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남준이란 낯선 예술가
백남준, 시대를 앞서간 기이한 천재, 글을 읽었을 때 떠오른 첫 느낌이었다. 서문에서 예술가의 글쓰기는 자기 작업실을 닮는다고 했는데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분야, 사람들과의 네트워킹에 기반을 둔 그의 작업처럼 그의 글도 여러 접속의 현장과 아이디어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동적인 아이디어와 생각의 호흡을 따라가며 그의 작품 세계, 그와 교류한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느낀 생각 등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아이디어의 번뜩임과 생각의 비약, 독특함이 글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행위 예술, 미디어 아트 등 예술 작업의 특성상 작품이 향유되는 현장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채운 샘이 보여주신 영상들을 보고, 먼저 작품을 보고 오신 샘들이 추천한 영상을 찾아보니 확실히 책의 의미들이 다르게 읽혔다.
<머리를 위한 선>(1961)에서 붓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을 붓 삼아 획을 그어가는 퍼포먼스를 볼 땐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지만 아이디어의 독창성에 놀랐다. <TV부처>(1974)는 그 의미가 매우 철학적이었다. TV모니터를 바라보는 불상을 캠코더가 찍고 있는데 불상이 바라보는 TV모니터에 방금 찍은 불상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다. 그 불상이 바라본 화면은 실시간으로 찍었다고는 하지만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는 현재가 아니다. 현재라는 것이 현재임과 동시에 현재가 아닌 과거로 흩어짐을 보여줌으로써 현재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는 채운 선생님의 해석을 듣고 백남준 선생의 작품에 담긴 의미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 예술가와 관객의 역할
백남준 선생은 예술가의 역할이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고 미래를 사유한다는 것은 미래에 실현 가능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떠올리는 일이라고 했다.(205쪽) 이 내용을 보니 그가 미디어를 선택해 예술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미디어 없이 살아가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는 40년 전에 이미 그 가능성을 본 것이다.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과학과 예술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 중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미래를 사유하는 예술가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줬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통한 생중계 쇼라니.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 어디든 금방 접속할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1984년에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가 좋아했던 요제프 보이스, 존 케이지가 동시에 각각 파리와 뉴욕에서 연주를 시작하고 이 영상을 세계로 생중계했다.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인간은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매체에 지배당하며 살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메시지를 담았다. 그가 갖고 있던 미디어의 가능성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되었다. 지금은 미디어가 자본과 권력에 종속된 측면이 강하지만 한편으론 미디어를 역이용해 권력의 종속에 저항하기도 하는 유튜브 같은 매체를 보면서 이 시대에 백남준 선생이 살아 있다면 어떤 실험들을 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관계망을 통한 소통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고 관객들이 향유하는 방식도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세계은행 직원이 싱가포르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실린 이 전시회 기사를 네팔에서 읽었다는 이야기를 조카 켄을 통해 들었을 때 무척 감동했다고 한다) 그의 퍼포먼스, 미디어 아트의 일부만을 보았지만 관객이 그 현장에 참여하는 것이 작품의 중요한 일부임을 느낄 수 있었다.
3. ‘예술’의 이분법을 넘어
크크랩을 통해 예술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를 새로 만날 때마다 아직도 예술에 대한 고정 관념이 공고하다는 것을 느낀다. 백남준이 좋아한 존 케이지의 ‘4분 33초’, ‘Water walk’란 퍼포먼스가 자각의 계기가 되었다. 피아노 연주 없이 일상의 소리로 채운 연주, 각종 사물을 두들기며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보며 여기에서 느끼는 감흥이 일상의 음악에서 느끼는 감흥과 어떻게 다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의문은 기존의 음악에서 느끼는 정서적 감흥과 다른 것은 예술이 아니라 그냥 깨달음을 주는 일회성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 예술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에 대한 이분법이 작동한 것이다. 기존의 제도, 정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예술의 행위 속에서 예술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것과 예술을 표상화하지 않는 것의 어려움, 기존의 범주와 질(質)의 의미(비교급 형용사, 다르다)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예술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4. 크크랩의 퍼포먼스
평소보다 수업을 30분 일찍 마치고 크크랩 샘들과 간 곳은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에 반대하는 2차 범국민대회 집회였다. 후쿠시마 생기세미나 멤버 해민샘, 크크랩샘 13명 총 14명은 규문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선두로 해 집회에 참여했다. 웹툰 작가가 꿈인 학생에게 부탁한 피켓의 고래 그림은 크크랩 샘들과 집회 현장에서 카메라의 큰 환영을 받았다.(어떤 신문에 나오게 될지 기대 중이다ㅎㅎ 재활용 박스에 적힌 ‘한살림’ 글자로 인해 한살림에서 나왔냐는 질문도 받았다.)
