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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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와 방학은 꿈결처럼 사라지고 크크랩 4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이후 저는 오랜만에 열흘이 좀 넘게 여행도 다녀오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는데요. 아드리아 해안의 강렬한 햇빛과 유리알처럼 투명한 물빛, 시원한 바람이 분주하게 달려갔던 제 삶에 살짝 브레이크 걸었고, 주황색과 보라색, 파란색이 뒤섞인 형용할 수 없는 노을과 짙푸른 밤하늘 색 등 자연이 채색한 화폭을 감상했지요.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자연, 내 일상에서도 분명 만날 수 있는 광경일 수도 있는데,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생활 속에서 나의 감각이 닫혔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휴와 방학이 끝나서 아쉽지만, 늘어지고 흩어져 있던 마음을 이제 다잡아야 하네요. 물론 다시 도반들과 웃고 떠들면서 공부할 생각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4학기에는 본격적으로 작가론을 쓰게 되는데요.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가 작가론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존 버거의 작가론으로 하나의 예시일 뿐,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버거는 피카소를 통해 사회를 봤는데요. 우리는 각자 문제의식을 통해 작가를 만나면 됩니다. 4학기의 종착지가 될 작가론은 7~8p 분량으로 한 번에 일필휘지로 쓸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채운샘은 정보로 글을 쓰지 말라고 당부하셨고요. 유튜브, 블로그, 브런치 등 검증할 수 없는 자료는 참고하면 안 됩니다. 이번 5명의 화가를 선정한 가장 큰 이유가 화가의 저서, 인터뷰 등 활용할 자료가 많다는 점인데요. 2~5주차 4주 동안은 기본이 되는 자료를 잘 찾고 집중적으로 읽습니다. 이후 6~7주에 초고를 쓰고 8주에 퇴고한 후 2주 동안 에세이를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4학기에는 수업 순서가 좀 바뀌는데요. 오전에는 두 시간 동안 채운샘의 미술사 강의가 있고, 점심 후 1시부터 2시간 정도 조별 토론이 있습니다. 조별 토론 후에는 조별로 브리핑하고, 에세이 작성 및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와 관련된 채운샘 강의가 진행됩니다.
1교시에 각자 어떤 화가를 선택하여 공부해 나갈 것인지 글을 발표하고 인기가 많은 화가의 경우 채운샘이 일부 조정하셨는데요. 저는 샘들의 글을 읽으면서 반성했습니다. 다들 자신의 문제를 깊이 공부하면서 화가를 통해 더 나아가 보겠다는 마음이 드러났지요. 저는 미팅 파트너 정하는 수준으로 아주 가볍게 생각했는데, 그리하여 제가 가장 하고 싶었던 화가인 반 고흐를 포기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반 고흐 그림에서 느껴지는 색채의 운동, 붓질이 기억에 남았고, 영혼의 편지에 담긴 그의 편지글이 마음을 울렸거든요. 이런 정도의 감흥은 많은 이들이 느끼는 부분일 뿐, 어떤 지점에서 꼭 해야 하는지, 절실함이 별로 없어서 결국 지적이고 이론적인 칸딘스키를 하게 되었네요. 샘들의 문제와 고민이 화가들과 어떻게 만나 에세이로 꽃피울지 매우 기대됩니다. 아래는 4학기 동안 깊이 접속하여 작가론이라는 결실이 탄생할 화가와 동고동락할 조원들입니다. 앞으로 남은 9주 동안 화가를 언제 어디서나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다 알고 싶은 연인처럼 여기며 깊이 만나봅시다!!!
