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7주차 강의 정리>
-초현실주의 선언은 무엇과 싸우는가?
모든 선언문은 기존의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자신들의 분명한 입장이 담깁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당대의 무엇과 싸우고 있었을까요? 1900년대는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과학이 크게 주목받던 시기였는데요. 그중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실증주의가 중요하게 대두됩니다. 철학 역시 논리학이 중요해지며, 언어를 분석하면 사고를 분석할 수 있다는 논리 실증주의가 등장합니다. 이는 무엇이든 합리성으로 계산 가능하다는 부르주아 문화의 황금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죠. 바로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부르주아 문화가 완성될 것 같은 이 찬란한 시기, 기술문명의 최정점에서 일어난 이 전쟁은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면화된 부르주아 문화가 꿈꾸는, 마치 인상주의 그림처럼 밝고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는 큰 충격을 받아 무너졌습니다.
항상 시대의 감수성을 누구보다 빨리 읽는 예술가들은, 이 폐허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고민합니다. 이러한 시도와 실험 위에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이 있고 다다이스트들의 유희와 이번에 읽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 탐구가 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주목하는 것과 그 한계
채운 선생님께선 그 시기의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와 하나의 태도로서의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저는 이것이 비단 초현실주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새로운 철학이나 비전 등을 배울 때 유념해야 할 지점이라고 느꼈습니다. 어떤 운동이든 여러 조건과 배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한계 없는 것이 없고, 우리가 사후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때는 그 한계가, 그것이 품었던 비전보다 더 크게 눈에 들어오게 마련인데요. 저는 우리가 무엇을 배우려면 판단을 우선 중지하고 그 각각의 태도를 헤아리고 폭넓게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먼저 운동으로써의 초현실주의는 1924년에서 30년까지 정도로 짧게 지속되고 끝이 났습니다. 선언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초현실주의 선언을 쓴 브르통은 대단히 강한 보스 기질을 가졌죠 ^^ 자신의 중심 가치와 길이 다르면 배척했습니다. 공통과제에 많이 인용하신 초현실주의 정의를 보면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 상태의 심리적 자동운동으로, 사고의 실제 작용을, 때로는 구두로, 때로는 필기로, 때로는 여타의 모든 수단으로, 표현하기를 꾀하는 방법이 된다. 이성이 행사하는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가운데,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배려에서 벗어난, 사고의 받아쓰기.” (앙드레 브르통 지음, 황현산 번역,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22, 88쪽)라고 되어 있는 것을 봐도 그가 지향한 초현실주의의 뉘앙스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남성명사라고 규정한 점과 더불어 강조되는 ‘순수'라는 단어… 채운 선생님은 ‘순수’라는 말이 나올 때는 늘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그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순수를 기준 삼는 순간,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억압하며 동일자의 논리로 환원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초현실주의가 브르통 식은 아니라는 것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초현실주의는 사고의 표현 방법론으로 이때의 사고란 논리와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이성과 대비되는 말로 무의식을 뜻합니다. 이들은 의식보다 무의식이 현실을 우월하게 감지하는 것으로 보고 지금까지 외면받아 왔던 자유 연상이나 몽상, 상상력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요. 논리적인 것을 배제한다는 면에서 문학, 그중에서 시를 운동의 시작이자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초현실주의가 언어적인 것에 천착하였기 때문에 이 점을 두고 언어에서 시작하여 언어에서 끝났다는 한계로 보기도 하죠.
초현실에서 ’초(超)‘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조별 토론에서도 많이 얘기 나누었는데요. 이때의 초가 무엇을 초월한다고 할 때처럼 현실 밖에서 현실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더 궁극적 기원, 근원을 뜻하는가? 채운 선생님께선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무엇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크게 영향받은 프로이트와 그 시대적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과 다윈의 진화론, 마르크스의 자본론입니다.
먼저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믿음 자체를 붕괴시킴과 동시에 기존의 인간에 대한 지평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이때 붕괴시킨 것은 그때까지 굳건했던 데카르트의 ‘의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죠. 프로이트는 인간이, 현실에 내포되어 있으나 의식으로 지각되지 않는 근본적 심층을 가진다고 보았고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만만하게 잘 알고 있다고 믿어왔던 우리 자신을 극히 일부만 알 수 있을 뿐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중대한 발견이었죠.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은 다윈의 진화론으로, 그때까지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왔던 인간의 근원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 우리가 열등하게 여겨왔던 동물과 같은 전혀 다른 존재-가 있다는 점 또한 당대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 하나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선험적으로 고정되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체임을 밝혔죠. 이 세 인물로 대변되는 큰 사건들이 그간 쌓아온 인간들의 자존심을 크게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초현실주의는 다다나 미래주의와 함께 기성세대에 대한 전투를 선언하죠. 미래주의는 전통과 싸우고, 다다는 무의미와 반언어를 지향하며, 초현실주의는 논리를 부정하며 무의식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 과정에서 특히 브르통은 의식이라는 중심에 대항하고자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무기로 삼지만 그 자체를 중심에 세우며 실체화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중심 권력이 됩니다. 채운 선생님께선 이렇게 하나의 중심이 빠르게 만들어진 것은 그 스스로가 권력이 되는 순간 빠르게 와해된다고 하셨는데요. 초현실주의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 까닭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태도로서의 초현실주의
서두에 언급했듯, 운동으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이렇게 짧게 끝났지만, 태도로써 초현실주의는 이렇게 저렇게 확장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우리가 좀 더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을 통해 ‘하나’의 실체적 현실을 부정한다는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의 규정된 진리에 질식당하지 않고자 하는 예술 일반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초현실주의는 쾌/불쾌라고 범주화하기 이전의 낯선 것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그들이 경이, 상상력, 자동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실증주의에 근원을 둔 사실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것 또한 이 지점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매번 헷갈려 하는 사실주의에 대해 채운 선생님께서 간단하게 정리해 주셨는데요. 사실주의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다비드나 앵그르의 그림처럼 마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 리얼리티라고 보는 ‘이상주의적 사실주의’, 인상주의 그림처럼 인간의 눈에 비친 그대로에 주목하는 ‘망막적 사실주의’, 마지막으로 시각적 사실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 것으로 선택되는가의 관점에서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사실주의를 초월(over - 넘어간다)한다고 할 때의 리얼리티는 ‘주어진 것으로서 실체화된 현실'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얼리티를 둘러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우리 스스로 매번 질문을 하며 새로운 사실주의를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듯합니다.
