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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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2주차 후기
2주차 오전 팀별토론에서는 아직 전체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터라 궁금증을 가득안고 시작되었습니다. 첫 토론은 "일하지 않은자 먹지도 말라" 는 문구를 가지고 시작되었는데요, 이 문구는 사회주의에서는 레닌이 자본가를 겨냥해서 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이 일하는 사람을 향해 말합니다. 노동이라는 말에 묻어있는 뉘양스도 예전에는 노동자의 언어였는데 지금은 기업의 언어가 된것처럼 '노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쨋든 생산과 노동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같아 보입니다. 노동을 하지않으면 돈을 벌수 없고, 화폐를 획득하지 않으면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절대적인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지 않는 것에 대한, 돈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갖고 있습니다.
노동과 활동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노동'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리고 노동과 활동은 다른 걸까요? 저는 '노동'이라고 하면 농부나 광부, 어부, 생산직 근로자등 주로 몸을 쓰는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거기에는 저도 모르게 몸을 쓰는 일과 두뇌를 쓰는 일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을 쓰는 건 '육체노동', 두뇌를 쓰는 일은 '정신활동'이라는 식이었는데 임금을 받는다는 면에서 보면 노동자인 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몸이야 정신이냐의 문제보다 노동과 활동을 구분짓는 분할선의 작동입니다. 관리자나 노동자, 의사, 학생, 주부 등 자신이하고 있는 일을 노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활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노동과 활동을 분할하는 것일까요?
'노동'은 교환경제가 탄생한 산업 혁명과 근대 자본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았습니다. 교환이 가능하려면 화폐의 양화가 가능해야 교환이 성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교환에서는 질적인 면이 소거된다는 점입니다. 노동의 질을 나누는 것도 결국 화폐로 환원되는 양적 기준으로 나누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노동'은 곧 생산이고 생산이란 곧 재화와 동일시하고,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 이 점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나이든 사람은 생산을 하지 못하지만 지혜나 경험으로 누구를 도울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지금은 가치가 없어진 것이죠. 생산이나 일에서 버는 것이 지혜와 관련없는 것이 되는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취업을 못하는 경우, 장애나 나이가 많아서 못하는 경우처럼 말이죠.
중요한 것은 일을 하고 안하고나, 어떤 일을 하느냐의 문제보다 노동의 가치와 자기활동의 의미를 어디다 두느냐에 있는게 아닌가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일하지 않은자 먹지도 말라"는 구호가 불로소득을 취하는자를 향한 사회주의의 목소리든, 놀고 먹는 사람들, 무전취식을 말하는 자본주의의 목소리든 노동의 의미를 단지 돈의 댓가가 아닌 다른 의미를 찾아보는게 지금 우리가 이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싶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벗어나서 생각해야되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의존하는 자에게 의존하지 않기
가장 쉽게 대체될 수 있는 노동자에게 자신이 의존하는 자에게 의존하지 않기라는 것은 확실히 멍청한 도박이다. 통상적으로는 이처럼 멍청한 도박들이 가장 위험한 자들을 만들어낸다, (p69)
현대인들의 삶은 자본이 만든 균질적인 리듬에 맞춰 주어진대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노동이 균질된 상태, 노동자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형된 상태에서 예전에는 대체될 수 없는 각자의 노동의 질이 있었을때와 달리 대체가 쉬워집니다. 그러면 당연히 공장주에게 의존이 되는데 그것을 의존하지 않기라는 게 실생활에 큰 위험을 미치게 되죠.
그러다 자의든 타의든 삶의 리듬이 바뀌는 상황이 되면 더욱 무언가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기 쉽죠. '착취자 없는 부르주아 문명, 영주들이 없는 기사도, 주인도 하인도 없는 주인다움―에 달려 있는 개인적 모험. 요컨데 노동자들의 해방이라는 그 상상'(P76)은 더욱 요원해지는 거겠죠.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7월 혁명이 3일 천하로 끝났을 때 그들은 실패하고 사회에 적응하고 살았으니 실패자란 마음을 가졌을 것 같은데 랑시에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미망이고 물거품이지만 삼일밖에 해방이 안됐을지라도 자기들이 그렇게 했던 것에 대한 추억을 굉장히 끈질기게 긍정정으로 가져간다고 보았습니다.
혁명 후 노동자들은 더 착취 당하고 일자리는 더 없어지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궁핍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여기에는 절망으로 좋았던 시절을 향수하고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끈질긴 희망을 버리지않았다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위험한 3일이 필요한 것은 개인의 미래든 그가 속한 사회의 미래든 그 경험은 개인과 집단에 남아있는 기억은 지울 수 없기 때문일겁니다. 실패의 경험이 다분히 실패로 끝나는 건 아닐 수 있는 것이죠. 그런 경험을 붙들고 과거가 현재가 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재생산되는 것들에 대해 다른 질문을 계속 하면서 능동적인 해석으로 갈 수 있는 역량이 결국은 '자유'와 연결되지 않을까합니다.
해방의 다른 시간
각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종의 이러한 정념들―노동 시간의 리듬과 활동과 휴식, 취업과 실업의 사이클이 무한히 재생산 하는 것들―을 털어낸 개인들끼리의 새로운 사회성의 도래인, 해방의 다른 시간을 예속의 사이사이에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의 문제,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사회, 자세히 보면, 그 기획은 장인들과의 "평등한 관계"라는 이미 전대미문인 주장을 확실히 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p100)
노예처럼 예속된 정념들 ― 한주동안 일한 댓가로 주말을 쉬나거나 여행을 가는 것, 취업을 못했을 때는 불안한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만 신경쓰는 생활― 사이사이에 해방의 다른 시간을 만드는 개인들은 과연 어떤 존재들인지,, 이렇게 털어냈을 때 새로운 사회성의 도래와 자유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 것인데 그것이 공부와 철학, 예술을 통한 사유의 방식이고 규문이나 감이당이라는 공간이 그런 것을 '실험하는 장이 될 수도 있는가'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주류가 만들어 놓은 가치속에 편입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살고자했을 때 마땅히 연대하거나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공간이 없는데, 기성세대인 어른들이 그런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런 시도를 있게 해주는 게 필요한게 아닐까요. 이는 혼자할 수 있는 건 아닌것 같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연대와 삶의 실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에 대해 1조샘들께서 나눈 내용이 흥미로운데요. 저는 이 말이 사장님들이 하는 말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회주의에서 나온 말이였군요. 연희샘께서 하나의 노동에 대해 정반대의 가치판단이 있을 수 있음을 짚어 주셨는데 정말 공감했습니다. 2조에서는 위 문구와 반대되는 - 일 안해도 먹고 사는 것 -에 대한 사회적 선망(그리고 비난)에 대해 얘길 나눴어요. 노동에 대한 질문이 욜로/플렉스/파이어족 등과 같은 사회현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빈낙도를 지향하는 것으로 향하기도 하는 등의 여러 방향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희샘 덕에 1조 토론 내용 흥미롭게 엿보고 가네요~ 감사합니다 😊
우와~~ 연희샘 여기저기 다양하게 뻗어나갔던 얘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셨네요. 😉 노동과 관련되서 시대별, 지역별, 개인별로 갖고 있는 생각도 다양하여 정말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보편적인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규정하는 노동, 생계, 돈 등과 관련된 강한 분할선이 있고 우리 각자는 어떤 규정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잘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노동과 공부를 분리하여 생각을 하다 보니, 내 삶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생겼는데, 노동과 공부에 대한 분할선을 보면서 제3의 길을 잘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희샘 후기 덕분에 토론에서 나왔던 문제와 얘기들 다시 잘 복습하고 갑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