♦ 고야 : 경희, 미애, 승연, 승현, 휵
♦ 반 고흐 : 동주, 성지, 수빈, 순이, 스텔라, 지은
♦ 베이컨 : 난희, 반디, 연희, 지안, 희윤
♦ 세잔 : 루이, 신우, 정우, 제현, 지민
♦ 칸딘스키 : 산푸른, 인영, 주영, 혜령
에세이를 쓸 때 반드시 작가를 선정한 사유가 들어가야 하는데요. 각자의 문제의식이 되겠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예술에 대한 전제를 묻는 과정입니다. 이 작가가 무엇을 알려주는지, 각자가 만났던 지점을 통해 예술의 정의를 생산합니다. 아직 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같이 공부해 나가며 각자 예술을 새롭게 정의해보아요. 채운샘도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견고한 틀을 가지고 있고, 나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쉽게 구분합니다. ‘A는 A다.’라는 강한 확신이 문제를 일으키는데요. 그 기준을 통해 우리는 쉽게 비정상을 판단하고 배제하지요. 오히려 돈키호테와 같은 광인은 상대방을 미쳤다고 보거나 그를 제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강한 확신과 믿음이 전쟁이나 제노사이드를 촉발합니다. 예술은 정상성과 비정상성으로 구분될 수 없는 영역으로 1+1이 2가 되는 양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가 아닌 곳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 우리가 부르는 비합리성은 A가 합리적이고 선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편견인데요. 확실성과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예술은 우리의 믿음을 의심하게 하고 합리성을 벗어나게 하는 영역입니다. 저는 철학보다 예술을 통해 글을 쓰는 일이 더 힘겹게 다가왔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적 변화, 일렁이는 감정 등을 규정하기가 어려운데다 이를 언어로 번역하는 게 수월하지 않았지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어나는 정동, 규정할 수 없는 무엇으로만 얘기할 수밖에 없는 그 지점을 잘 포착하여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팝 아트(Pop art)란 1950년대 후반에 출현한 미술의 한 장르입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리처드 해밀턴,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이 있는데요. 리처드 해밀턴이 1956년 전시회 <Man, Machine, and Motion>과 <이것이 미래다(This is Tomorrow)>를 위해 제작한 <오늘날 무엇이 중산층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가>는 팝 아트의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TV, 세탁기 등 우리의 필수품이 많이 등장하지요. 1940~50년대에 가전제품이 많이 보급되었는데, 이들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꿨을까요? 세탁기, 청소기, 냉장고는 과연 가사노동을 더 단축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은 더 편리해진 건 맞는 것 같은데 왜 더 분주하고 할 일이 많은 것처럼 느껴질까요? 이 작품은 현대적 삶이 미디어를 중심으로 형성되며, 물신이 지배하는 소비주의의 도래를 알려줍니다. 자본주의는 기존의 가정을 쇄신했는데, 가정은 소비 주체가 되고 자본주의 재생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요. 미디어와 상품이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네요. 소비를 적게 한다고 해서 난 트렌드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미니멀리즘, 생태주의 등 자본주의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개념조차도 흡수하여 자본주의식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이기에 면밀하게 봐야 합니다. 그런데 팝 아트는 미디어와 상품을 활용하면서 예술에 대한 상에 균열을 만듭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응용했지요. 만화의 컷을 만화의 맥락과 상관없이 가져오면서 그림의 원본에 대해 질문합니다. 미키 마우스의 원본은 무엇일까요? 미키 마우스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이미지입니다. 만화의 컷을 그린 작품은 작가의 주관성으로도, 실재로도, 서사로도 환원되지 않으면서 예술에 대한 개념을 깨뜨립니다.
<오늘날 무엇이 중산층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가, 리처드 해밀턴, 1956>
<Look Mickey, 로이 리히텐슈타인>
추상미술은 눈앞에 보이는 세계를 모방하지 않음으로써 원본에 대한 사본, 즉 부차적인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했지요. 즉 그림은 그림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봤습니다. 칸딘스키는 선과 색 등 요소들의 내적 결합을 통해 그림의 자립이 가능하다고 말했고요. 추상주의에서는 외부의 사물과 세계가 아닌 작가의 감정, 생각, 개념 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가의 위상이 높아집니다. 화가는 재현하는 자가 아니라 없던 것을 창조하는 자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런 만큼 작가에게 지나친 권위가 부여되는 부작용이 발생하는데요. 이와 함께 추상미술의 장식성에도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종교화, 풍경화, 정물화 등 구상화는 잘 어울리는 장소에 걸 수 있지만, 추상화는 어느 장소에서 있어도 잘 어울리는 뛰어난 장식성이 있습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1953년 <지워진 드 쿠닝의 드로잉>을 통해 질문을 합니다. 그는 추상회화의 대가인 드 쿠닝(de Kooning)의 드로잉 작품을 받아, 이를 지워버리는데요. 라우센버그는 드 구닝에게 당돌하게 그림을 지워야 하니 작품 한 점만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누구의 작품일까요? 지우는 것도 예술로 포함한다면 라우센버그를 원작자로 볼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그리고 만들면서 무에서 유를 형성하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지우는 것도 예술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근대 이후 만들고 생산하는 것에서 인간의 가치를 찾고, 창조와 발명이 중시되었는데요.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이런 가치에 대해 의심하도록 합니다. 한편 재스퍼 존스는 성조기를 형상화하면서 이것이 깃발인지 그림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성조기 그림은 여러 겹의 신문 조각들이 겹쳐 있고, 덧칠한 그림 속에 묻혀 있는 여러 가지 텍스트 조각이 보인다고 하네요. 그의 작품은 오브제로서 깃발일까요? 그림으로서 깃발일까요? 이처럼 재스퍼 존스의 그림은 그려진 건 다 그림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의 작품 <잘못된 시작(1959)>에서는 언어 기호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오렌지색 위의 파란 글씨 BLUE와 파란 색 위의 노란 글씨 BLUE에서 우리는 기호와 색의 어긋남을 발견합니다. 파란 글씨로 쓰인 BLUE는 오렌지색 바탕을 지시하는 걸까요? 아니면 글씨 자체를 나타내는 걸까요? 이 작품 내에서는 기호를 통해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팅된 렌즈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진실로 여기면서 판단하곤 합니다.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내 렌즈로 본 것만을 옳다고 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이런 게 파란 글씨로 쓰인 BLUE가 글씨를 지칭하는 것인가, 바탕을 말하는 것인가 같은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판단이라면, 우리의 기준과 렌즈를 먼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워진 드 쿠닝의 드로잉, 로버트 라우센버그, 1953>
<잘못된 시작, 재스퍼 존스, 1959>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팝 아트는 미디어와 상품을 활용하고, 가볍고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를 통해 근원적인 질문을 촉발합니다.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을 그리거나 이를 통해 작품을 생산했는데,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판화, 영화, 책 등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공장에서 찍어낸 예술, 코카콜라 같은 예술을 지향하며 원본과 사본의 위계를 전복하지요. 예컨대 그가 만든 캠벨 깡통 주형과 캠벨 깡통을 보면, 사본보다 원본의 수가 더 많습니다. 원본의 권위가 무너지는데요. 이는 자본주의의 기능 방식이기도 하지요. 상품은 이미지를 통해 작동할 뿐, 상품의 원본은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일정한 돈의 규모 내에서 평등이 작용하며, 위계도 없고 차이도 없습니다. 수량화가 중요할 뿐이죠. 이런 평등함 속에서 양적인 위계가 작동하며 오히려 질적인 것이 제거되면서 위계가 더 단순화되고 눈에 보입니다. 아파트 가격, 대학교 순위, 직장의 연봉 등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예가 될 수 있겠네요.
