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강의 정리]
*무아(無我)-멍때리기 아님!
채운 선생님께선 망아(忘我), 무아(無我), 물아일체(物我一體)에 대해 우리가 가진 뿌리 깊은 관념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상태들을 우리는 ‘자아'가 아예 없다거나, 완전한 무의식 상태와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평소에 우리가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만큼 상대적으로 그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 이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이 상태는 의식을 놓는 상태가 전혀 아닌, 오히려 의식이 아주 ‘성성하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각성된 상태라고 말합니다. 즉 의식이 성성하게 깨어있는 상태는 자기가 사라지는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의식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첨예한 경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독립적인 단독으로 실체적으로 있지 않고, 전체의 연관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즉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장 예리한 상태의 의식 상태를 우리는 깨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 상태와 관련하여 채운 선생님께서 모리스 블랑쇼의 ‘on’ 개념을 말씀해 주셨죠. on은 불어에서 익명의 일반 사람들을 뜻하는데요. 들뢰즈는 죽음에는 인격적 죽음과 익명의 죽음 이렇게 두 차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격적 죽음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나'라는 personality의 죽음으로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는 공포의 근원이 되죠. 한편, 익명의 죽음이란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매 순간 경험하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의 죽음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나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작동을 멈추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사실상 죽음은 우리 삶에 내재되어 공존하는 것으로 매 순간 벌어지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 안에 있고 나를 구성하지만 나를 알지 못하는 익명의 존재들을 우리는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무의식 상태는 소위 ‘멍 때리기'와 같은 것이거나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아기와 같은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며 의식과 반대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를 구성하는 익명의 힘들로써 무의식은 항상 의식과 공존하며, peronality로서의 나보다 선행하고 우리는 그 힘들이 나를 내 경계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덕에 끊임없이 계속 ‘변화'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사고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변화를 부정하는 사고라고 볼 수 있는데요. 반면, 변화적 사고는 내가 내가 아닌 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자각하고 느끼며 그 변화를 사유하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
무의식과 무아를 이러한 것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해 두 가지 상이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것으로서의 미래가 있습니다. 이때 미래는 현재를 원인으로 하여 예측 가능한 계산적 합리성에 의해 도달 가능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현재의 위치에 점 A를 찍고 내가 목표로 하는 어느 지점 B에 점을 찍은 후, 그 사이에 선을 그리고 내 삶을 그 선 위를 걸어가는 것으로써 정의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당연히 우리 삶은 내가 그은 선 위에 정확히 위치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 선을 의식하기에 더더욱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세상이 나를 방해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에 반해 미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미래는 예측한 것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 ‘미지'의 것, 매번 도래할 변수나 예측 불가능성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하여 우리를 현재 서 있는 A라는 지점에서 어딘가로 한 발짝 나아가게 하는 힘. 우리를 추동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들에 따라 우리가 지나간 길에 자취가 남겠지만 이 선은 앞서 우리가 미리 그린 선과는 전혀 다르죠.
사실상 저는 앞서 말한 길 같은 것은 우리 삶에 애초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지나온 자취로써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선만을 가지지만, 그것에 우리가 생각하기 편한 혹은 우리가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인과를 붙여왔기 때문에 내가 목표를 삼았고 그것을 위해 이런 길을 그려왔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요?
