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을 이어가게 해주는 사람들과의 배움
후기를 쓰려고 책과 조원들이 써냈던 과제를 다시 읽었다. 다시 읽고 있자니 조원들이 지난 시간에 나를 이해시키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싶다. 근거도 없고 맥락도 없는 질문에 참 난감했을 것 같다. 지금도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때 내 상태는 말해 무엇하랴. 지난주에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강의를 들었건만 여전히 많은 말들이 겉돌아 답답함을 넘어 불쑥 화가 난다. 이런 감정이 비단 무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미나와 강의의 시간을 통과했음에도 칸딘스키와 거리가 확 좁혀지지 않는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조원들이 제법 있었는데 나는 칸딘스키 작품이 생경해서 묘하게 불편하다.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낯선 것이 ‘정신’이란 말이었는데 왜 갑자기 예술활동에서 이 ‘정신’이 불거져 나왔는지 의아했다. 이렇듯 아는 것은 없고 정서적 거리감은 먼데다 갑작스레 던져진 ‘정신’이라는 말의 생경함으로 칸딘스키를 만났다.
‘무엇’과 ‘어떻게’ 그리고 ‘내용’
‘무엇’을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는 없어지고,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29쪽)
조원들과 칸딘스키가 말하는 ‘무엇’과 ‘어떻게’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이 문장은 ‘물질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예술활동이 펼쳐지는 시대를 비판한 문장이다. 물질적인 목적이라고 했을 때 물질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원들 사이에서 물질이란 말은 시대와 연관되어 있었던 듯 하다. 18세기 혁명과 자본주의의 도래 그리고 전개, 1차 세계대전을 몇 년 앞둔 전운(이 책이 1912년에 쓰여졌다)등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사물성 같은 것. 이 시대에 예술가들에게 ‘무엇’이란 ‘변하지 않고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인 대상’이었다. 변하지 않는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인 대상이라면, ‘무엇’을 표현했느냐의 문제보다 ‘어떻게’ 표현했느냐가 중요해진다. 칸딘스키는 ‘무엇’이라는 것을 상실한 채 ‘어떻게’에만 천착하게 하는 예술활동이 물질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동한 것이라고 본 것 같다. ‘예술을 위한 예술’로 드러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차원인지는 예술사의 맥락에서 좀더 살펴볼 문제인 것 같다.
이런 ‘무엇’을 상실한 채 ‘어떻게’에 천착하는 예술과는 다른 ‘무엇’과 ‘어떻게’의 관계를 칸딘스키는 제안하고 있다.
이 ‘무엇’은 예술만이 포괄할 수 있으며, 예술만이 적절한 자기 고유의 수단을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31쪽)
‘무엇’은 ‘내용’에 해당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뜻 보면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내용에 해당하는 무엇은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사고했던 ‘무엇’보다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조원들은 ‘무엇’과 ‘어떻게’가 별도로 성립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예술가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어떻게’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요소이며 이 두 가지는 상호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일반적으로 ‘그림’은 변하지 않는 물질의 형태를 ‘대상’이자 내용으로 삼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대상을 표현했다고 여겨지는 그림을 보면서 대중은 ‘흥미롭군, 훌륭하군’이라는 감상평을 말하면서 지나간다. 그런데 우리가 작품에서 보는 것, 보고자 하는 것이 그려진 ‘꽃, 동물, 컵’인가, 각각의 예술작품에서 차이를 느낀다면 개개 사물을 표현한 기법에서만 기인하는 걸까. 우리가 본 ‘무엇’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느끼고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적인 힘’이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예술가의 감정을 예술작품을 매개로 감각하고 우리의 감정이 동하는 것을 경험한다. 예술가는 내적 차원의 ‘감정적인 힘’을 적절한 자기 고유의 수단을 찾아 작품의 외적 형식을 구성하는데 그것이 ‘어떻게’의 차원이다. 우리는 예술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고유한 수단으로 외재화 한 것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총체적인 것을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신’과 ‘영혼’
