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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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분석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2학기에는 철학자들의 개념을 가져와 글을 써야 했습니다. 채운샘은 바타유, 푸코, 메를로-퐁티, 벤야민 등 네 명의 철학자들이 얘기한 개념 중에서 선택을 하여 이것을 충분한 숙지를 통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고야, 다비드, 터너, 쿠르베, 마네, 모네 등 여섯 명의 화가 작품으로 개념을 구체적으로 해석해보라고 말씀하셨지요. 저희가 쓴 에세이를 보신 채운샘은 출제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의 글을 가져왔다고 혀를 끌끌 차셨데요.^^ 개념은 알쏭달쏭하고 작품을 통해 일어나는 정동들도 손에 잡히지 않고 안개처럼 희뿌연 상태라 에세이 마감 시간 전까지 완성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마감 시간인 밤 11시 이전에 올린 글에 대해서만 발표와 코멘트를 허락하겠다는 채운샘의 특단의 조치로 서둘러서 글을 올렸고, 미완성도 있었지만 23분이 마감 시간을 엄수했네요. 에세이 때문에 새벽까지 뜬 눈으로 불타던 과거와는 달리 밤에 잠도 제대로 자고 에세이 발표날 컨디션은 상대적으로 좋았습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했던 에세이는 저녁 9시에 끝났죠. 풍성한 간식과 에세이에서 예상치 못하게 드러나는 웃음 포인트 등으로 힘든 에세이 문턱을 유쾌하고 즐겁게 잘 넘어간 것 같습니다. 물론 뼈를 때리는 채운샘의 코멘트가 아프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습관과 무지를 깨치는 것이기에 피와 살이 되는 코멘트를 잘 새겨서 다음 에세이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보아요.^^
# 조르주 바타유
여섯 분이 선택하신 조르주 바타유. 금기와 위반, 과잉은 바타유의 특징적인 개념입니다. 매일 부족하고 결핍을 불평하는 우리에게 넘쳐흐름을 얘기하는 바타유의 과잉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데요. 고립된 상황, 유용성에 한정하면, 자원은 희소하고 에너지는 부족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세계의 온갖 생물과 사물, 이들이 주고받는 에너지 전반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면,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과잉이라는 게 바타유의 의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외한 잉여 에너지를 갖고 있고, 세계는 언제나 과잉일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문제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결핍을 채우는 게 아니라, 이 과잉을 어떻게 소모하는가입니다. 바타유는 에너지의 과잉에서 지나친 산업발달, 전쟁 등이 발생했다고 보며, 사치, 유희, 종교, 예술, 생식을 벗어난 성행위 모두 과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계속 우리를 결핍되었다고 주입하는데, 우린 이미 넘치는 존재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죠.
세계는 흘러넘치는 만큼, 사회의 규정을 넘어가는 것이 항상 존재하고요. 이는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 고정적이고 따로따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물건들의 세계에 동질적이지 않은 것, 탈주하거나 돌발하는 삶처럼 즉시 격리되어야 하는 것, 불길한 것, 성가신 것, 신성한 걸 포함합니다. 우리는 나름 윤리와 상식 등에 기반하여 “인간이 이렇게 하면 안 되지.”를 내면화하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가끔은 이를 어기는 모험을 시도하고 싶어 하기도 하지요. 샘들은 주로 금기와 위반을 주제로 써오셨습니다. 우리는 금기가 먼저 있고, 이를 넘어서면 위반이 작동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건 우리의 금기에 대한 통념이고요. 채운샘은 위반이 작동하면서 금기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규정되지 않았던 것이 출현하면, 그것은 금기가 됩니다. 마치 금기가 원초적으로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작용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 굳이 금기를 설정하지 않겠지요.
