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우리는 우리 삶에서 예술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술과 정치의 문제인데요. 이 점에서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을 배우는 이유는 그가, 정치와 예술을 다르게 사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수성 변화 없이 정치를 논할 수 없고, 정치와 무관한 예술 또한 없음을 말하는데요. 옛 문서고에서 모은 수많은 작은 웅성거림들을 들려주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이를 증거합니다.
책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무명의 목소리들이 많은 인용문을 통해 등장하는데요. 이런 작은 목소리들과 랑시에르 자신의 것이 구별 불가능하게 구성된 이 책은 - 그 시적 문체 때문에 우리가 종종 망각하지만 - 무엇보다도 1830-48년 당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역사책으로 인식되는 것은 늘 우뚝 솟은 인물과 굵게 밑줄 쳐진 사건들의 연대기입니다. 특히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이 가능했던 것을 두고 대개,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형성되며 그러한 정체성 가진 이들로 인해 발생하였고 그들이야말로 역사 변혁의 주인공이 되었을 거라고 보는데요. 랑시에르는 무엇을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지극히 관념임을 지적합니다.
이 시기는 프랑스 혁명으로 조금이나마 변화한 것들이 나폴레옹 실각 이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철회된, 일명 반동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랑시에르가 문서고에서 당시 사람들의 수많은 말과 글을 탐구하며 깨닫게 된 바는, 그 혼란기 속에서 아직 계급이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노동자’라고 부르는 책 속 인물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구분 짓지 않았다는 점이죠. 비참한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는 자유와 억압을 너무도 단순하게 관념화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우리 삶은 완벽하게 억압적인 것도 완벽한 해방적인 것도 있지 않음을 보여주며, 어떤 외부의 조건으로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미지의 방식으로 길을 내며 무언가를 창출해 나가는 자들을 만나게 합니다. 랑시에르는 큰 목소리와 웅변가들에게 가려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자들을 통해 당시의 비참함이 어떻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는지를 다성적으로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그 다름을 생산해 낸 조건이 무엇인지 탐구합니다.
매 장마다 여러 다양한 노동자들의 모습이 등장하는데요. ‘며칠은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시간엔 내내 쉬고 취하며 쾌락에 골몰하는’(85)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랑시에르가 ‘바빌론 사람들’이라고 칭한, ‘노동 그 자체를 하나의 취기’(85)로 여기며 ‘자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힘의 한계까지 다다른 과잉 노동의 형식 아래 몸이 사라져버리는 그런 시간’으로 만들며, 노동이 그야말로 신이 된 사람들도 있죠. 이들은 노동으로밖에 자기를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인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으며, 지금 우리의 여러 모습과도 겹치는데요. 많은 우리들이 주말을 위해 살거나, 혹은 너무 지쳐 주말에는 이불 밖을 나오지 않는 등의 생활을 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깨고 다른 길을 간 고니의 경우가 이들과 대조적으로 제시됩니다.
목수 일을 하는 고니는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으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를 목수라 불러야 할까요 시인이라 불러야 할까요 철학자라 불러야 할까요? 랑시에르는 노동하는 존재로 자신을 환원하길 거부했던 –감수성이 그 당시의 배치로 환원되길 거부했던– 인물로, 비참한 상황에선 오직 절망과 죽음을 각오한 자유밖에 없었을 것이란 우리의 생각이 철저한 관념임을 일깨웁니다.
-구성되는 것, 그리고 지적 평등
자유의 여백은 노동일과 연장과의 관계를 비껴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 안에 설정되어야 한다. 연장은 예속의 도구이지만 그것 없이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독립이 있을 수 없는 최소 조건이다. 고니는 장인도 감독자도 동료들도 없이 자기 내키는 시간에 노동하는 집들에서, 도급제로 마루를 까는 노동자로서 자신을 내부로부터의 주변인으로 만들 것이다. 틀림없이 도급 노동자의 이러한 자유는 어렵게 확보되는 것이다. 경쟁은 가혹하고 자유의 대가는 비싸기 때문이다.
마루 까는 일을 하는 고니는 자기 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노동을 비참하다고 규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꿈꾸는 것이 결코 아니죠. 그런 일을 하는 목수인 것도 고니이고 또 다른 영역에서 자기 실존을 다르게 구성하고 있는 것도 고니입니다. 고니는 어떤 한 가지의 정체성에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목수 고니 시인 고니 철학자 고니 이 모두이자 모두가 아니기도 한, 모든 분열적인 것들의 총체로써 고니는 매번 구성되는 것이죠. 고니와 같은 자들로부터 랑시에르는 경이로움을 느끼고, 자유와 해방이 (누구로부터) 쟁취되거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지를 정치와 예술에서 복기하려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채운 샘께선 랑시에르의 두 가지 문제의식을 짚어 주셨는데요. 먼저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역사란 ‘미장센(Mise-en-Scène)’이라고 말하는데요. 영화, 연극 등에서 많이 쓰이는 이 말의 직접적 의미는 ‘화면 안에 놓이는 것’입니다. 랑시에르가 역사를 미장센이라 말할 때의 의미는 역사는 무엇이 보이고 안 보이는지 구성된 것이지, 절대적인 팩트나 기원 같은 것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장면 안에 무엇이 어떻게 놓여 있는지가 그 자체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조건이기에, 역사의 한 장면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 무엇을 배경으로 무엇을 전경으로 둘 것인가에 따라 화면 안의 관계가 달라지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큰 목소리들로 구성된 역사 말고 전혀 다른 목소리로 역사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보여준 역사의 미장센은, 있었지만 없었던 것으로 치부되던 유령 같은 존재들의 말과 글을 전경에 내세우며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어떤 것의 발생에 순수한 무엇이 있다거나, 힘 있거나 똑똑한 특정한 주체가 있지 않다는 랑시에르의 생각은 배움에 대한 관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들은 집에서 기초를 익혔는데, 가령 루이 뱅사르는 모친에게서 읽기 기술을 배웠다. 이는 거의 문맹인 이 여성이 자신도 알지 못했던 것을 아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면 전혀 이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하다-여겨지는-스승의 책략 없는 이러한 산파술이 아마도 장차 아이로 하여금 미래의 교육을, 성모의 계시에 의존하는 어떤 종교를 이해하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어머니는 지적 해방의 방법을 그 이름은 모른 채로 적용했을 뿐이며, 이 방법의 개척자인 조제프 자코토는 사회질서 안에서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의식하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에게 — 『텔레마크』라는 보충 자료만을 가지고—“지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선생 없이 독학하여 결국 자신도 모르는 것을 타인들에게 가르치는 방도”를 약속했다.