좀더 들어가서 칸딘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이 ‘무엇’이란 무엇일까. 조별 토론에서 나온 말들을 소개하자면 우주적 원리와 같은 진리, 사물에서 느낄 수 있는 정신이나 영혼성과 같은 생명력, 예술가 자신이 느끼는 내적 정동, 시대정신과 맞닿은 개인의 정서, 내적 필요성이나 추구하는 바 같은 것이었다. 채운샘은 이 무엇이란 ‘영혼’에 가까운 말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영혼이란 말에 대한 감각이 생소하다. 강의 중에 ‘BLAUE REITER’이라고 쓰여진 책의 표지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그 한쪽에는 푸른색으로 칠해진 말과 올라탄 사람이 그려있었다. 책의 표지에 쓰인 ‘청기사(BLAUE REITER)’는 칸딘스키가 활동한 그룹의 명칭이기도 한데, 여기서 ‘REITER’은 ‘중세시대 기사를 대체하는 16세기에 새롭게 출몰한 기병’(위키백과)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칸딘스키가 사용하는 ‘정신’을 중세시대의 ‘영혼’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칸딘스키는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우호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을 획일적으로 가두고 물질적인 힘과 시스템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 바라보았던 듯 하다. 칸딘스키에게 ‘중세’란 이런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 르네상스 이전 중세의 도식과 추상성은 그에게 현시대와는 결이 다른 이전 세대의 ‘상이한’ 힘으로 작동했다. 중세에서나 등장할 법한 ‘영혼’이 칸딘스키에게 중요했던 ‘정신’과 닿는다면 이런 맥락일 것이다.
후기를 쓰다 보니 칸딘스키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나의 질문과 접근 방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무엇’과 ‘어떻게’가 무엇인지 말 그대로 정의를 내리고 싶어 안달했다. 그를 단번에 알 수 있을 거란 착각이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다양한 퍼즐들과 맥락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퍼즐들을 얻기 위해 조원들이 쓴 과제를 다시 살펴본다. 칸딘스키는 왜 정신에 천착했는지, 용법의 변화란 예술장르를 구성하는 요소인 ‘단어, 음, 색’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볼 것인지, 정신적 삼각형에서 전진과 상승이라는 운동성을 보이는 정신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봐야 할지, 예술가의 감정에 우리 대중은 잘 조응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능한지 등을 묻고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재현’에 대별되는 ‘추상’을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도 있었고, 고도의 감각을 지닌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서 오는 소통의 가능성과 소통이 가능하다면 그 소통이란 무엇인지 묻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질문과 맥락에 잘 닿지 못한다. 이 조각들을 이해할 수 있을만한 처지가 아닌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안모르는 것처럼 쓰려니’, 에효...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게 여러 가지로 힘들다. 아는 것 중에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어찌 표현해야 할지도 몰라 어렵다. 조원님들, 안개가 걷히지 않은 듯 여전히 답답합니다요. 돌아오는 주도 잘 부탁드립니다.^^
겸손한 경희쌤 !! 멋진 후기 달만 써 주셨구만 뭘 그러세요. 왜 청기사파였을까 궁금했었는데 중세의 기사 정신에서 가져온 개념이라는게 새로웠어요. 무엇과 어떻게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인줄 미처 몰랐죠. 우린 항상 그래서 그게 뭔데? 딱 하나로 정리 되는 답을 구하는 습관이 있는걸 매번 깨닫게 됩니다. 근데 이번주는 완전 안드로메다로 날아갈것 같아요. ㅋㅋㅋ
경희쌤 ! 수고 많으셨어요.
