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터트림에 대하여
인간은 일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끊임없이 비일상적인 욕망을 꿈꾼다. 그러므로 일상 속에서 비일상적인 이미지로 점철된 예술작품과 만나는 것이다. (182p) 일상성은 생존의 필수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지루한 반복이기에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반복은 신체성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데 다름, 유용성이 아닌 쓸모없음(예술)이 우리의 신체성을 자각하게 하고 사유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작품을 접함으로서 똑같은 회로가 아닌 다른 사고의 패턴을 가지고 일상성을 새롭게 하고 또 지속할 수 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일상성과 비일상성을 오가며 살아가는데 그 차이는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술가는 내부의 끓어 넘치는 에로스(마그마)를 작품으로 구현하는데 그것은 작가의 컨셉의 재현만이 아니라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통한 신체적 행위를 매개로 회화가 엮어지고 만남의 터트림으로 드러난다고 이우환 선생은 말한다.
예술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에 생성되는 만남과 또다른 만남이 있다. 선생은 그림은 보는 것인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림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의 의미가 없고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림과 관객이 서로 바라보는 상호 교차의 양의성 속에서 터트림이 일어날 때 진정 그 그림이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관객의 눈길과 화면이 눈길이 서로 포개지면서 더욱 넓은 세계의 눈길로 이어지며 관람자는 초월적인 눈길 안의 존재가 되어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두번째 만남의 터트림이 어떤 것일까? 우리는 전시장에 가서 많은 작품을 바라보지만 그 작품들을 다 만난다고 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고 있다고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럼 어떻게 제대로 만날 수 있을까? 우선 그림은 영화와 달리 정신집중을 요하는 예술이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을 계속 보고 또 보다 보면 그림이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과 대면하다 보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동, 스파이크, 섬광 같은 찰나이지만 번뜩이는 것을 이우환 선생은 터트림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터트림을 조에서는 수동적인 것인가와 능동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했는데 터짐은 수동에 그치지 않고 삶을 추동하는 능동적으로 행위 하도록 하는 것으로 수동과 능동, 두가지를 다 내포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또한 예술은 세계의 신체로 그려져 있기에 몇 백년 전의 그림도 시공간을 초월한 동시성으로 우리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재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우환 선생은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라고도 말했던 것이다.
AI와 예술가
AI가 램브란트 양식의 그림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고 한다. AI는 그림을 분석과 계산에 따른 기호의 집약으로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완벽하게 컨셉을 이해해 정확하고 빠르게 재현한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 빈틈없이 완벽한 문제해결이자 답을 찾아 고민하지도 실패를 무릅쓰지도 않고 화폭을 채운다. 반면에 화가가 그린 그림은 불완전하고 불투명하다. 원본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중도에 마음이 바뀌어 다시 그렸거나, 망설인 붓질, 도중에 붓을 놓은 흔적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오히려 완벽하지 않다. 주위의 환경과 떨리는 호흡, 잡념, 망설임 등으로 작가의 의도와 달리 외부 조건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민하고 방황하고 질문 속에서 붓을 들고 그 흔적이 그림에 남는데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꿈틀하는 차원의 기호를 발생시켜 사유하게 만든다. 노년이 무엇인지, 늙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데 말년의 화가로부터 겸손을 세상에 대한 숙연함을 느낀다. 완벽하지 않은 그림에서 자신이 해석할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시도를 꿈꿀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삶 또한 완벽하지 않고 계획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난입해 들어오고 인생은 과정이기에 여백을 두고 계속 고쳐 나가야 하는 것이 그림과도 닮았다.
예술에 대한 쳇바퀴
일상과 비일상을 논하다 쓸모와 쓸모없음 특히 쓸모없음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우환 선생과 평생 업으로 석공 일을 한 사람이 놓아둔 돌과 철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한 논의도 꽤 길게 이어졌다. 석공은 평생 수련으로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올랐을 수도 있으나 예술가가 시대적 맥락에서 질문을 던지고 사유을 통한 사물의 배치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겼다. 수업시간에 이 부분에 대해 채운 선생님께서도 훈련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사건과 이 세계와 자신의 마음에 대한 해석은 진정 죽을 듯이 어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는 AI가 지금은 한계가 있지만 딥러닝을 통해 스스로 창조할 수 있게 된다면 예술에 대한 규정도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질문도 남겨졌다. 매번 세미나 할때마다 계속 반복되는 이것은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훌륭한 조원들의 세미나 내용을 제가 수업시간에는 정리가 안되어 제대로 전달을 못했네요.
이우환 선생님의 글이 방대한 주제를 담은 만큼, 토론할 만한 내용이 많았는데요. 조별로 얘기한 주제가 달라서 후기가 매우 소중합니다.😊 각자 책에서 인상깊은 부분, 공통과제로 가져온 내용이 책과의 만남에서 발생한 터트림이 아닌가 싶어요. 비평은 관념이나 컨셉이 아닌, 만남에서 시작되는 것 같고 이우환 선생님의 글이 이를 잘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미지의 만남을 통해 각자 발견한 세계를 나누는 비평, 앞으로 우리는 어떤 걸 만나서 도반들과 공유하게 될지 기대가 되고요. 3조의 토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가기 감사합니다.👍
지은샘이 정리도 잘 해 주시지만, 세미나 중에 작가들과 연관된 얘기를 곁들여 주셔서 그 재미도 진짜 쏠쏠합니다~~ (づ ̄3 ̄)づ╭❤~
덕분에 점심시간까지 이어지는 스몰톡 타임도 풍성하고요~~
울 조원들의 나름 금지어(?) "그림값, 예술이란 정의, 나도 그리겠다 등" ㅎㅎ 예술을 평가하지 말고 '만나자 '라고 했지만, 매번 언급되는 이유가 일깨워주는 바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편견, 일면이겠지요. 지은 샘이 말하는 그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수련은 어떤 배움일까 생각해 보는데요...
예술의 가치를 구성적으로 보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예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와 같은 질문의 형식으로 바꿔 나가기, 그런 자기 질문의 형식을 다듬어가는 배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보는 관점 하나를 바꾸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함께 으샤으샤 힘내서 가보는 것 외에 지름길이 없다는 것. 그러니 열심히 즐겁게 가보아요~~ 지은샘,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o(* ̄▽ ̄*)ブ
3조에서 나눈 것처럼 '터트림'이라는 표현이 여러번 나오는데요. 저는 이 말이 주는 감각적 느낌이 이우환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표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느꼈어요. 채운샘께서말씀해 주셨듯, 이 말은 이우환 선생님은 화가의 주체적 '표현'이란 말을 다른 말로 바꿔 쓰시기 위해 고심하신 가운데 나온 것으로 우리에게 '표현'이 화가의 것, 화가의 자아나 내면에서 비롯된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죠. 반면, 터트림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능동-수동의 경계에서 발생되는 어떤 상태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 화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들의 만남에서 발생한다는 이우환 선생님의 논지를 보다 잘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요. 흥미로운 토론 내용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