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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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그가 어떤 논리와 생각을 기반으로 작업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었습니다. 직전에 읽은 이우환 선생님의 작업론하고는 방향과 결이 달랐는데, 동양적인 사고를 우리와 공유하며 만남과 울림, 신체성과 관련된 내용을 유려하게 쓴 이 선생님의 글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은 나머지 우리는 그를 떠나보내지 못했지요.^^ 이럴 땐 망각의 능력이 필요한데, 우린 이우환 선생님의 렌즈를 어설프게 가져다가 써서 칸딘스키와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내적 필연성으로 요약되는 지적인 그의 작업 논리, 위대한 정신성의 강조 등을 잘못 해석하면, 칸딘스키가 현실을 떠나 이데아의 세계로 간 초월주의자나 극도의 관념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술가의 감정을 중시했고, 구성할 때 이성, 의식, 의도, 합목적성 등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고 봤지만, 이 때에 무엇을 결정하는 건 언제나 감정이라고 말했는데요. 예술가는 그의 영혼 속에 있는 감정을 예술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람자에게 유사한 감정을 환기시키는 자입니다. 이 감정을 내적 논리에 의해 구현하여 작품을 만들고 이를 통해 정신성을 고양시키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예술이 굉장히 감성적, 직관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칸딘스키의 접근법은 매우 지성적이어서 흥미로웠습니다. 감성이 풍부하고 남들이 못 보는 것만으로 예술이 충만할까요?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손은 지성이 잠자고 있는 직관의 잠재성을 일깨울 수 있다고 얘기했는데, 칸딘스키의 지적, 논리적 작업은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예술의 작업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칸딘스키는 음악을 들으며 색을 보는 공감각을 체험했고 추상형식으로서 음악과 회화는 서로 전환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이며, 구상과 실현이 모두 화가에 의해 가능하고, 소유에 유리한 측면이 있는데 그런 만큼 물질주의에 휘둘리기가 쉽지요. 존 버거의 예술론인 <풍경들>의 2부 24번 글인 “지금의 예술과 사유재산”에서도 잘 보여주듯이 미술작품은 정신화된 소유물이며, 소비사회라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시각예술은 사람들에게 황홀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예술가들조차 “무엇이 미술작품을 예술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함으로써 예술을 창조하는 과정과 예술의 기능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사유재산으로서의 예술의 역할을 지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요. 예술에서 정신성을 중시한 칸딘스키는 회화의 본질이 그려진 것 안에 존재하지만, 이것에 환원되지 않은 것에 있다고 봤기에 비물질적인 특성을 갖는 음악의 모델을 가져옵니다. 음악은 작곡가와 연주자가 분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음악은 연주자에 의해 실현되지 않으면 음악이라고 볼 수 없지요. 즉 음악은 작곡가의 소유가 될 수 없고, 연주는 시간이 흐르면 멈추기에 저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녹음이나 녹화를 통해 전달될 수는 있지만, 유튜브를 통해 집에서 듣는 것과 현장에서 연주를 직접 듣는 걸 똑같다고 말할 수 없는 측면에서 연주는 비물질적입니다. 또한 음악은 코드화, 화성의 구성 등 조직화가 필요한데, 그림은 조직화하지 않고도 구현 가능합니다.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감명을 받고 <즉흥 19>를 그리기도 했는데요. 그는 색채와 형태를 음처럼 코드화하고 작곡하는 것처럼 작품을 구현했습니다. 작품명도 인상 1, 즉흥 3, 구성 7 등으로 음악의 소나타 1번, 교향곡 3번과 유사한 방식이네요. ‘사과’를 그린다면 눈앞에 사과를 가져다 놓고 묘사하면 될 듯한데, ‘사랑’ 또는 ‘분노’를 그리라고 한다면, 우린 어떻게 표현할까요? 각자의 개념, 표상 등에 기반하여 사랑을 나타내는 걸 그리려고 하겠죠. 음악은 대상화를 할 수 없기에 ‘사과’나 ‘산’을 재현할 수 없는데요. 다만 ‘사과’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 ‘산’을 통해 발생한 진동과 기운을 추상화하여 전개할 수 있지요. 칸딘스키는 대상의 음향은 추상의 음향을 돕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직접 손상을 입히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잘 생각해보면, 대상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색채가 뿜어내는 힘들, 형태가 만들어내는 리듬을 잘 보지 못합니다. 칸딘스키는 모든 음은 평등하다고 주창한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는 쇤베르크의 낯선 불협화음 음악에서 자신이 고민했던 추상회화의 길을 찾고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날의 감동은 작품 <인상 3>에 잘 드러납니다. 