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차 강의 정리]
지난 시간에 바실리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초반부를 읽었습니다. 바로 앞서 읽은 이우환 선생님의 글이 내용의 깊이감에도 불구하고 워낙 쉽게 읽혔기 때문인지 이번에 칸딘스키의 글이 특히 더 어렵게 느껴졌는데요. 모르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보니 그래도 큰 줄기 하나는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바로 ‘정신성’인데요. 지난주까지 읽었던 이우환 선생님이 미술에서의 추상회화를 신체성의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과 달리, 상대적으로 칸딘스키는 정신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신성이란 어떤 것일까요?
-인상주의의 영향
먼저 채운 선생님께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인상주의는 빛에 의해 견고해 보이던 사물들이 해체되어 가는 것을 포착하였죠. 모네의 해돋이가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렸으나 그 조짐은 관념적인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쿠르베에서부터, 더 거슬러서는 빛이 사물들의 표면을 훑고 지나가며 그 표면 효과에 주목했던 17세기의 벨라스케스의 회화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즉, 인상주의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내 눈에 비친 시각적 진실을 그립니다. 저는 빛이 사물들을 비출 때의 반짝임과 그림자들이 내는 형상들을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특히 오전 8시경에 계절마다 달라지는 빛의 질감과 색, 공기의 농도 등을 가만히 느껴보면 매우 신비롭습니다. 채운 선생님은 빛은 사물들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고 말씀하셨죠. 화가들은 이런 빛을 관찰하면서 그것이 대상들을 어떻게 드러내고 감추는지, 빛에 따라 사물들은 어떻게 자신의 견고함을 잃고 해체되어 가는지에 주목했습니다.
인상주의가 추구했던, 시각적 진실로 객관적 세계를 해체했던 문제를 좀 더 극단까지 밀고 나갔던 화가는 조르주 쇠라인데요. 쇠라는 인상주의 그림들이 반응적 쾌를 불러일으키지만 너무나 빠르게 화면에서 흩어져 버리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며 색과 관련된 화학 분야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색채 원리, 보색 관계 등을 통해 인상주의자들이 포착하는 망막적 진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탐구하게 되죠. 그의 그림은 그러한 탐구 과정을 통해 탄생했는데요. 예를 들면, 우리 눈에 보라색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보라색이기 때문이 아니라 빨강과 파랑의 빛이 재구성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죠. 마치 이와 같이 쇠라는 사물들을 색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Georges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1886, 207.5 × 308.1 cm
쇠라는 형태들을 구조화하기 위해 아주 많은 부분 스케치를 하였고 그 부분들을 색채로 분해하여 재구성하는 과정을 하였는데 그 결과, 멀리서 보면 쇠라의 그림들은 각 형상들이 매우 견고해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수많은 색들의 점에 의해 해체되어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의 극단에서 그것을 넘어간 쇠라의 시도는 이후 입체주의를 등장시킨 피카소에게 영향을 줍니다.
이처럼 대상들은 해체되고 카메라 등의 기술과 더불어 불확정성의 원리, 상대성의 원리 등의 과학의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하던 19-20세기는 그 이전 자연이 스승이던 시대를 떠나, 기술과 기계가 삶을 유토피아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던 시기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화가들은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그려야 할까? 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좀 더 살펴볼, 다다와 미래주의는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등장했습니다.
-칸딘스키의 ‘정신성’ (feat. 신지학 & 음악)
한편, 러시아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 사회주의가 들어섰습니다. 칸딘스키는 인간을 획일주의로 가둔다는 생각에서 여기에 그렇게 우호적이진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는 대신 중세로 눈을 돌리며 이 시대의 문제의식을 넘어갈 자양분을 얻습니다. 칸딘스키의 ‘청기사그룹‘은 중세적인 것의 탐구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것들에 주목하며 중세적 감성과 도식적 형태들에서 상징과 추상의 가능성을 착안합니다.
또한, 당시 ‘신지학‘이 크게 떠올랐는데요. 신지학은 물질과 신체의 에너지를 모아 영적인 방식으로 승화시키는 것, 즉 ‘영성’을 지향하는데요. 채운 선생님께서는 물질주의가 정점인 오늘날만큼 영성, 요가, 명상 등의 ’마음’의 문제가 각광받는 시대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당시의 신지학도 그런 의미에서 주목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신지학은 유럽인들의 식민지 건설 당시 인도 힌두 경전인 ‘베다‘와 중국의 도교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말레비치는 도덕경에 큰 영향을 받았죠. 예전에 과학 세미나를 할 때 양자역학 해석의 한 갈래였던 코펜하겐 학파의 닐스 보어가 주역에 심취했었다는 비화를 듣기도 했었는데요.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분야들이 이렇게 영향을 받는 것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채운 선생님은 칸딘스키가 주목하는 정신적인 것은 신지학이 추구하는 ‘영성‘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조별 토론 중에, 칸딘스키에게 자신이 대중을 선도한다는 일종의 특권의식이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여기에는20세기 초 아방가르드들은 예술가 자신들이 담론을 스스로 형성해 나가며 대중들을 이끌어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배경도 있습니다. 당시 버지니아 울프 등이 속한 블룸즈버리 그룹이나 랭보와 말라르메 등이 주축이 되었던 상징주의 그룹 등은 당대의 과학이나 철학적 탐구를 함께 하였는데요. 당시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공유한 이러한 지적 탐구를 각자의 예술에 녹여내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영적으로 고양되길 소망했습니다.
