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1주차 강의 정리]
* 2교시
3학기에는 작가들이 직접 쓴 책들을 읽을 예정인데요. 막연하게 상상해 왔던 작품 제작 과정을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들으며 새로운 점들을 많이 배우게 될 것 같아 매우 기대가 됩니다. 그 첫 출발로, 이우환 선생님의 <양의의 표현>을 읽었습니다. 2조 조별 선생님들 대부분이 책 내용이 심오하지만 너무나 편안하게 잘 읽혔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저도 어쩜 이렇게 놀라운 내용이 이렇게 쉽고 소박한 언어로 표현, 전달될 수 있을까 감탄했네요. 특히, 우리가 계속해서 배우고 있는 근대적 인간주의, 주체성 등에 대한 문제들과 더불어 지난 학기에 배운 메를로-퐁티나 푸코, 베르그손과 같은 철학자들의 개념들과 이우환 선생님의 사유가 어떻게 만나고 있고 작품으로 펼쳐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근대성을 넘어
채운 선생님은 19세기까지는 작가들이 작품과 더불어 담론도 생산해 왔다고 하셨죠. 물론 ‘작가’라는 개념이 근대적 의미의 작가와는 다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담론을 이론으로 작업을 실천으로 거칠게 본다면 이 둘이 ‘비평’이라는 분야가 등장하면서 분리가 된 측면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우환 선생님은 일본 ‘모노파(ものは [物派])’ 운동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서 비평글(<만남을 찾아서>, 1971출간)로 먼저 주목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철학적 배경이 작품 활동과 담론화를 하나의 실천으로 잇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도 해봅니다.
일본의 모노파 운동은 주관, 주체주의, 에고 등의 근대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한 방법으로 사물성에 주목한 것인데요. 1968-69년 유럽 철학에서는 포스트모던 담론이 대두되던 시기로 근대의 중심 키워드인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대두되는 신유물론, 신실재론 등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영향이 예술에 있어서는, 작품이 작가의 자아 표현인가, 작품은 작가에게 그 소유권이 있는가 등의 문제로 환기됩니다. 르네상스 이후에 이르러, 작품이 작가의 소우주로써 여겨져 왔던 것에 대한 문제 제기이죠. 모노파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물(物)‘로 돌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양의성
책의 제목이기도 한 ‘양의(兩義)’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조별 토론에서도 여러 얘기가 나왔었는데요. 채운 선생님께서는 양의는 본래 주역의 용어로 아직 분화되지 않은 전체성을 함축하는 태극이 음과 양이라는 양의의 속성을 가진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책에서 이우환 선생님은 양의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스트로크와 여백(여백 현상), 본다는 것의 상호성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셨는데, 양의는 해가 비칠 때 밝은 곳이 생기면 그와 동시에 어둠이 생기는 것과 같이 짝이 되어 서로를 전제하며 동시에 작동하여 운동을 만들어내는 원리입니다.
태극 - 양의 - 사상 - 8괘 - 64괘로 분화하는 과정은 미분화 상태인 빈 캔버스에 선을 그어 공간을 만들어가며 자기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채운 선생님께선 양의성이란 이원론적인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임을 강조하셨는데요. 어떤 스트로크가 그려지는 순간 나머지 공간도 생겨나며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 동시적으로 발생합니다. 이는 불교에서, 나와 너는 단독의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 조건에 의해서 발생된다고 말하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사전에 나와 있는 정의(定義)처럼 고체화되고 규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는 말, 행동, 생각 등을 통해 매 순간 생성되는 것이죠. 베르그손이 말하듯 지속의 흐름 속에 우리는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관념틀 속에서 부여한 자아라는 족쇄가 우리를 그 안에 가두려고 (헛되이^^ 그래봐야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넘치기 마련인데) 애쓸 뿐이죠.