*창작 활동에서의 의식과 무의식
즉 우리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힘, 우리에게 내일을 만들어내는 힘은 ‘미지의 힘'에 있습니다. 삶이 이러한 생성의 길에 놓여 있음은 예술가들의 창작 과정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는데요. 창작을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우리가 글을 쓰는 과정만 봐도, 내가 내 힘만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이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쓰려고 한 건 아닌데 늘 어떤 의도나 머릿속 구상과 달리 실제로 써 나가는 과정에서 글이 그런 방향으로 되어가는 경험들 다 있으시지요.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 환원되지 않는 낯선 힘들이 폭력적으로(예기치 않게 찾아오기 때문에 폭력적인) 우리를 육박해 들어올 때 우리는 지금 있는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한발 내딛게 됩니다. 이 점에서 앙토냉 아르토는 사유는 분만(생식)이라고 하였고, 들뢰즈는 폭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미지의 힘들 - 무의식의 힘에 내맡기는 것이 창작이고 예술일까? 초현실주의를 배울 때도, 이번에 백남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플럭서스 예술을 접할 때도, 우리에게는 창작 활동을 무의식과 연결 지으며 그것을 의식과 대립하는 구도로써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말한, 무의식에 대한 오해와 더불어 예술 활동을 의식과 반대되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 오해 또한 자리합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작업 과정은 고도의 의식적 상태로서 무엇보다 무의식의 힘을 잘 통제하는 데에 있습니다. 즉 고도의 계획 속에서 우연을 허용하는 것으로, 예컨대 베이컨의 경우, 재난처럼 혹은 폭력처럼 주어진 물감의 얼룩이라는 우연/ 미지의 힘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해 가며 형상으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로 작동합니다. 또한 백남준 선생님의 책에도 많이 나오지만 플럭서스 공연과 같은 퍼포먼스 역시 불확정성과 우발성에 열려 있지만 그것은 그 이전에 촘촘히 계획하고 구성한 것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역시,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만났을 때 그것이 내가 예상한 나의 길에 없다는 이유로 없던 것 취급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사건과 함께 내 삶을 어떻게 조형해 나갈 것인가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가 각자의 내일을 생동하는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힘이 되겠죠.
*소통(상호변환)
채운 선생님은 무아의 몰입 과정은 오히려 ‘듣기'라는 지극히 평범한 활동 속에서 수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듣는다는 것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모두가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과연 타자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있는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발표할 때, 정말 그 사람의 말에 내 온몸을 집중하기보다 나의 내답을 준비하거나, 적당히 그래 그거 그런 얘기지 하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
백남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소통의 문제가 많이 언급되었는데요. 소통에는 같이 운다는 의미인 ‘공명(共鳴)’의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공명은 우리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며 어느 순간 서로의 파장이 꼭 만나 ‘통’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A는 A 자신을, B는 B 자신을 떠난 각자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며 발생합니다. 즉 우리가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맞이하기 위한 변환이 서로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말을 할 때 거기에 온몸을 집중하고 나를 떠나 상대의 파장으로 들어갈 혹은 나를 향해 들어오는 상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죠. 서로 그러한 노력을 하는 가운데 상호 변환이 일어나며 소통이 발생합니다.
백남준 선생님이 작품을 불확정성과 우연에 열어둔다는 것은 이렇듯 상호 변환의 소통을 뜻합니다. 그것은 미완성이거나 모호한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은 시간이라는 불확정 속에 놓이며 누군가에 의해 연주되고 해석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글도 하나의 그림도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해석되는 만큼 변환하며, 이때 해석하는 자와 해석되는 것 모두 상호 변환이 일어나는 가운데 의미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백남준 작가의 소통이란 작가에 의해 출발한 작품이 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관객이라는 또 다른 생산자와 그를 둘러싼 미지의 상황에 의해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데에 이르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자유의 개념과 이어지며 예술은 실행성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 미술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 1889-1975)
1920-30년대 유럽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습니다. 이들의 영향이 미국적인 풍토와 만나 점차 미국적인 것을 형성합니다. 그중 토마스 하트 벤튼은 1930-40년대 가장 미국적인 정서를 잘 보여줬던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2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공공 일자리 창출을 위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벽화 작업이 붐을 이루었는데요. 벽화는 중남미의 토착 원주민의 전통과 섞이며 특히 (유럽과 대비되는) 아메리카적인 특징이 되었습니다.
