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철학자가 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철학자”라는 클레의 말이 깊이 와닿습니다. 클레의 회화론은 짧지만 소화하기 쉽지 않은 두터운 한 권의 철학서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언제는 쉬운 게 있었나요.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이건가 저건가 고민하며 써내는 과제와 그것을 놓고 샘들과 토론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른 추상화들은 오래 보고 있으면 더 답답함이 가중되는데 파울 클레의 그림은 오래 보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승현샘의 말에 동주샘께서도 과제의 제목처럼 ‘파울 클레, 자화상 앞에서 멈추’게 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얼른 그 자화상을 펼쳐 함께 감상했죠. 샘께서는 자화상을 보면서 “신성함을 지닌 혹은 신성함으로 향하는 인간의 눈빛. 세상에 대한 통찰, 이해와 연민으로 드러내는 고개 숙인 겸손함. 머리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이 관념을 넘어 자유의 강한 생명력으로 이끌어 가는 행동성. 예술을 넘어 영성을 펼쳐가는 종교가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드러남을 느꼈다.”고 하셨는데, 제게는 그 손모양에서 약간의 익살스러움, 어딘가 겸연쩍어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는 클레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동주샘은 동의하지 않으셨지요.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는 판단은 예술작품을 만나는데 적합한 잣대가 아니겠지요. 예술품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텍스트로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히 다채로운 해석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작품은 자라나는 것이 아닐런지요.
우리 조에서 처음 꺼낸 주제는 <구성(construction)과 구도(composition)’>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구성과 구도는 상반되는 개념으로서, 마치 구성은 하위단계이고 구도는 상위 버전인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마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푸코가 제시한 유사와 상사의 개념을 오해한 것처럼 말입니다. 채운샘의 강의를 들으면서 구성과 구조는 상호연동하는 개념이라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더군요. 클레는 화가에게 구성은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의 절정”이고 “기술의 요체”이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구성과 구조의 관계는 “형식적 요소들의 선택과 요소들 간의 상호관계 형성”의 차원인데, 음악으로 치자면 “모티브와 테마”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채운샘의 강의에서 “가짜 운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실재로 운동을 만들어낸다”고 하신 말씀과 연결시켜 이해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형식적 요소들을 선택해 화면을 구성할 때 그 구성을 따라 우리 눈이 이동함으로서 실재로 화면에서 운동을 발생시키는 것, 그것이 구도라고 이해합니다. 클레는 고전주의에서 정력(靜力), 즉 정적-건축적 미를 추구했다면 낭만주의에서는 동력(動力), 즉 역동성을 추구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창조적 미술 체제는 그 둘의 차이를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 둘은 아무튼 대상의 세계를 재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의미겠지요. 클레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콤포지션”이 대상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형상에 중심을 해체하는 인상주의의 경계흐리기의 차원도 넘어감을 표현합니다.
“회화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가 매우 다양하고 중요한 차원들을 거쳐 점차적으로 여기까지 이르렀으므로, 이와 같은 회화를 더 이상 ‘구성(constru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찬사의 의미가 깃든 ‘구도(composition)’라는 이름으로 부릅시다.”(43p)
다음으로 예술가의 정체성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는데요. 클레는 화가를 나무의 몸통으로 비유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면 화가는 몸통이며, 뿌리로부터 올라온 수액의 흐름의 힘으로 난타당하고 뒤섞여 자신의 시각으로 작품을 주형시키는데, 꽃이 피듯 화가의 작품이 피어난다는 표현이 인상 깊다는 말씀을 모두가 해주셨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흔히 예술작품은 고독한 한 천재의 재능이 꽃 피운 결실이라고 생각하는 상식에 반하는 내용이죠. 클레는 예술작품을 하나의 완성태로 보지 않습니다. “생각은 제작에 선행하지 않는 법”리고 했던 메를로 퐁티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화가 자신만의 고유한 컨셉이라는 것이 예술품의 제작이전에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제작과 더불어 컨셉이 만들어져 가고 또 작품은 그것을 만나는 관객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저는 읽었습니다. 이런 예술가 이미지는 칸딘스키의 <기사>의 이미지와는 다른 결을 지닌다는 생각이 듭니다. 칸딘스키에 의하면 예술가는 정신성의 성장 과정에서 삼각형의 꼭대기에 이르려는 노력과 함께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그 작품은 민중을 일깨우고 견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한 존재입니다. 이와는 다른 결로, 클레에게 예술가는 메신저로서 도래할 해석자를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다음으로 나눈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문외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 문장입니다.