3교시에 채운 선생님께서 보여 주신 그림들 간단하게 정리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
-나치 퇴폐미술전
1937년 뮌헨에서 <퇴폐예술 전시회 (Entartete Kunst / Degenerate art)>가 열렸는데요. 나치는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그리스 시대의 말을 자기 식대로 전유하여, 우생학을 근거 삼아 백인 아리아인의 형상만이 우월한 것으로 보고 그것에 어긋나는 것을 모두 ‘퇴폐'라고 규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배운 칸딘스키, 클레 등의 바우하우스 예술가 작품들, 피카소, 초현실주의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었죠.
우생학이나 원자폭탄의 예를 보면, 과학 자체는 중립적인데 그것이 정치에 이용되는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과학도 시대적 배치와 네트워킹과 무관하게 탄생하는 것은 없으므로 그것 자체가 이미 정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우리에게 <스크림>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에두바르 뭉크 그림을 보았습니다. 뭉크는 세기말의 불안과 공포를 잘 포착하였는데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입센, 신지학, 신비주의, 자유연애 등이 유행했고 세기말적 불안과 우울, 공포가 더해져 자살 소동 등도 많이 일어났다고 하네요. 뭉크 자신도 어릴 때부터 죽을 고비도 넘기고, 병약했는데 세기말의 시대적 배치와 뭉크 자신의 경험 등이 당시 사람들의 불안한 표정과 무표정함, 무력함, 공포 등으로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Edvard Munch, Evening on Karl Johan Street, 1892, 84.5 × 121 cm
Edvard Munch, Anxiety, 1894, 94.0 × 74.0 cm
Edvard Munch, Golgotha, 1900, 80 × 120 cm
-앵포르멜 미술(Informalism/ Art Informel)
앵포르멜은 ‘비정형'이라는 뜻인데요. 전쟁으로 사람들이 다 도륙 당하고 세상이 피와 비명이 난무한 상황에서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길 없는 시대적 감수성에 의해 나온 예술이죠. 프랑스를 중심으로 어떤 것도 형태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형상성을 배제하고 붓질 자체에 내적인 힘으로 표현하는 방식의 회화로 이후 미국 평론가들이 1940-50년대에 ‘추상표현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전쟁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추상표현주의=미국 이란 인식을 심는 발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화가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의 그림들에서 해체되어 가는 형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Willem de Kooning, Excavation, 1950, 205.7 × 254 cm
Willem de Kooning, Woman, 1949, 152.4 × 121.6 cm
장 드뷔페(Jean Dubuffet, 1901-1985)는 한편으론 앵포르멜 미술에 속하면서도 또 그렇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화면 구성을 하였는데요. 그는 정신분열자들이 그리는 형상들에 주목하며 ‘자기(I) 인식' 이 없는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고 여러 실험들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직접 그리는 방식의 형상을 포기하고 물과 기름이 서로 관계 맺는 우연성을 이용하는 등 재료 자체로부터 작품이 만들어지는 듯한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Jean Dubuffet, Large Black Landscape, 1946, 1551 × 1186 mm
Jean Dubuffet, Landscape, 1953, 10 × 14.8 cm
<8주차 공지>
1. 백남준의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226쪽까지 읽으시고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9/1일 저녁 8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2. 다음주 간식-후기-정리는 1조 승현샘 2조 지안 3조 희욱샘께 부탁드려요~
초현실주의 선언을 쓴 브르통이 자신의 중심 가치와 길이 다르면 배척했다는 점에서 좀 놀랐습니다. 무의식 등을 보면서 규정성과 논리 등을 해체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순수상태의 심리적 자동운동에서의 순수를 감안할 때 배제가 존재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성이 행사하는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걸 얘기하는 것이 이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이지요. 그러나 예술에서 이성과 지성의 역할을 제외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감각, 감정, 직관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풍성함을 주기 때문에 이성고 지성의 배제는 또다른 앙상함과 빈곤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가별 작품과 함께 강의 내용을 꼼꼼하게 잘 정리한 정성스런 후기 감사해요.😊 감각과 지성이 호강했네요.👍👍
지난 주 초현실주의를 배우며 그 한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아마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무언가를 극복하려는 의미-에 대한 고정적 관념이 항상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어떤 사상이나 운동을 말할 때 그 비전의 의미를 더욱 중요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네요. 공부는 타자를 수용하는 것이란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며 복습 잘했습니다. 그림과 함께 보며 이해를 더욱 심화할 수 있는 정리와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