https://www.nytimes.com/2014/10/03/arts/thomas-hart-bentons-america-today-mural-at-the-met.html
Thomas Hart Benton, City Activities with Dance Hall, 1931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잭슨 폴록 역시 초기에 벽화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시작을 했고 초현실주의 운동의 영향과 더불어 아메리칸 원주민 미술의 영향을 받아 바닥에 놓고 그리는 방식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림을 이젤에 놓고 그리는 것, 큰 벽화 형태로 그리는 것, 바닥에 두고 그리는 것은 중력과의 관계에서 모두 다른 신체성을 요구하므로 붓질의 형태와 관여되는 신체적 움직임이 다르게 펼쳐집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File:Namuth_-_Pollock.jpg
https://www.jackson-pollock.org/number-one.jsp
잭슨 폴록의 All over Painting(전면회화/액션 페인팅)이 미국 추상 표현주의라는 하나의 장르로, 곧 가장 미국적이며 현대적인 회화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이 시기 미국 미술 담론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던 클렌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년)의 비평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는 회화의 변곡점을 마네 그림에서 찾으면서 2차원 평면 속에서 작업한다는 것을 회화의 조건으로 선언하고 회화에서 모더니즘의 본질은 평면성에 있다고 말합니다. 회화를 캔버스 자체의 평면성과 일치시키려는 실천적 움직임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담론이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을 만큼 당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하면서 추상 표현주의의 또 다른 결을 보여주는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의 회화는 흔히 색면추상이라고 얘기되는 것으로, 핵심 하나만 빼고 다 제거하는 미니멀리즘의 영향과 더불어 회화에 있어서 물성 자체만 남기며 매우 큰 사이즈로 제작된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 작품 앞에 있을 때 관객은 자신을 압도하며 다가오는 색면들에 의해 어떤 벅차오르는 감정을 갖게 되기도 하는데요.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를 칸트의 숭고미와 연결 지으며 담론화합니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Mark-Rothko
Mark Rothko chapel, Houston, Texas
https://www.nationalreview.com/2021/01/rothko-reverential-and-otherworldly-in-houston/
Barnett Newman, 1969
Barnett Newman, Onement 1, 1948
https://en.wikipedia.org/wiki/File:Newman-Onement_1.jpg
https://atelierlog.blogspot.com/search/label/Barnett%20Newman%20(1905-1970)
-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1910-1962)
또 다른 독특한 방식의 추상으로는 프란츠 클라인의 서체적 추상이 있는데, 존 케이지에도 영향을 주었던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츠의 선 사상이 미국의 추상화가들과 만나며 생겨난 경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https://surrelart.blogspot.com/2012/08/franz-kline.html
[10-1주차(9/16) 공지]
1. 16일에 발표하실 샘들-
지은샘, 희욱샘, 반디샘, 신우샘, 승현샘, 승연샘, 주영샘, 미애샘 이렇게 여덟 샘들은
에세이 글을 15일 금요일 10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2. 16일 에세이 발표는 오후 1시부터 시작합니다.
3. 다음주 간식은 발표하시는 8분께 준비 부탁드립니다~
***마감 시간, 발표 시간 모두 엄수!! 화이팅 화이팅!!
3학기에 예술가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작품이 그들의 재능을 통해 일필휘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질문과 사유, 노력과 함께 드러난 것임을 알게 되었네요.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다들 어찌나 사유도 깊고 글도 잘 쓰시는지 ㅋㅋ 백남준 선생님을 통해서는 예술과 소통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해석의 대상, 감상의 대상, 그야말로 대상으로 접근했었는데, 소통의 매개로서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샘들 각자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질문이 생겼을텐데, 이것은 에세이에서 잘 펼쳐보아요.^^ 홧팅입니다!! 꼼꼼하게 잘 정리한 정성스러운 공지글이 복습과 에세이 작성에 도움이 됩니다. 😊 빠르게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갈수록 예술이 파고드는 지점이 놀랍네요.. 지각의 균열을 넘어 무의식까지 들어갑니다. 멍때림이나 망아가 아니라 카오스에서 다시 구성되는 질서를 알려면 스스로도 금기안에서만 머물러선 안되겠습니다. 아직은 나에게 닥쳐오는 여러 사건이나 힘들에 흔들거리는데 균열이 더 커지는 느낌입니다. 의식이 성성함은 이걸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자신, 그동안 외면했던 관계들을 다시 보게 되네요. 쌤의 정갈한 정리글이 에세이에 도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