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책을 여러 번 읽었고 말할 내용이 머릿속 가득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이야기 꺼내야 할 지 감도 안 잡히는 경험은 참 당황스럽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잦은 결석도 있겠지마는…) 칸딘스키의 사유에서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제 머릿속에 너무 우직하게 자리를 잡는 바람에 다른 문제가 잘 정리가 안 되는 거 같아 거리를 두고 차분히 써봅니다. 매번 ‘내가 이만큼이나 몰랐구나…’를 떠올리는 장소가 규문인 거 같습니다.
1. '정신적인 것'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신적인 것’이란, 예술에서의 ‘물질적인 것’ 즉, 드러나는 양식, 기법과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표현의 문제에서 ‘무엇을?’에 해당되는 지점이나, 그것은 서사도, 주제(권선징악)도, 대상 재현(이것은 A이다.)도, 언어로 환원된 작가의 의도도 아니라, 예술가가 예술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시대로부터의 느낌, 감정적인 힘입니다. 책에서는 정취(Stimmung)라는 단어로도 그것을 설명하고 있네요.
칸딘스키는 정취를 ‘essential spirit’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Spirit은 작년 4학기 수업 텍스트에서 등장했던 ‘심령체험’에서 ‘심령’이 번역될 때 사용된 단어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마음, 정신을 넘어, 사물로부터 느껴질 수 있는 어떤 영적인 존재감, 생기까지도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산에 쌓인 돌탑을 함부로 부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처럼, 때로는 어떤 맥락안에 놓인 사물이 사물 너머의 존재감을 발현할 때가 있는데 그 때의 기운, 정신성을 일반적으로 sprit이라 번역한다고 합니다. 칸딘스키는 이 단어를 예술작품 차원에서 사용하여, 작품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에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정신적 고양의 상태를 집중한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외에도 Mind는 의식, 지성적인 차원의 마음을 번역할 때 많이 사용되고, Soul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주로 사용되어, 몰락하는 신체와 반대되는 영원불멸한 어떤 정신을 가리킵니다.)
2. 정신적 생활의 구조와 대중
"미래의 영역으로 이끌어가는 정신은 단지 감정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예술가의 재능은 이 감정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p.36)
많은 미학자들이 언어의 규정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예술의 영역에 세우고, '이것이 에술이다.' 혹은 '이것이 예술에서의 좋음이다.' 라는 선언을 합니다. 그러나 칸딘스키에 따르면 그들의 울타리는 늘 예술의 뒷편에 세워질 뿐이었습니다. 새로운 에술은 이해받지 못하고, 예술의 규정을 깨면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문장이 이해가 되었는데요.
칸딘스키는 정신적 생활을 예각삼각형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가장 높은 정점에는 엄청난 통찰력으로 시대의 기류를 읽는 소수의 사람(예술가)이 외롭게 서있을 뿐이며 대중들의 정신을 끌고 전진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삼각형의 변은 위대한 예술가가 서있던 지점까지 도달합니다. 예술가는 십계명을 받은 모세의 외침(시대 ~ 미래의 영역)을 일찍이 알아듣고, 금송아지 주위를 춤추는 사람들(대중)에게 자신이 들은 ‘무엇을’(정신적인 것, 시대로부터 일찍이 포착한 기류, 정취.)을 대중들을 향해 ‘어떻게(양식, 기교, 그림의 내적 논리)’ 명령하고 전달할지를 고민할 뿐입니다. (p.30 비유) 그럼 이 경우에는, 예술에서 ‘어떻게’ 라는 것은 ‘무엇을’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므로 분리할 수 없으며, 예술가의 감정적인 힘이 ‘어떻게’를 압도하는 예술이 탄생합니다. 이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 물질과 형식만이 빈곤하게 드러나는 예술과는 분명 다르다고 칸딘스키는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칸딘스키의 이 표현이 예술가의 재능을 대단히 특권화하고, 계몽주의적인 어조로 읽혔습니다. 정신에 우열을 나누고, 대중은 이미 타고난, 그 ‘천재’ 예술가들을 이해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고정해버린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문단이 계몽주의로 이해 되기에는 칸딘스키가 말하는 예술가들이 ‘대중을 일깨워야겠다.’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셨으며, 대중의 변화에 대한 칸딘스키의 태도 또한 이 구절만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크크랩에 모인 이유 또한 높은 정신적 생활을 바라는 맥락으로 이해된다면, 칸딘스키의 이야기가 채운 선생님의 수업과 연결되는 지점들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크크랩은 꾸준한 공부와 훈련을 통해 높은 정신적 생활에 가닿을 수 있다는 전제가 덧붙여지겠지요.
3. 칸딘스키의 작업 방식
(뒤집어서 보았을 때 인상 차이가 생각보다 더 크게 나서 놀랐습니다. 원작의 구성이 얼마나 철저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 지가 느껴졌네요.)
칸딘스키의 그림은 르네상스 이후, 재현을 목표로 했던 그림들과는 달리 규칙이 없고 자유로워 보였는데요. 그래서 즉흥적으로 작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채운 선생님께서는 칸딘스키의 작업이 마치 음악에서의 화성학을 정립하는 방식과도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음악이 감상자에게 정신적 고양감을 주기 위해서는 수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한 내적 논리를 익혀야 하는 것처럼, 칸딘스키 또한 자신의 작업을 기본 단위로 나누고 논리화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색상과 형태가 주는 인상을 코드화하고, 그것을 ‘작곡하듯이’ 조율하고 종합한 습작들을 그려냈다고 전해집니다. 때문에 그의 그림에는 ‘코드를 따라가고 외부성을 차단하느라, 회화의 본질이 결여되었다.’라는 비판도 있었다고 하네요. 회화의 본질에 가닿기 위한 칸딘스키의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역으로) 회화의 본질을 결여한 것으로 읽혔다는 점에서, 예술에 있어서 규정의 문제를 다시 떠올려봅니다. 예술이란 모두에게나 '예술적일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 참 중요한 거 같습니다.
칸딘스키의 글이 정신성을 강조한만큼 그의 그림처럼 굉장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정신성은 예술가의 감정이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물질적인 것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지요. 회화를 자신의 내적 논리를 통해 구현하고, 색채언어와 형태언어 등으로 무한한 조합과 배치를 통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재현샘이 마지막에 언급한 바와 같이 회화의 본질에 가기 위한 칸딘스키 방식이 오히려 회화의 본질을 결여한 것으로 보일 수 있듯이 각자 예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네요.^^ 칸딘스키의 어려운 글 덕분에 조별 토론은 오히려 풍성해진 느낌이고요. 샘의 공부에 대한 소회와 함께 2조에서 나눈 심도 있는 애기를 잘 정리한 후기 감사해요.😊😉
조별 토론에서 잘 정리되지 않았던 질문들이 제현샘께서 후기로 구체화되면서 텍스트가 보다 촘촘히 다가옵니다. 저는 칸딘스키가 예술가들을 정신적 삼각형의 상단에 위치시키고 대중을 이끈다는 생각이 우월적 태도라기보다는 예술을 매개로 대중의 감정과 창작자의 감정을 교통시켜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 어떤 촉발적 힘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읽혔습니다. 특히 이번주에 읽은 부분에는 예술가의 권리와 의무 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그런 책임감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샘의 고민들과 조별 토론 내용 꼼꼼하게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