 뿐이라는 원자화도 아니면서, 마르크스의 단결, 투쟁과도 다른 무언가라는 것이죠. 제가 걸려넘어졌던 건 분할선을 흐리는 것이 계급 자체가 없다는 것인가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의 방식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라는 개념은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채운샘께서 강의에서 어떤 자료를 볼 때 자료 속 사람의 목소리와 그것을 읽는 나의 목소리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위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과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시위자의 목소리는 있을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옥의 문, 천국의 문, 새 바빌론
각 장의 제목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는데요. 엘리샘께서 바빌론에 관해 설명해주셔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신바빌로아의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이주한 사건과 연결지어 볼 때, ‘새 바빌론’이라는 제목은 벗어남과 동시에 다시 예속됨을 말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지옥의 문- 천국의 문- 새 바빌론으로 이어지는 제목의 흐름이 근대의 노동자들이 고향을 떠나 어떤 종류의 이상향을 가지고 도시의 노동자가 되었지만 도시가 또 다른 예속의 장이 되는 구조와 연결된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해악이 훨씬 근원적이었다면? 목수 고니의 ”뒤집힌 세계“를 정의하는 것이 노동 세계로의 진입 그 자체였다면? 자신의 실존을 일거에 영구적으로 소외시켰던 자[하인]보다 노동자를 위로 끌어올려주는 그날 그날의 노동력 판매라는 요행이 가차없는 고통의 원천이고, 이 고통은 노동의 조건 또는 임금이 아니라 노동의 필요 자체에 관련된 것이라면?”(83)
산업화 이전의 노동조건은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예속이었다면, 이후에는 계약도 자신이 직접 하기 때문에 더 자유에 가깝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게 더한 예속이라는 의미 아닐까하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각자의 구체적인 경험들과 연결지으며 읽으니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혼자 읽을 때에는 그냥 넘어갔던 구절들을 다시 짚어보니 풀리는 지점들도 있었고요. 이리 저리 엮어가며 함께 읽을 시간들이 기대가 됩니다~ 토요일에 뵈어요!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정체성과 규정에 얽매였는지를 확인하게 되는데요. 이번 장에 나온 보석세공사, 석공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노동자도 다양한 시공간속에서 질적으로 다르게 존재하기에 보편적인 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고, 노동자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며 재단할 수도 없죠. 랑시에르의 글이 어려운 건 기존의 선입견, 이미지를 미끄러나가면서 이것, 저것에 속하지 않는 무엇을 얘기하며 우리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런 만큼 할 얘기도 많고 토론도 풍성해지는 장점이 있네요😊 2조에서 나눈 풍성한 얘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마치 제가 그 토론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차고 깔끔한 후기 감사해요.👍
해민쌤의 후기를 보니 생각해 볼 지점이 참 많았구나 싶은데요.. 노동자의 단일한 정체성의 이미지가 이루어졌던 당시 시대적 흐름도 놓치고 가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런 맥락으로 자리잡게 돠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양비론만 남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부르주아의 이미지 역시 그대로 두고 프롤레타리아만 따로 떼어서 생각에 매몰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다른 조의 토론 내용도 궁금했는데 잘 정리해 해민쌤의 '견해' 까지 엿볼 수 있어 재밌게 읽었습니다! 내일 만나용!! 추운데 다들 따땃하게 입고 오셔요~~~
오 해민샘! 조 토론 내용을 이렇게 잘 정리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냥 쓱 하고 지나간 부분도 누군가 질문을 하면 비로소 다시 한번 꼼꼼하게 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더 공부가 되기도 하는 거 같아요. 저는 해민샘이 우리 시대의 구체적 실질적 사회 문제들을 질문해 주셔서 좋았고요. 한편으로는 나는 왜 그런 질문이 안 생기는지. 내겐 그 모든 것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무관심이 자리하고 있는게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네요 🥲 너무나 재밌지만 필연적으로 카오스일 수 밖에 없는 ㅎㅎ 조별 토론을 이렇게 정성껏 써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