참고로 쇤베르크는 음악의 조성이 없는 무조음악(Atonal music)의 창시자인데요. 무조음악이란 음악의 시작과 중심이 되는 으뜸음과 화음들의 일정한 음악적 관계를 다 없애면서, 한 옥타브의 12개 음들을 일정한 순서로 동등하게 배열하여 악곡을 구성하는 ‘12음 기법’으로 곡을 쓰는 것입니다. 쇤베르크는 12개 음을 수열처럼 계열화하고 모든 음이 평등하기에 12개 음을 다 활용한 후에 다시 12개 음을 배열합니다. 이처럼 음표를 배열하듯이 칸딘스키는 색채언어와 형태언어를 배치합니다. 그는 작업을 통해 회화의 내적 논리를 만들었는데, 조별 토론 시간에 수많은 가지를 뻗어나갔던 내적 필연성은 작품의 내적 논리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칸딘스키의 작품은 철저하게 내적 논리에 기반한 것이며, 색채, 형태라는 코드를 통해 구성되어 있고 엄격하게 조직되어 통제된 결과입니다. 한편 다음 주에 만나게 될 클레도 칸딘스키 못지않게 자신의 작업 논리에 철저했는데요. 클레의 노트북을 보면 그가 수학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하네요. 그러나 클레는 칸딘스키처럼 정해진 코드를 엄격하게 따르기보다는 더 유연하게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클레의 작업 논리는 다음 주 수업교재인 <현대미술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파악해보아요.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19, 1911>
<바실리 칸딘스키, 인상 3, 1911>
1900년 파리 세계 박람회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와 위치를 차지하는 이벤트입니다. 이 박람회는 지난 세기를 기념하고 다음 세기를 향한 발전을 가속하자는 의미에서 열린 박람회였고, 수 많은 기계와 발명품, 건축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아르누보’ 건축 양식, 대관람차, 디젤 엔진, 유성영화, 에스컬레이터, 텔레그라폰 등이 등장했지요. 물질문명, 기술발전 등에 한껏 도취하여 기계를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기대가 형성된 시기였습니다. 예술 사조에서도 기계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있었는데요. 다다이즘과 미래주의입니다. 먼저 다다이즘을 살펴보면, 다다이스트들은 기계의 작동 방식에 주목합니다. 기계는 무엇과 어떻게 접속하느냐에 따라 기능이 달라지는데요. 칼은 채소나 고기와 만나면 요리 도구지만, 사람을 찌르면 무기가 되는 것처럼요. 다다이스트들은 무엇이 본질적인 뜻을 내포하기보다는 이것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발생하는 점에 주목합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뒤샹의 <샘>, 미술관에 놓인 변기가 이를 잘 설명해주는데요. 변기 자체에 의미가 내재한 것이 아니라 변기가 미술관에 놓이는 배치가 의미를 생산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억압으로 작용했던 기존의 우상들은 무너지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판이 형성됩니다. 아울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배치와 구성이 중시되면서 구성주의가 태동하고, 몽타주 기법이 선호되었죠. 뒤샹 이후 콘셉트(Concept) 자체가 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는데요. 콘셉트는 잉태라는 라틴어 콘셉티오(Conceptio)에서 나왔습니다. 이질적인 걸 품는 잉태를 고려하면, 콘셉트는 나 혼자서, 개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타자를 마주치고 이질적인 것을 접하여 이것들을 품으면서 탄생하는 것이 콘셉트지요. 쓸모없고 무용한 파편일지라도 이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 다다이즘은 우상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허무주의로 갈 수도 있지만, 뭐든 할 수 있는 판을 형성한 만큼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지점으로 이끕니다. 다다이스트 자체는 특별한 작품을 구현하지 못했다는 평이 강하지만, 배치나 구성의 중요함을 본 지점, 기존 예술에 관한 질문과 해체 등은 이후 현대미술이 꽃피우는 데 밑 거름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한편 다다이스트들이 모이면 항상 웃음소리가 들렸고, 집단으로 움직이며 선언문을 발표하고 전시를 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네요. 크크랩 샘들, 우리도 모이면 그 누구보다도 잘 떠들고 웃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1912>
<마르셀 뒤샹, 샘, 1917>