바타유의 금기와 위반은 예술과 관련하여 중요한 개념들인데 이것을 통해 작품이 어떻게 새롭게 보였는지, 예술의 본질이 왜 위반인지, 작품들을 기반으로 위반의 다양성에 대해 해석하기 등에 대해서 써봤어도 좋았을 것이라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습니다. 샘들은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고야의 <개>, <아이들 놀이 1, 2>,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08년 5월 3일>, 터너의 <항구를 나서는 눈보라 속의 증기선>,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쿠르베의 <화실>, <세상의 기원>, 모네의 <해돋이>, <성 라자르역> 등을 가져와 바타유의 개념을 작동시키려고 노력했지요. 바타유의 개념을 통념으로 해석하거나, 진부한 결론을 가져오기도 하고, 자신의 문제에 너무 집중하거나 감상에 빠져 바타유가 실종되기도 했지만, 샘들 덕분에 바타유와 인용한 화가들에 대해 더 깊고 다양하게 알게 된 것 같습니다.^^
# 미셸 푸코
에세이 개요 작성할 때는 푸코를 선택하신 분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는데, 여섯 분이 푸코의 개념으로 글을 작성했습니다.^^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나온 개념들이 르네 마그리트에 최적화된 것처럼 보여 선뜻 택하기가 어려웠지요. 푸코의 주요 개념인 재현, 유사, 상사는 우리의 익숙한 관념으로 해석할 소지가 있어 푸코가 어떻게 썼는지 더 정교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예컨대 유사는 원본이 있다고 말할 때, 이 원본과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가 같은 층위에 있는 것인지 봐야 하는 거죠. 원본과 이데아는 다 초월적인 걸 얘기하지만, 두 개념이 나온 시공간의 차이만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현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재현은 원본을 똑같이 나타내는 걸까요? 아니면 이데아처럼 이상적인 걸 표상하는 걸까요? 중세시대 종교화나 그리스 시대 조각상은 이상적이지만 재현적이지 않은 것처럼 이상적인 것과 재현적인 걸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또한 르네 마그리트 그림처럼 특정 대상과 똑같이 그려도 재현적이지 않을 수 있고, 그는 재현을 통해 재현을 깨뜨렸지요. 채운샘은 재현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재현은 해석하는 맥락의 문제로 유사성에 기반합니다. 푸코는 “15세기부터 20세기 서양회화를 지배해 온 두 원칙은, 조형적 재현(유사를 함축)과 언어적 지시(유사를 배제) 사이의 분리를 단언한다. 우리는 유사를 통해 보며 차이를 통해 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유사를 통해 보는 게 너무나 익숙한데요. 그런데 푸코는 유사는 사유에만 속하는 거라고 얘기합니다. 즉 유사는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범주와 틀을 통해서 보는 거지요. 밖에 원본의 기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건 내 안에서 성립된 것입니다. 유사의 틀에서는 차이를 보지 못하게 되는데요. 그저 내 관점에 어긋나는 건 마음에 안 들고 틀리는 거라고 심판하면서 배제하기 일쑤죠. 에세이 발표시 질문과 답이 오가고 채운샘으로부터 지적도 받는데, 기분이 상하거나 상대방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유사 속에 머물며 동일화를 지속한다고 볼 수 있네요. 샘들이 쓰신 에세이 결론 부분에서 상사를 많이 가져오셨는데요. 푸코가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되풀이에 쓰이며, 되풀이는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상사의 핵심은 반복입니다. 반복이라고 하면 언뜻 똑같은 걸 계속하는 거고, 그렇다면 유사가 아닐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는데요. 상사는 반복적 행위가 만들어내는 차이입니다. 차이가 없으면 반복을 할 수 없기도 하죠. 그림에서는 모네의 <수련> 연작이 상사를 잘 보여줍니다. 연작들은 대상이 시공간적 조건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상사가 어떤 개념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푸코의 재현, 유사, 상사라는 개념으로 르네 마그리트가 아닌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어떻게 분석할지 궁금했는데요. 샘들이 각자 언어로 풀어주신 개념의 해석과 다양한 화가의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 적용이 다채롭고 흥미로웠습니다. 비록 채운샘으로부터 개념을 정교하게 보지 못했다거나 이것저것 나열만 많이 하고 중심이 없다거나 푸코와 상관없는 내용을 너무 많이 가져왔다거나 등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요. 샘들은 모네의 <수련> 연작,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자화상>, <화가의 아틀리에>, <세상의 기원>, <검은 개와 함께 있는 자화상>, 마네의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아르장퇴이유>,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 <올랭피아>, <철로>,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등을 인용해 푸코의 개념을 구체화하였고, 이 그림들을 통해 재현, 유사, 상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네요.^^