앤디 워홀이 1962년에 제작한 <마릴린 딥디크(Marilyn Diptych)>는 제단화 형식에 50개의 마릴린 먼로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미지들은 어느 것도 동일하지 않은데, 이것은 뭘 보여주는 걸까요? 우리는 과연 마릴린 먼로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질문이 들지요. 우리가 아는 건 미디어를 통해 잔상으로 남은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연예인, 정치인 등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대부분은 그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것인데요. 우리는 이미지만 알면서 이미지를 실재화하면서 사람, 사물을 안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그 잔상을 통해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이미지는 위계가 없고 동등하지요. TV 안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뉴스와 배스킨라빈스 광고는 공평합니다. 앤디 워홀이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인데, 끔찍한 뉴스가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무뎌지고요. 원자폭탄 투하나 전쟁도 이미지로 소비됩니다. 실제 우리는 자연, 사람, 사건 등 거의 모든 걸 이미지를 통해 접근하고 소비하는데요. 원본이 이미지를 추동하는 게 아니라 둘의 관계는 전도됩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미지를 확인하기 위해 먹고, 방문하고, 구매하는데요. 블로그의 아름다운 경치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장소로 여행가고, 먹방을 보고 그 음식점에 가네요. 이런 상황에서 앤디 워홀의 판화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유발하는데, 미디어가 우리를 어떻게 마비시키는지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각성하게도 합니다. 거대한 복제품이 뿜어내는 아우라와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낄 수 있지요. 자본주의 안에서 분열증적 삶을 사는, 즉 중심이 없이 산만하게 부유하는 우리는 이미지에 대한 통찰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물으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릴린 딥디크, 앤디 워홀, 1962>
# 4학기 2주차(10.21) 수업에 대해 공지합니다.
1) 공통과제는 2가지가 있는데, 조별로 4주 동안 읽을 자료목록을 제출합니다. 이와 함께 각자 읽은 자료에 대해 정리합니다. 공통과제는 금요일 오후 8시까지 올려주세요.
2)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는 102p까지, 이와 함께 수업시간에 받은 롤랑 바르트의 글을 읽어 옵니다.
3) 2주차 간식/후기/정리는 스텔라, 미애, 정우샘 한테 부탁드립니다. 간식/후기/정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 1주차(10.14) : 주영, 지안, 인영
♦ 2주차(10.21) : 스텔라, 미애, 정우
♦ 3주차(10.28) : 연희, 지은, 경희
♦ 4주차(11.4) : 제현, 혜령, 난희
♦ 5주차(11.11) : 동주, 휵, 신우
♦ 6주차(11.18) : 반디, 순이, 승현
♦ 7주차(11.25) : 지민, 산푸른, 희윤
♦ 8주차(12.2) : 성지, 수빈, 주영
♦ 9주차(12.9) : 승연, 루이, 지안
♦ 10주차(12.16) : 다 같이
4학기 방학이 길어서 오랫만에 들은 크크랩 수업이 웬지 낯설었는데 잘 정리된 후기를 보니 4학기가 시작되었구나! 다시 힘을 내서 이번 학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더불어 4학기 공부와 에세이에 임하는 샘의 진지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언제 방학이었냐싶게 폭풍처럼 한 주 한 주가 지나가는 느낌이네요. 이번주 공지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보니 샘께서 정리해 주신 내용들이 다시 한번 환기되며 4학기 시작의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 각자 자신이 쓰고 싶은 작가를 한 분씩 정했는데 그와 몇 개월간 동고동락을 해야하는데 한편으로는 흥미로우면서도 상대가 ‘베이컨’이라 그런지 내 안에 그를 들이는 것이 살짝 두렵기도 하네요 ㅋㅋ 그래도 베이컨에 대해 ‘그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다 알고 싶은 연인’과 같은 마음으로! 도전해 봅니다. 일목요연하고 정성 가득한 공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