오늘로 일본이 핵오염수를 방류한 지 열흘. 2023년 8월 24일은 지구 역사에 인류가 환경재앙을 가져온 날로 기록될 것이라 생각한다. 꽃이 핀 모습이 담긴 TV모니터와 식물의 어우러짐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공존을 말하고 있는 백남준의 작품 <TV정원>을 마주하고 한 시간 뒤, 우리는 인류 문명이 자연에 가한 폭력의 책임을 묻는 자리에 서 있었다. 후쿠시마 생기 세미나에서 읽었던 책 <후쿠시마>를 보며 원자폭탄 피폭의 아픔을 겪은 일본이 아이러니하게 원자력 발전의 중심 국가가 되고 그 끔찍한 피폭 피해가 하층 계급에게 외주화되고 있는 것을 보고 느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를 겪었지만 일본은 그로부터 배움을 얻지 못했고 12년이 흐른 뒤 더 큰 재앙을 만들어냈다. 이번 오염수 방류로 인한 피폭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모두가 겪는 재앙이 될 것이다.
환경단체, 시민단체, 여러 정당, 시민들이 참여한 집회에서 터져 나온 구호는 정권 규탄 구호가 많았다. 시민들이 준비한 피켓에서 ‘생명의 바다 지켜내자’, ‘바다는 바다의 것’ 등 몇몇 피켓이 있었을 뿐 생태적 관점의 구호나 피켓 문구가 아쉽다는 이야기를 크크랩 샘들과 함께 나누었다. 정권 규탄 구호, 먹거리 문제의 관점에 갇히지 않고 문제 설정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구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들을 공유했다. 오염수가 방류되던 날, 바다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몸부림들이 연상되었다. 절망감에 휩싸인 채 바라만 보는 대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백남준 선생이 말한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심령력, 정신의 힘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고민하고 외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기후위기 강의만 들은 학생들과 강의+행동을 같이 한 학생들의 심령력은 다르다는 것을 작년에 체감했다!)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의 모토를 우리도 잊지 말자! 오염수 방류를 멈출 수 있게 할 때까지.
<뒤풀이에서 오간 이야기들>
- 다음 집회에 쓸 피켓 구호들을 모집해 보자.
- 후속 행동으로(크크랩 혹은 생기세미나?) 해안, 산 등지에서 플로깅을 해보면 어떨까.(저의 생각 덧붙이면, 피켓 구호를 쓴 소품을 들고 플로깅을 하면 어떨지?)
*집회의 내용은 심각했지만 규문에서의 공부와 실천을 선생님들과 함께 해서 기뻤습니다!^^
독특한 퍼포먼스를 한 미디어 아티스트로, 사실은 이름만 알았던 백남준 선생님의 방대하고 깊이있는 생각, 실험과 실천들이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조별토론에서도 이분에 대해 천재고,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 같다는 우상화(?) 비슷한 얘기도 나눴지요.^^ 그렇지만 백남준 선생님 같은 상황에서, 즉 뭐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은 조건에서 우린 과연 뭘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져가면 할말이 없긴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도 오염수 방류 집회 관련하여 크크랩 퍼포먼스를 펼쳤지요. ㅋㅋ 샘들 대부분 집회 구호나 형식 등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의견이었고, 다음번엔 재기발랄한 구호, 깃발 등을 준비하자고 했습니다. 이런 준비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예술적 실험이 아닐까 합니다.😁 저번주 공부한 내용을 너무나 정갈하고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한 후기, 그리고 우리가 집회를 통해 한 발 더 나아가게 한 샘의 심령력 감사해요.😄
조별토론-수업-집회참여가 퍼포먼스라는 키워드로 꿰어지네요 ㅎ 덕분에 집회에 참여하면서 이슈를 실천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운동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대중을 꿈꾸는 크크랩 일원으로서 다양한 논의의 장을 제안해야한다는 사명감도 생기더라구요.
새로운 피켓 구호를 함께 고민해봐요!
예술가들의 그 끝을 모르는 상상력, 그리고 그것을 기어이 세상에 내놓고 마는 집념과 의지를 보면서 나의 자리와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백남준은 한국사람이기 이전에 어떤 국적을 가졌는지가 그닥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서있음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였습니다. 내가 일본인이 아니어서 일본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닌, '나는 내가 아닌것으로 존재하고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말처럼 존재를 전방위적인 차원에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무엇을 행하며 마주치는 것들과 과감히 소통하고 갈등할 수 있는 크크랩 일원이 되어 보아요!
승현샘의 후기를 읽으니 백남준 선생님의 글을 읽은 연장선상에서 우리도 소박하지만 하나의 퍼포먼스를 행했단 생각이 듭니다. 책 내용 중에 우리는 60킬로그램을 움직이기 위해 300킬로그램을 움직이게 하는 아이러니를 행한다는 말씀, 환경오염이 거론조차 되지 않던 시절에 히피들은 벌써 그 걱정을 했다는 말씀 등이 떠오르며... 느끼는 바가 많았네요. 승현샘의 마음이 절실하게 잘 느껴지는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