#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과 보는 것 등에 대해 다양한 개념을 얘기했지만,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메를로-퐁티가 가장 인기가 많았는데요.^^ 무려 11명의 샘들이 메를로-퐁티를 선택하여 에세이를 썼습니다. 보는 것, 지각, 몸, 상호주관성, 살 등 메를로-퐁티의 개념들이 샘들의 발밑의 문제들과 맞닿아 있고, 무엇보다도 그림을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길을 열어줄 수 있기에 많은 분이 택하셨지요. 눈을 뜨면 저절로 보이는 걸로 생각했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본다는 게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일로 다가옵니다. 본다는 건 뭘까요? 우린 눈으로 뭘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린 과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걸까요? 세상은 내가 지각하는 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봄과 관련하여 이렇게 다양한 질문을 끌어낼 수 있지만, 이에 대해 답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겼던 봄이 그렇지 않다는 걸 발견하고, 이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파악하고 싶었는데요. 그림 공부는 물론이고 철학과 삶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에 많은 샘들이 메를로-퐁티의 개념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물론 잘못된 문제 설정도 있었고, 문제는 잘 제기하였으나 중간에 멈춘 분도 계시고, 개념을 자신의 관점에서 전제하면서 글을 시작한 분도 있었지요. 개념들이 모호하고 잡으려면 빠져나가는 것 같은데다 대부분 철학자처럼 메를로-퐁티도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유의 길로 이끌고, 그동안 탐색해보지 못했던 세계로 안내하죠. 개념을 해석하고 이를 활용하는 건 우리의 일이고, 그만큼 우리와 메를로-퐁티를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메를로-퐁티는 본다는 걸 몸과 관련하여 설명하며, 보는 건 촉각적이라고 얘기합니다. 채운샘은 우리가 각자의 습관과 관념으로 보기 때문에 세계와 만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우리는 생각보다 관념적입니다. 사유도 거의 안 하는데 관념적이라니요. 여기에서 관념은 나의 전제, 나의 확고한 기준, 내가 믿고 있는 개념과 가치 등을 말합니다. 탁자 위에 있는 볼그스름한 동그란 물체를 사과라고 부르는 건 내 머릿속에 ‘사과’라는 관념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산에서 만나는 다양한 풀과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은 잡초로 여기며, 이들을 우리에게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메를로-퐁티는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얘기했는데요.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따로 있는 걸까요? 비가시적인 것을 본다는 건 다르게 보는 걸 의미하고, 나의 기억과 다르게 관계하는 걸 뜻합니다. 기억을 지워나가며, 기존의 관념과 습관을 해체하면 세계는 다르게 출현합니다. 세잔이 이런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메를로-퐁티가 신체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몸이야말로 선험적 관념이 가장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화가 터너의 체험, 돛대에 자신을 묶게 한 뒤 몇 시간 동안 직접 폭풍을 관찰한 일화를 가져오셨는데요. 터너는 파도 속에서의 죽음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시도를 한 것으로 그는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망각하고 해체함으로써 열린 세계를 봤습니다. 세잔과 터너의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다르게 보겠다는 의지와 마음가짐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걸 볼 수 없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살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지각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살(flesh)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가장 먼저 내 몸의 살들과 고기의 비곗덩어리가 연상되나요?^^ 메를로-퐁티는 신체가 아니라 왜 살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신체는 형태가 떠오르는 만큼 해체의 감각도 강한데, 살은 부패하는 모습이 연상되며 무겁고 파고드는 느낌을 줍니다. 기독교에서도 영혼과 대비하는 육신을 얘기하지요. 살은 촉각적이며, 직접적이고 구체적입니다. 또한 만물은 살로 채워져 있으며, 자연을 구성하는 살은 우리를 구성하는 살과 다르지 않지요. 그래서 만물은 서로 뒤섞일 수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신체가 존재하는 것은 보는 행위와 보여지는 것, 만지는 행위와 만져지는 것, 하나의 눈과 또 다른 눈, 한 손과 또 다른 손 사이에서 일종의 혼합이 일어날 때이다. 그 순간에 느끼는 행위와 느껴지는 것 사이에서 섬광이 번쩍인다.”라고 말했는데요. 보는 것은 신체와 신체의 만남, 살들의 마주침이면서 의식할 수 없는 원초적 체험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세계를 관념으로 만나는데, 메를로-퐁티가 얘기한 촉각적인 봄, 보는 행위와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일어난 혼합, 서로의 뒤섞임, 여기에서 발생하는 정동을 깊이 있게 만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샘들이 메를로-퐁티를 선택하신 것도 그림과 나의 혼합, 그림이 내게 침입하고 내가 그림에 들어가는 그런 경험을 하고 이를 언어화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겠죠. 그 경험을 완벽하게 번역할 수는 없지만, 이를 하나로 꿰어 직조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에 대해 노력해야 할 것 같네요.
