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의 표현(이우환 지음,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2022)
2조 후기 스텔라
화가의 신체성이 표현된 작품과 관객의 만남
뒤샹과 보이스
우리 2조 샘들은 만나자마자 ‘이우환샘 책 어땠어요?’ 란 질문에 ‘너무 잘 쓰셨어요.’, ‘문장이 매끄럽고, 적절한 문장으로 쓰여져서 그동안 읽었던 개념들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하게 됐어요.’라는 대화로 시작했습니다.
이우환샘이 뒤샹과 보이스에 대해 쓴 글에서 저는 선생님이 보이스쪽을 더 지지한다는 측면만 이해했는데, 2조 샘들이 이해한 내용을 들었을 때 보이스에 대한 내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뒤샹은 로고스만 바꾸고 행위가 없는 반면, 보이스는 ‘자아의 외침’으로 보이며 아티스트 의도와 다르게 보았다고 했는데, 직접 보이스를 만났을 때, 보이스는 ‘코요테와 통하길 원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먼저, 뒤샹은 워낙 유명하고 획기적인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고, 그 누구도 감히(?) 비평하지 못하는데, 이우환샘의 글이 있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우환샘은 뒤샹이 창조에 의한 예술관을 바꾸긴 했으나, 자기 모순에 빠진 것 같다고 평가합니다. ‘사물의 용도나 배경, 장소를 바꾸어 이름을 붙이거나 변용하거나 하여 의미의 바꿔치기를 한다. 이것이 근대적 존재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샘」 의 장치는 강압적인 로고스의 작용에 의한 이미지 체인지를 꾀하는 것이며, 그 성격을 말해주는 훌륭한 증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348p.) 채운샘 설명에 의하면, ‘통하길 바랐어’는 ‘모든 예술이 타자와의 대화 아니야?’란 의미로 읽힌다고 하셨습니다.
추상과 신체성
두 번째 질문은 추상은 근원을 남기고 빼는 작업입니다. 이우환샘은 말레비치나 몬드리안 의 추상회화를 비판적으로 봅니다. 추상회화는 근대적인 것으로 형식화된 것, 건조한 방식, 닫힌 방식이라고 하며 단색화는 반복되는 신체성이 들어가서 시·공간의 무의식에서 그려져서 다르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우환샘 작품은 우리가 그 작업 과정을 알고 신체성이란 개념에 맞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몬드리안의 경우 작품 제작 과정을 알 수 없는데 ‘신체성’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AI를 활용한 그림 또는 머리를 쓰는 경우는 ‘신체성’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채운샘은 ‘신체성’에는 두 가지-수련, 반복-가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수련’에 대해서입니다. 모든 미술 작업은 물질과 물질, 즉 붓, 붓질 등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맘대로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이우환샘은 스트록을 그릴 때 숨을 멈춘다고 합니다. 자기 신체가 캔버스를 만났을 때 신체는 변환이 일어납니다. 그 만남이 나에게 요구하는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상황에서 누굴 만나는가는 그 시·공간이 영향을 미칩니다. 세팅하고 그것을 익혀야 합니다. 뭔가 터득한 상태가 되어야 하며, 다음에 격물배치가 되야 합니다.
다음은 ‘반복’입니다. 주제를 그리는 동안 관련된 신체의 수련과 반복이 필요합니다. 화가는 하나의 주제나 스타일을 반복합니다. 이우환샘은 계속 점을 그립니다. 그 점 하나 빈 공간에 그려넣는 게 ‘화두’입니다.
‘추상’은 뼈대만 남기고 자연을 구체적인 것은 제거하고 그립니다. 마티스의 경우 고흐의 세계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마음의 색깔로 채색함에 더해 인상주의의 붓질을 더 촘촘(점묘법)하게 합니다. 색들이 만들어내는 면이 주는 쾌감이 있음을 표현합니다. 「생의 기쁨」을 보면 느낌을 색으로 번역해 냈으며, 보색들 대조로 선의 리듬감과 율동감을 주어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합니다. 피카소의 경우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출발은 표현주의였습니다. 형상과 공간이 상호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조를 본질로 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공간을 해체하고 여러 시점에서 다시 재구성합니다. 몬드리안에게 ‘신체성’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우환샘의 ‘신체성’은 그림 본질을 신체에 둔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만나느냐의 문제입니다. 몸짓 자체가 녹아들어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추상’은 화면이 어떻게 본질만 남았느냐의 문제이지 ‘신체성’을 드러내려한 것이 아닙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에 따르면 몸은 감각의 판으로 뭔가 들어오면 마음이 꿈틀합니다. 의식은 언제나 개념 규정을 하는데, 양의성은 음과 양이 변화하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언제나 생성중인 차원입니다. AI가 그린 렘브란트 그림은 어떨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명료하지 않은 것’입니다. 머뭇거림이 들어갑니다. 한 획 또는 한 점의 작업을 할 때 머뭇거리고, 고민하고 방황하고 문제 속에서 질문합니다. AI는 그러지 않습니다. AI는 실패를 무릎쓰지 않습니다. 관계 속에서 꿈틀하는 시간 속의 것을 하지 않습니다. 이우환샘은 그런 것을 갖다주는 것이 ‘만남’이라고 합니다.