그런 점에서, 계속해서 되묻고 있는, ’무엇이 예술인가? 이것이 예술인가? 아닌가?’와 같은 질문은 끊임없이 무엇을 어떤 정의와 규정 안에 두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게 합니다. 채운 선생님은 정의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듯 패치워크처럼 함께하는 관계들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출발이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우리는 어떤 예술적 실천을 통해서 - 그 실천이 세계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제시하는지에 따라 - 예술의 외연 자체를 매번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일반적 관념으로 작동해 왔던 무엇을 ‘창조하는 것으로써의 예술' 혹은 우리가 그리는 특정한 ‘창조'에 대한 이미지 등에 대해 질문하며, 예술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주장하는 예술을 경계하는데요. 연희샘께서도 소개해 주셨고 저도 이번에 인상적으로 읽은 구절 중 하나가, 표현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플러스적인 방식 - 빈 공간에 무엇을 더하는 - 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비우는, 마이너스적인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었어요. 이우환 선생님에 따르면, ‘표현은 자기를 무로 하여 커다란 유를 나타내는 장소를 여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우리가 지난 학기에 배운 세잔의 회의(懷疑), 내 눈앞의 사과를 그리기 위해 그 이전까지 품었던 사과의 모든 관념을 잊으려는 노력과 닮아 있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조각이란 (138) ‘제시물이 보는 것을 불러일으키는 삼차원적 메타포로 기능’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셨는데, 공간에 돌과 철을 마주 보게 놓는 순간 돌과 철은 더 이상 돌을 돌로 철을 철로 지시하는 각각의 대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두 대상과 그것을 체험하는 관객의 신체성과 더불어 대상들 각자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발생시키게 됩니다. 조각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놓임으로써 주변의 타자들의 신체성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Relatum with four stones and four irons, 1978. Schlosspark Haus Weitmar, Bochum, Germany
-신체성
이우환 선생님의 글에 신체성의 문제가 많이 나오는데요. 저는,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감각의 문제와 더불어 메를로-퐁티 책을 읽은 이후 최근에는 신체와 표현에 대해 좀 더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신체에 대해 얼마나 편협하게 생각해 왔는지와 더불어, 신체로 전해지는 정동들이 얼마나 내가 가진 좁은 관념 속에 왜곡되며 갇히는지. 과연 콘셉트라는 것이 내 신체성과 분리 가능한지, 어떤 콘셉트에는 어떤 신체적 조건이 반드시 동시적으로 작동하지만 내가 늘 그 신체적 조건을 괄호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의 생각들이 피어났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은 회화 작업을 할 때, 캔버스를 바닥에 두고 신체를 활처럼 구부린 채로 작업한다고 하셨는데, 특히 선을 그릴 때 - 일단 그 크기도 어마어마하지만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한참 숨을 참고 진행한다고 하셨죠. 중력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힘을 매개로 작업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련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운 선생님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쓰는 재료와 매체를 가다듬고 그것과 관계 맺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처럼, 우리도 글을 쓸 때 ‘언어’라는 재료를 우리 몸과 만나게 하는 하나의 수련 과정으로 실험해 볼 것 제안하셨습니다. 왜 언어는 늘 하던 대로 하고 하던 대로 쓸까요?^^ 아마 언어가 우리 존재와 생활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말하고 글 쓰는 행위 자체를 우리 자신의 신체성과 관계해서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말 중요한 것일수록 우리 몸에 투명하게 밀착되어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깨닫지 못하고 늘 습관처럼 대해는 것 같습니다. <양의의 표현>에서 깨닫는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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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
-드가
Edgar Degas, At The Milliners, 1882
Edgar Degas, The Laundresses (The Ironing), 1874-76
저는 드가의 그림이 그 구도 때문인지 늘 굉장히 감각적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화면을 크롭 하는 방식이 현대 사진과 같은 느낌도 주고, 중심 주제나 소재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 중앙과 같은 지점에 정직하게 놓여 있지 않아서 화면이 언제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드가가 사물을 어떻게 포착하고 프레임 하는지를 통해 근대라는 당시 시대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고 하셨죠.