“문제의 초점은, 어떤 대상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특정한 순간에서의 대상의 모습과 성격입니다. 내 희망으로는, 그림 속에서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만을 찾아내려는 문외한들은 점차 지상에서 사라져서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는 망령으로만 존재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정열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연히 그림 속에서 낯익은 형상을 찾아낼 때 큰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33p)
반디샘은 과제에서 “대체로 형상을 무심하게 대하거나 때로는 회피” 했는데 일종의 “귀차니즘” 때문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클레가 “문제의 초점이 어떤 세상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특정한 순간에서의 대상의 모습과 성격” 이라고 한 부분을 해석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의 세상에 대한 판단은 관념적일 경우 그것이 있다 없다는 공론을 반복하는데, 실상 우리에게 세상은 ‘결정적 순간 순간’ 발생하는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림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만을 찾으려는 ‘문외한’처럼 세상도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니체가 관조자로서의 철학을 비판했던 대목이 연상되더군요. 클레는 다소 완곡한 어조로 문외한, 즉 관조자들은 “지상에서 사라져 망령으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했던 부분에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한편 이 대목에서 클레의 간절함을 읽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문외한'의 한 사람으로 자기자신도 포함시킨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반디샘의 “세상에 드러난 형상에 저항하는 것은 오히려 특정한 형상만을 바라는 외골수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라는 과제의 문장은 빛나는 사유의 한조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드러난 형상에 저항하는 것’은 드러난 형상을 그렇게 드러나도록 하는 조건, 심층을 탐구하려는 의지를 무산시키고 또 다른 ‘특정 형상’을 바라는 이상주의에 머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보던 대로 보려는 습관의 힘, 중력에 끌려 살아갑니다. 낯선 형상에 움찔하다가도 금방 “관념의 연상 작용이 넌지시 개입해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해석하도록 유혹”하는 힘에 사르르 빨려들죠. 승현샘은 “그림을 자연에 존재하는 낯익은 모습들로 환원하지 않고, 넌지시 개입하는 연상 작용, 즉 내게 익숙한 관념으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저는 클레가 “화가는 철학자가 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철학자입니다. 그는 낙관론자들처럼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든가, 모델로 삼기에 부적합할 만큼 최악의 세계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형태의 이 세계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는 아니다.” 라고 한 부분에서 마음이 단단해짐을 느낍니다. 창조론도 모방론도 아닌, ‘엄청난 의미의 파편들’로 무한히 조합 가능한 것으로서의 세계를 클레가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가나 철학자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지요. 낭만주의에서 화가를 재능을 보유한 특정한 개인을 지칭했다면, 선과 명도와 색의 언어로 "유형을 넘어 원형"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을 화가라고 클레는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화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고 화가는 철학자입니다.
우와~~ 한편의 철학 스케치와 같은 멋진 후기 남겨주셨네요.😊 샘 말씀처럼 클레의 책은 두터운 한권의 철학서처럼 묵직했는데요. 그만큼 할 얘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무의 몸통으로 비유한 전달가로서의 예술가도 인상적이었고, 이 세계에 있지만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천사로서의 예술가도 흥미로웠네요. 이와 함께 작품을 완성시키는 자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대중이라는 것, 그런 측면에서 창조는 계속되고, 어떤 작품은 대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계속 자라나는 것이라는 점 등도 새로 알게 되었지요. 지금 여기를 살고 있지만 여기에 속하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일,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대중되기가 아닌가 싶네요.^^ 중구난방으로 떠든 얘기를 감성적인 에세이로 승화한 후기 넘 감사해요.😉
저도 클레의 그림에 친절한 제목이 덧붙어서인지 뭘 그리려고 했는지 알것 같고, 더 편안하더라구요. 그래서 어쩌면 ’뭔 말인지 알아먹음-통함‘이 ’쾌-좋다‘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요소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의견을 내보았는데, 그게바로 망령(문외한)된 태도이지 않냐는 지적에 다들 씁쓸히 웃고 넘어갔습니다. ㅎ 선생님 후기를 읽으며 가만 생각해보니 그 통함이 내가 아는 것과의 통함을 넘어 새로운 세계와의 통함, 어쩌면 이 한 끝차이를 향해 감각을 새롭게 하는 게 우리 공부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ㅎ
1조도 역시 열심히 세미나 하시는군요! 전 "그림을 내게 익숙한 관념으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와닿습니다. 이미 익숙해질데로 익숙해진 여러 이미지의 관념들을 지워버릴 수도 없는 것이고... 음... 그림의 형태를 보는 게 아니라 그 형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의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역시 다르게 읽기나 보기 위한 의식적인 훈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 일텐데... 아직 갈 길이 참 멀군요 ^^ 좋은 후기 잘 읽었습니다~
후기를 읽자니 예술가는 철학자가 맞군요. 클레의 그림들을 연상해보니 무한히 조합 가능한 세계를 예술가가 앞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가려다 잠시.... 팔팔한 후기 잘 읽고 갑니다.
베이컨을 접한 후 난희샘의 후기로 클레를
다시 환기해 봅니다. 칸딘스키, 클레, 베이컨은 각자의 길은 사뭇 달랐지만, 회화의 방식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듬거리며 배우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후기를 펼쳐 주신 난희샘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