대상과 물(物)
1조에서 질문했지만, 우리 조에서도 궁금해 했던 내용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대상을 미화 아니면 함부로 합니다. 자연, 인간을 구분하고 자연, 문화를 구분합니다. 근대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대상화 합니다. 인간과 인간 외부의 관계를 벗어나려는 것이 物입니다. 한문에서 ‘物’은 인간도 사건도 포합합니다. 대상화된 체로 존재하는 외부의 사물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존재’입니다.
일본어 ‘もの(모노)’는 우리 말의 ‘것’에 해당합니다. ‘모든 차원의 실재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物’자체를 독일어로 ‘Ding’라고 하는데, ‘Thing’과 다릅니다.-북유럽에서 의회를 Ding라고 하는데, 인간과 인간이 앉은 의자, 풀도 의회 구조에 참여한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것도 인간만으로 이뤄진 것은 없습니다. ‘무관하게 이게 뭐다.’ 할 수 없습니다. 칸트는 그런 조건을 벗어나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정 조건과 형식에서 그것을 알 뿐이라고 합니다. ‘物’은 어떤 조건이냐에 따라 드러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노화’입니다. 돌과 철처럼 미술관에 놓으면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특정 조건에서 드러날 때 의미를 획득합니다. 그것을 하려 했던 것이 ‘모노파’입니다. 모든 존재가 시·공간의 만남에서 의미 부여, 만남에서 의미가 발생합니다.
모노파의 여러 작가들-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정창섭, 곽인식, 권용우 등-에 대해 짧게 설명을 듣고, 반 고흐의 삶과 작품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식구들은 많은데 감자 몇 알을 놓고 있는-과 어두운 배경, 뼈가 많이 튀어나온 손들-그들의 삶을 아는 사람이 그렸을 것-을 보며 감자 위를 응시하게 됩니다. 『구두』란 그림을 보며, 그림과 관련된 다른 누가 떠오른다면 그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반고흐도 다른 훌륭한 화가처럼 같은 풍경을 여러 장 그렸고,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하겠다.’고 했다는 말에서 진정한 화가의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름에 걸맞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모습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2조에서도 핵심적인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얘기를 나눴네요.^^ 이번 이우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더욱더 우린 굉장히 관념주의자라는 생각도 들었고, 기존의 선입견, 개념으로 재단하다보니,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을 제대로 못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어화되어 있는 대상을 헤체함으로써 세계의 눈부신 반짝임을 직접 조우할 수 있다는 이우환 선생님의 말이 기억에 남네요. 신체와 추상성 등 어럽지만 중요한 내용 을 비롯하여 조별 토론내용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후기 감사해요.😊😉
매주 세미나에 참여해 타자와 대화하는 이들 모두 일종의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ヾ( ̄▽ ̄)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 감정들을 동반하는 분별심을 유예하고, 마음으로 또 논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 어찌 보면 넘 힘들기 때문에 신체적 수련이 필요한 일종의 예술의 경지(?)는 아닐지...ㅎㅎ 세미나가 끝나고 뭔 얘기를 했는지 정리조차 잘 안 되는 처지라서 말이죠ㅠ 그러고 보니 스텔라 샘의 노트엔 늘 메모가 빼곡했던 게 생각나네요. 스텔라 샘이 세미나 시간에 조원들의 말을 깨알같이 메모하고, 꼼꼼하게 경청하고 조곤조곤 말씀해 주시는 태도도 기억에 남고요. 어쩌면 나 아닌 다른 이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이 초심자인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로서 예술은 아닐지...
스텔라 샘과 여러 샘들처럼 저에게도 이번 이우환 선생님의 책이 특별했는데요. 이우한 선생님은 이 사건을 이렇게 보시는 구나, 그렇다면 다음 얘기는? 다음 장이 넘 궁금해지는 책이었죠. 이우환 선생님이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보는 태도, 사안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태도, 현실을 근심하는 따뜻한 태도까지 작품과 비평문에 잘 녹아 있어 여러 샘들이 감동적으로 읽으셨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키워드 별로 정리해주신 후기 잘 읽고 갑니다! \( ̄︶ ̄*\))
추상회화와 신체성이 잘 연결되지 않곤 했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추상이 지나치게 협소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신체성 역시 뭔가 움직임이 크고 격렬해야 신체성이 들어간 거라고 은연 중에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아요. 여기에는 신체와 정신의 이분법 또한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 토론을 진지하고 재미있게 했는데 스텔라샘께서 이를 채운샘께서 해주신 강의와 잘 연결해서 정리해 주셔서 다시 잘 환기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