11분이 선택하신 만큼 6명의 화가 그림이 메를로-퐁티의 지각, 봄 등의 개념으로 설명되었는데요. 이 중에서도 터너의 그림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시시각각 변하면서 끊임없이 조형하는 자연, 예측 불가능한 무질서의 질서, 파괴를 통한 생성, 유동하는 세계를 잘 보여줬는데요. 색채의 뒤섞임과 강렬함, 소용돌이와 같은 움직임 등이 우리의 관념을 걷어내고, 우리가 세계의 맨살을 만날 수 있도록 했던 것 같아요. 샘들이 분석한 터너의 작품으로는 <눈보라>, <선로, 연기와 속도>, <눈보라-항구를 떠나는 증기선>, <눈보라-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군대>, <영국 국회의사당 화재>, <노럼 성의 일출>, <빛과 색채(괴테의 이론)-대홍수 후의 아침>, <일몰>, <일출>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모네의 <수련> 연작, <아르장퇴유>,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파라솔>, <마녀들의 연회>, 쿠르베 <잠>, <돌을 깨는 사람들>, 마네의 <예수의 죽음과 천사>, <튈르리 정원 음악회>, <풀밭위의 점심>, <올랭피아>, <발코니>, <폴리-베르제르의 바> 등을 통해 메를로-퐁티가 얘기한 개념에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터너, 영국 국회의사당 화재, 1834>
# 발터 벤야민
마지막으로 발터 벤야민인데요. 그의 글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그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런 기술을 통해 지각방식 및 예술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술복제’라는 (당대의) 첨단 기술이 예술의 존재 방식과 예술의 향유, 그리고 지각방식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고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화라는 예술은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잘 알려주지요. 그런 측면에서 6명 화가의 작품을 벤야민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건 어려운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이 주목한 시대의 이전에 작품들이 형상화되었고,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그가 얘기했던 개념의 씨앗들이 태동하고 싹을 틔웠겠지만, 그의 개념을 그림에 적용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그 어려운 걸 두 분이 하셨습니다. 채운샘은 영화와 그림의 체험이 다르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매체를 대할 때의 신체성이 다릅니다. 영화의 체험은 같은 시공간 속에서 집단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림은 개인적 경험입니다. 영화는 대중을 통해 정치화할 수 있는 매체지만, 그림으로 가능한지는 물음표입니다. 한편 벤야민의 대중은 계급이 없는 모두가 동일한 자들이지만, 모네가 본 대중은 부르주아 지배계급을 말합니다. 물론 부르주아들이 다른 척을 하지만 사실은 똑같다는 점에서는 현대 대중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요. 모네보다 더 전 시대인 쿠르베가 그린 노동자 계급도 귀족, 부르주아 계급과 구분되었기에 대중과는 층위가 다릅니다. 벤야민의 이론에서는 그림도 대중을 통해 정치화할 수 있는지, 화가들이 그린 대중이 벤야민이 얘기한 대중과 어떻게 다른지 등에 대해서 분석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기술복제시대에 관련된 개념과 논의의 층을 그 이전 시대에 적용해서 분석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이 듭니다.
# 3학기 1주차(7.15) 수업에 대해 공지합니다.
1) 3학기에도 오전 조별 토론, 오후 강의로 진행됩니다.
2) 이우환 선생님의 <양의의 표현>을 2부(156p)까지 읽어옵니다. 읽으면서 새롭게 캐치한 부분에 대하여 A4 반쪽 이상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금요일 저녁 8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3) 1주차 간식은 조장들이 맛있는 걸로 준비하겠습니다.
무더위와 폭우가 번갈아가며 기승을 부리는데, 건강한 모습으로 3학기 첫 수업에서 만나요.^^
2학기에 배운 내용을 한 큐에 정리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뭘 내가 정말 배웠는지 아닌지는 글로 쓰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는 거 같아요. 개념이 나와 섞이면서 체화되어야 비로소 내 글에서 그 개념들이 작동할 수 있음을 느낍니다. 더불어.. 글을 빨리 쓰고 퇴고하는 과정을 여러번 거쳐야 잘 마무리가 되는데 늘 마감시간이 되어서야 실마리가 보이면서 비로소 할말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