Wassily Kandinsky, Composition IV, 1911, 159.5 × 250.5 cm
Wassily Kandinsky, Composition VIII, 1923, 140 × 201 cm
칸딘스키에게 그림은 일종의 매개로 예술가의 영적 감정을 관객과 공유함으로써 관객을 특정한 정신적 고양으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즉, 음악이 주는 정서적 고양감을 회화에서 구현하고자 하였고, 음악이 화성론에 의해 악보로 펼쳐지듯, 회화 역시 화면 구상의 논리를 가지고 ‘작곡‘(compose) 되길 바랐습니다. 1900년대 초의 형상성은 1910-12년 피카소 등이 시도한 종합적 입체주의(분석적 종합주의)에 의해 분해와 재구성이 가능한 방향으로 기울었고 칸딘스키는 이러한 경향 속에서 음악적 방향으로 회화에서의 화성론을 구축하고자 하였습니다. 색에 대한 언급이 많았는데, 칸딘스키에게 색은 저마다 코드를 가지고 형상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며 화면에 운동성을 자아냅니다. 따라서 음악을 들을 때 그 진동을 듣는 것처럼, 칸딘스키에게 회화를 체험하는 것은 그러한 화면의 운동성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고흐
지난 시간에 이어 고흐의 그림을 좀 더 살펴보았습니다. 고흐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그 시선이 매우 독특한데요. 어느 위치에서 보고 그렸는지 모호한 가운데 그 시선의 독특함으로 인해 그림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도 줍니다. 또한 고흐는 하늘이나 들판, 또는 인물 역시 매번 다르게 표현하였는데요. 이는 빛이 우리에게 동일한 소재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해주는가를 느끼게 하며, 인물들은 그들이 가지는 감정 상태와 그들과 고흐의 관계, 그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변주되어 나타남을 보게 합니다. 이로써 고흐는 사물에 대해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하는 지점들, 마치 어떤 사람이 내게 남들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포착될 때의 일렁이는 감정을 일깨웁니다.
Vincent van Gogh, Enclosed Field with Rising Sun, 1889, 71 × 90.5 cm
Vincent van Gogh, Starry Night Over the Rhône, 1888, 72.5 × 92 cm
Vincent van Gogh, Starry Night, 1889, 73.7 × 92.1 cm
Vincent van Gogh, Portrait of Madame Roulin, 1888-1889, 91 × 72 cm
Vincent van Gogh, Sunflowers, 1889, 95 × 73 cm
-세잔의 공간
끝으로 세잔의 그림 몇 점을 더 보았는데요. 세잔의 정물화는 그 시점의 뒤섞임으로 인해 정지된 것 같으면서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이후 등장할 입체주의를 예고합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붓질을 통해 탄생한 사과는 더 이상 우리가 ‘사과‘라고 명시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햇빛과 바람과 공기 등의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와 더불어 시간의 지속 속에서 응축된 에너지를 뜻합니다. 수행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세잔이 그러했듯, 우리가 무엇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평소에 그 사물의 즉각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보았던 시선이 물러나면서 지금 마주하는 것과 나 사이에 새로운 긴장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즉, 눈앞에 놓인 사과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사과가 아니게 되는 차원이 열리며, 그 때 그 사과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일 때, 그것의 새로운 ‘기호‘가 떠오릅니다.
세잔이 공간을 다루는 방식도 이와 같은데요. 세잔에게 어떤 시공간은 사물의 배경처럼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놓인 사물들이 공간 자체를 구성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즉 공간은 선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관계에서 출현하는 에너지에 의한 공간‘화‘의 산물입니다. 이는 화면의 내재적 공간을 탐구한 ’추상‘의 씨앗이 됩니다.
Paul Cézanne, Still Life with Apples and Pears, 1891-1892, 44.8 × 58.7 cm
Paul Cézanne, The Card Players, 1894-1895, 47.5 × 57 cm
[4주차(8/5) 공지]
1.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끝까지 읽으시고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8/4일 (금)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2. 4주차 간식, 정리, 후기는 1조 동주샘, 2조 순이샘, 3조 신우샘께 부탁드립니다~
그 동안 '신체성'에 초점을 맞춘 철학자, 예술가의 글을 읽다보니, '정신성'을 말하는 칸딘스키의 글이 무척 관념적인라는 생각이 들었고, 샘들도 더 어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망각의 능력'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읽고 있는 텍스트에 집중하고 이 책에서 말하는 걸 잘 보라고 하셨는데요. 칸딘스키가 어떻게 추상의 길로 갔는지, 왜 예술에서 정신성을 얘기하게 되었는지 잘 봐야할 것 같아요.^^ 전 음악을 회화로 구현하려고 했던 칸딘스키의 글과 그림이 흥미로웠는데요. 그는 색채마다 코드를 부여하고, 이를 작곡하는 것처럼 회화를 구현했지요. 굉장히 추상적이면서도 실재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칸딘스키의 그림이 악보라면 관람객이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다른 음악이 흘러나올 거 같습니다.
그림과 함께 핵심적인 내용을 정성스럽게 담은 후기 감사하고, 아름다운 그림들과 함께 눈이 호강했습니다.😊😉
크크랩 공용 구글 드라이브에 업로드 안 된 그림까지 꼼꼼하게 찾아 첨부해 주셔서 주영샘 말처럼 눈이 호강~~ㅎㅎ 늘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
이번 칸딘스키 글에서 음악 용어가 많이 나와 그 용어들을 찾다 재밌는 걸 발견했는데... 음악하시는 분들은 회화를 묘사하듯 화음을 설명하더라고요.
음악에서는 그런 설명이 이해가 됐는데... 칸딘스키의 추상에서 음악적 체험은 좀 어렵... 역시 눈과 귀의 망각의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상화를 그릴 때 "마음으로 그리고 마음을 그린다" 라는 반 고흐의 말처럼, 그림이든 사람이든 마음으로 보는 법을 배워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