드가 하면 춤추는 무희들의 그림이 떠오르는데요. 그는 이렇듯 여성의 세계, 그중에서도 거리의 여인이나 세탁부, 무희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런데 소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드가의 시선에는 인체가 파편화되어 많은 상품들과 장식 속에 파묻힌 형태로 등장합니다. 시선들은 서로 마주치지 않고 신체들은 자주 프레임 밖으로 잘립니다. 우연히 포착된 순간들이 스치듯 표현되고 이때 사람들의 표정이나 뒷모습 등에서 우리는 권태와 피로를 느낍니다.
드가가 파스텔을 주로 사용해서 그린 신체의 살들 - 스치면 생채기가 날 것 같은 연약함과 하나의 유기체이기 이전의 몸 자체의 취약성을 잘 드러내는 이러한 신체 표현 방식은 훗날 베이컨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반 고흐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Vincent_van_Gogh_-_Letter_VGM_491_-_The_Yellow_House_F1453_JH_1590.jpg
반 고흐의 그림을 몇 점 보고 마무리하였는데요. 반 고흐는 생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가였죠. 앙토냉 아르토는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라는 제목으로 반고흐론을 썼는데요. 우리가 세상을 우리의 관념의 틀로 직조한 채 바라보는 것과 달리 반 고흐는 사물이 가지는 그 자체의 괴물성(규정성을 벗어난 것들의 낯섦을 우리는 이렇게 느끼죠) 혹은 그렇기에 생명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아르토는 1945년 파리에서 열린 반 고흐전을 보고, 반 고흐의 그림이 우리에게 생명력, ‘힘’을 보여주고 있음을 간파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반 고흐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정상성을 강요하는 이 세계가 그를 자살로 몰았다고 분석합니다. 정상성의 폭력은 정상의 범주를 규정하고 그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일종의 결여로, 불행으로, 광인으로 치부합니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수없이 많은 절절한 편지와 일기들-그 자체로 그의 작업노트인-에는 우리가 가지는 그에 대한 광기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가 세상사나 트렌드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가지는 세계에 대한 명확한 화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유행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곧, 그림의 반복적 테마이기도 했던 ‘씨 뿌리는 사람’ 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게 예술가란 열매를 따는 사람이나 무엇이 열매를 맺을지를 계산하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겸허함을 가지는 농부와 같은 자인 셈이죠. 실제로 그는 그러한 삶을 살았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살던 시공간과 이렇게 멀고도 먼 2023년 대한민국에서 그와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인연을 보면, 그가 자신이 거둘 것을 기대하지 않고 뿌린 씨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열매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지, 나아가 그 인연 덕에 우리 각자가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씨를 뿌리게 될지? ^^ 깨닫게 됩니다.
Vincent van Gogh, The Sower (Sower at Sunset), 1888
[2주차(7/22) 공지]
1. <양의의 표현> 끝까지 읽으시고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7/21일 (금) 저녁 8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2. 2주차 간식, 정리, 후기는 1조 루이샘, 2조 스텔라샘, 3조 지은샘께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철학을 예술로 펼친, 이와 함께 자신의 작업을 언어화한 이우환 선생님의 글은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다가오고 공감이 잘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요.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글을 쓸 날이 오겠죠? ㅋㅋ 양의성이라는 개념이 인상적이었는데, 빛과 어둠처럼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상호의존적인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운동들은 우리 삶속에서 작동하고 있지요. 우리는 주로 빛, 보이는 것, 핵만 보고 이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는데, 이와 같이 작동하는 어두움, 보이지 않는 것, 가장자리들을 더 깊이 보고 사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스런 후기 덕분에 저번주 수업 복습 잘 했습니다. 👍👍👍
공지글 감사합니다. 지난주 읽었던 책과 수업시간의 수업내용이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오는 공지글, 잘 읽었습니다. 이우환 선생님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요. 저도 '신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 신체성, 신체성 말은 하고 있지만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본적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그냥 기존의 좁은 관념과 상식에 갇혀서 판단하고 글을 쓰고 작품을 대하곤 했던 것 같아요. 이번 학기에는 이 신체성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네요.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동안 읽은 책에 비해 훨씬 이해도 쉽고 작가의 작품제작 과정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사유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 내는지를 엿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안쌤의 정리 덕분에 수업을 다시 들은것 같아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