두 번째로 미래주의입니다. 전쟁에서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다다이스트들과 달리 미래주의자들은 기계의 세상을 유토피아로 봤고 실제 전쟁에도 참여를 많이 했습니다. 미래주의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만 지속된 이유가 미래주의자들의 전쟁 참여에 따른 희생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요.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가 제창한 예술운동인 미래주의는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고 근대문명이 낳은 속도와 기계를 찬미하는 걸 본령으로 삼았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은 기계의 속도를 찬양하며, 속도가 가져오는 힘, 운동, 충돌, 모험을 지향했지요. 그런 만큼 미래주의자들은 전쟁을 세상에서 유일한 위생학이라고 찬양했고 실제 전쟁에 참여합니다. 이들은 속도와 운동 자체를 화복에 그리고자 했는데, 시점을 고정하지 않고 다 시점, 복수 시점에 의해 대상의 움직임을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미래주의는 미술의 형태나 기술상의 방법보다는 이념적이고 정신적인 태도에 더 영향을 미쳤는데요. 미래주의자들도 보면 놀랄 만큼 속도에 집착하여 필요 이상으로 빠른 속도를 만드는 기술과 기계, 느림을 참지 못하고 뭐든지 빨리 해결하려고 하는 우리의 태도와 시간성 등을 통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코모 발라,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 1912>
초현실주의는 비합리적인 잠재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도모한 예술운동입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꿈, 무의식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너무 억압적인 현실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의식이 마비되면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유아성과 야만성 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감명을 받았는데요. 꿈, 잠 등 의식이 작동하지 않은 행위에 주목했고 지성, 분절적 사고를 배제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샤갈의 “우리의 내적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현실적이다.”는 샤갈의 말이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고, 내면에서 보이는 걸 그려내거나 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무의식, 꿈, 환상의 세계를 탐색하고 그려나갔습니다. 대상이 아닌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에 주목하고, 보이지 않는 걸 보이는 것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상화와 출발점이 비슷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을 거부한 점에 있어서 지성을 고도화한 추상화가와는 다른 길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 3학기 5주차 수업에 대해 공지합니다.
1) 파울 클레의 <현대미술을 찾아서>를 다 읽어옵니다. 새롭게 캐치한 부분, 같이 얘기하고 싶은 내용에 대해 공통과제를 A4 반쪽 이상 작성하여 금요일 저녁 8시까지 올려주세요.
2) 5주차 간식/정리/후기는 1조 난희샘, 2조 연희샘, 3조 산푸른샘께 부탁드립니다.
3) 참고로 6주차에는 프랜시스 베이컨과의 대담집인 <인간의 피냄새가 내 눈을 떠나지 않는다>(프랑크 오베르 지음)를 읽을 예정이니 미리 준비해주세요.
무더위와 함께 안전에 유의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주에 만나요.^^
항상 느끼지만 수업 시간에 볼 수 없는 그림까지 곁들여 강의를 재현한 듯한 반장샘들의 완벽한 후기를 읽으며 수업 시간에 잘 정리가 안된 부분이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늘 정성껏 작성해서 올려주셔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이번 주 우리의 영혼을 울린 강의의 핵심은 칸딘스키보다는 역시 다다이즘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세미나 시간에 무의미한 이야기들로 떠드는 것 같았지만 그 속에서 유의미한 웃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니..! 실로 무용한 것이 유용함으로 변용되는 기쁨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웃음은 그 자체로도 유용하니 계속 낄낄거리며 즐거운 세미나와 공부를 해보시지요! ^^ (근데 이 캡챠 좀 어떻게 안되나요? 매번 다시 써야한다는.... ㅜㅜ)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크크랩 수업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ㅋㅋㅋ 저는 이번에 칸딘스키 예술론을 배우면서 새삼 예술이 각 장르별로 구분은 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의 감각 자체는 경계없이 작동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눈으로만 그림을 보는게 아니라 오감을 모두 사용하면서 그림을 보고 있고 그것을 더 밀고 나간 칸딘스키같은 예술가들은 그 자체로 정말 들리는 회화 등을 구상한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음악들은 색이나 형태 등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 위에 신우샘께서도 다다이즘이 우리의 영혼을 울렸다고 하셨지만 ㅋㅋ 저도 다다이즘의 핵심= 웃음 이었고 다른건 몰라도 우리 크크랩도 웃음소리 하나는 또 쫌 자신있지 않나 싶어서... (다다이즘=웃음=크크랩?) 주영샘께서 품으신 희망 ?? 뭔지 모르지만 저도 품어봅니다. 🙂 명쾌하고 깔끔한 후기와 눈호강 그림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