ㅎㅎ 모름의 대잔치 ᆢ공부란 모르는 맛을 즐기는 것이라고 저는 결론내렸답니다. 그랬더니 쌈박하게 요약하는 앎이 그리 달갑지않게 느껴졌어요. 왜냐면 수수께끼가 금방 풀리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무엇'을 안다는 게 뭘까, 생각해보면 대부분 동어반복을 앎이라 생각지 않았나 싶네요. 이를테면 학생이란? 배우는 사람, 선생이란? 가르치는 사람 이렇게 답하면 그게 아는 걸까? 따지다보면 여지없이 미궁에 빠지게 되죠. ㅎㅎ
샘들과 중구난방 떠드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ᆢ샘들도 나이들어보시면 이게 지복이라는 걸 아시게 될겁니다 후훗
모르는 걸 바로 해결해야 하려고 이것저것 찾아보는 게 오히려 사유를 이끌지 못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 모름이 있어야 같이 얘기를 나구고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칸딘스키의 글은 우리가 모름을 잘 견디고 모름을 품으면서 같이 이를 나누기에 좋은 텍스트인데요. 그만큼 이해하기 쉽지 않는 거겠죠? ㅎ 3조에서 나눈 '무엇'과 '어떻게'에 대해 저희조에서도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요. '무엇'과 '어떻게'도 맥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고 얘기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네요. 그 동안 공부하면서 '어떻게'에 중점을 두었는데, 칸딘스키의 글을 통해 '무엇'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에서 나눈 얘기와 샘의 공부에 대한 마음을 잘 정리한 후기 감사해요.👍👍
재밌게도 세 조 모두 무엇을과 어떻게의 문제에 꽂혔던 거 같아요. 2조도 이 문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끼리지만 열심히 머리를 맞대 보았는데 뾰족한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그 과정 자체가
공부였단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채운 샘께서
우리 공부에 때론 망각이 필요하기도 하다라는 말을 새겨보며.. 우리가 가진 수많은 전제들을 잠시 내려 놓고 텍스트에 흠뻑 빠져보는 감각체험을 위해 어쩌면 이 망각의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하진 않을까.. 스스로 다짐해보아요~~ 샘의 고뇌가 뿜뿜 느껴지는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칸딘스키의 "예술에서 정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을 때 우리가 살면서 예술 뿐아니라 어떤 선험적인 것, 추상적인 것들을 얼마나 사유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대상을 염두한 구체적이고, 구상적이며 물질적이이서 정신의 세계의 접근이 그만큼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경희쌤 말처럼 모름을 부딪히는게 그 세계에 빠져보는게 예술에서의 정신세계를 들어가는 첫 관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번 챕터도 정말 미치도록 모름으로 가득차 시험에 든 기분이지만 과감히 빠져 보겠습니다!! 다들 토요일에 모름의 물건 한장 들고 만나요~~
답글을 안달수없는 댓글이네요 ㅎㅎㅎ
미치도록 모름으로 가득찬 텍스트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칸딘스키~~나빠!!ㅎㅎ
모름의 물건을 들고 매주 토욜 신비한 실험실에서 만나는 중세 청기사들이 연상됩니다.
쌤 후기를 보니, 열띤 토론 시간이 다시 생각나네요. 쉽게 납득해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본질을 고민하는 선생님의 문제의식 덕에 저희도 쉽게 내려버린 답을 재고하며 즐거운 모름의 세계로 빠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도 함께 머리를 맞대며 뭐라도 만들어내봐요 ㅎㅎ
저도 매주 겪는 이 '모름'의 문제를 경희샘의 진심을 담은 후기글로, 다른 샘들의 애정 어린 댓글로 읽으니... 저까지 위로가 됩니다(´▽`ʃ♡ƪ)
모두 이 모름을 겪고 있지만ㅎㅎ, 이건가? 저건가? 고민하고 또 다른 이들의 질문 덕분에 배움을 이어갈 수 있으니... 어쩌면 '배움'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모름으로부터 앎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름의 미궁으로 빠지는 배움에 동참하고 있는 크크랩 팀원들에게 힘을 얻고 갑니다!!!
우리 모두 모름의 기쁨 속에서 파이팅해여~~~o(* ̄▽ ̄*)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