여기 나오는 조제프 자코토는 훗날 쓰인 『무지한 스승』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일명 ‘무지한' 스승입니다.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1818년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랑스인 조제프 자코토가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을 주고 프랑스어를 익히도록 한 실험을 소개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프랑스어조차도 말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진 이 실험에서 학생들은 놀라운 수준의 프랑스어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요. 루이 뱅사르의 어머니가 바로 이러한 ‘책략’(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채)으로 아들을 가르치죠. 랑시에르는, 역사가 누군가가 이끄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 역시 뭔가를 안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모르는 자들에게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음을!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도’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가 아니라, ‘배움’ 자체가 무엇을 아는 것에 있지 않고, 무언가를 익혀가며 그것을 새로운 것들과 연결시키는 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지적 평등을 이루는 길이지요.
끝으로, 고니로부터 받은 경이로움이 랑시에르에게로 또한 저에게로(뿐만 아니라 많은 샘들께도) 전해졌던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랑시에르는 혁명이 결코 웅변가들의 큰 목소리들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님을, 고니와 같은 자들–어떤 정체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의 작은 독백과 중얼거림의 미미함이 이웃의 작은 감수성 변화의 불씨가 되어 마침내 불꽃으로 타오른 것임을 유려한 문체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랑시에르의 텍스트를 읽어가며 희로애락의 파노라마를 경험합니다만, 4장 마지막 단락은 경이와 폭풍 감동의 물결을 자아내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네요 ^^
우리의 마루 까는 노동자는 불행히도 웅변가가 아니다. 그의 반란을 키워낸 고독이 웅변을 단란할 대화를 아예 박탈하는데 어찌 그가 웅변가일 수 있겠는가? (…) 하지만, 진정으로, 그가 군중에게 말하러 가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가 습관적인 걸음으로, 혼잣말하면서, 다만 평소보다는 좀더 크게 하면서, 도시를 횡단하는 것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장인들이 두려워하는 흠결이란 파리의 노동자가 빈둥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구경거리는 노동자의 양심을 잡는 덫이다. “민주주의자는 혼잣말하면서 도시를 횡단한다. 그가 독백으로 내뱉는 구절들이 행인들의 호기심을 끈다. 행인 각자가 거기서 어떤 진실을 포착한다. 멈춤 없이, 그는 그들의 실존의 상처를 건드리며, 이 상처는 장인의 이익을 감퇴시킨다……바람에 실린 이 말들을 듣고, 군중은 이 혁명가를 에워싸니, 그는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중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 같다. 바람은 원하는 곳으로 불고, 독방 지옥에 대한 묘사를 듣고자 몇몇 건설 노동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틀림없이 석공들에게는 별로 없는 기회들이다. 그들은 노동에서 일탈하는 것을 삼가며, 흔히들 무리 지어 셋방으로 귀가한다. 하지만 어느 목수에게도, 어쩌면 어는 철물공에게도, 불꽃이 타오를 것이다……
작업장이 닫히고, 작업대가 멈춘다. 수도자는 저녁 산책을 시작한다. 이제 그는 다른 이름을 지닌다. 그는 필라델프(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자)라 불린다.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으면서 노동과 공부의 분할, 노동과 활동의 분할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1조에서는 오물을 치워주는 대가로 시의 하늘로 날아오를 권리를 갖는 퐁티, 밤을 낮 삼고 낮을 밤 삼는 걸로 문제를 해결한 퐁티와 이런 자유가 최악의 예속이라고 말하는 고니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요. 퐁티는 기존의 분할선은 그대로 유지하되, 위치만 바꿨다는 측면에서 예속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과 공부를 이분법화하여 이건 나쁜거, 이건 좋은거라는 식으로의 공부는 또다른 예속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받았네요. 자유는 공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적 조건에서 구성하는 것이기에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더라도 그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어렵습니다만...ㅎㅎ 바쁜 와중에 수업내용을 정갈하게, 그리고 빠르게 정리해주셔서 넘넘 감사해요.👍💚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으면서 노동과 공부의 분할, 노동과 활동의 분할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1조에서는 오물을 치워주는 대가로 시의 하늘로 날아오를 권리를 갖는 퐁티, 밤을 낮 삼고 낮을 밤 삼는 걸로 문제를 해결한 퐁티와 이런 자유가 최악의 예속이라고 말하는 고니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요. 퐁티는 기존의 분할선은 그대로 유지하되, 위치만 바꿨다는 측면에서 예속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과 공부를 이분법화하여 이건 나쁜거, 이건 좋은거라는 식으로의 공부는 또다른 예속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받았네요. 자유는 공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적 조건에서 구성하는 것이기에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더라도 그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어렵습니다만...ㅎㅎ 바쁜 와중에 수업내용을 정갈하게, 그리고 빠르게 정리해주셔서 넘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