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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선생님의 글은 깊이 있고 방대한 사유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작업을 통해 체화된 개념이면서 이 개념이 작업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과정을 거쳐서 그런지 글의 내용이 더 가깝게 다가왔고 우리에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개념이 없이는 그의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 같고, 작품이 없었다면 이런 개념과 글의 성립이 불가능할 것 같지요. 개념과 작품이 양의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이우환 선생님의 작가나 작품에 대한 비평론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비평이라고 하면 차갑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글이 떠오르는데, 그의 작품론과 작가론은 대상에 대한 예의가 느껴지고 애정이 묻어나죠. 이우환 선생님은 설령 대상이 괴이한 모습일지라도 비판의 대상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하는 타자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고, 모든 건 대상을 진지하게 마주 보는 최소한의 예의에서 시작됨을 강조하셨습니다. 비평은 맞고 틀리는 걸 따지는 것도 아니고, 이를 해체하여 낱낱이 파헤치는 일도 아닙니다. 비평은 내가 있는 시공간에서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 만남을 통해 마음이 동하고 울림이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우환 선생님의 <모나리자 송>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여 말만 들어도 식상함이 떠오르는 <모나리자>도 새롭게 탄생시켰는데요. 전 이 글을 읽고 그냥 스쳐 지나갔던 <모나리자>를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상식과 선입견을 걷어내어 언어화되어 있던 <모나리자>를 해체하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의 눈부신 반짝임을 다시 조우하고 싶네요. 이와 함께 거칠고 어설프더라도 타인의 마음이 동하고 울림을 주는 그런 비평을 쓰고 싶다는 바램도 들었습니다. 잘 쓰기 위해서는,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으나 실천은 안 되는 훈련, 즉 일정한 반복이 필요합니다. 훈련으로 기술을 연마할 수는 있지만, 여기에 사유가 있어야 도약할 수 있습니다. 훈련이 우리를 바로 깨달음이나 통찰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질문을 계속 던지고 사유해야 합니다. 이런 질문과 사유는 관념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요. 무의식적 차원인 감수성과 관련되는데, 예컨대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 등 느낌의 영역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사고로 사람이 많이 죽어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픈 경우에도 우리는 배가 고프지요. 이럴 때 대부분은 그냥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요. 이럴 때 “이런 상황에서도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사유하게 되고 의미가 발생합니다.
인간은 생물입니다. 명증하고 확정적인 데이터나 명료하고 무기적인 대상을 만드는 기계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세상과 함께 살아가지요.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 이전에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신체적 존재라는 사실에 입각하게 되는데요. 신체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는 세계 속에 엮여서 유기적인 근골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감수성의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체성이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고요. 이우환 선생님이 책에서 얘기한 것처럼 신체야말로 삶의 현상이며, 세계와 관련된 직접성·무한성에 대한 감각의 증거입니다. 이런 감각은 AI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AI가 급격히 진화하면서 이를 두려워하게 되는 마음도 있는데요. 완벽하고 무결점한 AI,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도 실수 하나 없이 모사한 AI가 할 수 없는 건 바로 명료하지 않음입니다. 모든 게 명료하고 완벽한 AI로부터는 고민, 방황, 질문이 나오기 어렵겠지요. 세상의 일들과 사건들은 우리에게 애매하고 이해할 수 없는 걸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지점에서 고민과 생각, 질문이 돌출합니다. 또한 이를 해결해 나갈 때에도 가장 유리하고 이기기 쉬운 길로 가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길로 가기도 합니다. AI는 바둑에서 매번 이길 수는 있지만, 이세돌처럼 멋지게 질 수는 없지요. AI와 가장 큰 차이면서, 우리에게는 고통스럽고 부족함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불완전함과 불투명함, 불명료함이 완전함을 넘어서는 지점이면서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있고 풍성하게 만드는 측면이 아닌가 싶네요.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감각도 달라졌는데요. 인간이 시간당 얼마로 팔리는 노동력으로 추상화되었다면, 자연은 이용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환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인간과 자연은 상품이 아니었고, 구체적으로 존재했는데요. 자연을 포함한 삶의 시공간에는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었지요. 자연은 인간이 경외감을 느끼거나 배울 것들을 품고 있었기에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전에는 자연을 보고 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자연의 위상이 떨어지고 이용대상으로 추락하면서 20세기에 화가들의 작품은 눈에 보이는 자연에서 출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마티스의 경우 자연을 본받거나 닮으려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조형하는 세계를 추구했지요. 그는 색들이 부딪히며 만드는 음악과 같은 질서와 조화를 구성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작품 <댄스>는 춤추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지만, 사람보다는 색채와 리듬이 중요합니다. 회화에서 본질적 요소는 무엇인가가 마티스의 질문이었는데, 그는 작품에서 본질적 요소만 남기면서 해체하고 지우며 동비중, 순일, 절도를 구현하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몬드리안의 경우 본질만 남기고 다 지우면서 강렬한 추상성을 나타냈는데요. 곡선도 펼쳐지면 직선이기에 결국 직선만 남겼고, 그의 작품은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원색을 가진 직사각형 면과 그와 섞인 흰색과 검은색 면, 그리고 검은색 선들이 주된 모티브로 작용하며 구성되었습니다.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자인데, 신조형주의자들은 영적인 조화와 질서가 담긴 새로운 유토피아적 이상을 표현할 길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형태와 색상의 본질적인 요소로 단순화되는 순수한 추상성과 보편성을 지지했고요. 작품뿐만 아니라 세상도 조형하고자 했으며, 본질로 환원하고 싶어 했습니다.
앞에서 본 몬드리안의 작품은 관념을 통해 공간 분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관계를 잘라버리고 이미지의 메타포로서 본질적인 요소를 대상화하면서 세계를 본질적 질서로 환원하였는데요. 모든 추상화가 이런 방식으로 구현된 것은 아닙니다.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도 어떤 배경지식도 없이 보면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관념을 통해 구성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요. 그러나 그는 캔버스에 자기 이념에 의한 제국을 펼치는 추상화를 비판했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열림, 독자적인 주장을 자제하고 타자와 함께 외계 속에서 성립되는 작품을 강조합니다. <양의의 표현>을 읽어보면 그의 작업관이 잘 드러나는데요. 그에게 작품 제작은 화가의 생생한 영위로, 작품은 결코 대상이나 콘셉트의 재현이 아닌, 내부와 외부 상호작용의 산물입니다. 또한 이런 양의적인 제작 태도가 작품을, 자신을 벗어난 더 넓은 차원으로 이끌어줍니다. 이우환 선생님은 작품에 임할 때 숨을 참으며 커다랗고 긴 스트로크를 천천히, 일사불란하게 그리는데, “아마도 그림을 그릴 때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지도 모르지,”(206p)라고 말합니다.
조별 토론에서 대상과 물(物)에 관한 얘기도 많이 나누었는데요. 우리는 주로 사물을 대상화하면서 봅니다. 크크랩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관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고 있는데요. 사과를 볼 때 직접 내 눈앞에 있는 사과를 마주하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과라는 개념을 통해 사과를 확인합니다. 모노파가 제시한 물(物, もの, thing, matter)은 물질이나 말이나 감정 등이 서로 뒤섞이면서, 말의 범위를 벗어나는 불확정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이 개념은 이분법을 벗어납니다. 일본어에서 모노는 실존하는 것을 뜻하지요. 이는 사건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층위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간,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가, 예컨대 대상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물로 대하느냐가 우리의 욕망, 행위를 규정하는데요. 대상으로 보는 것에는 이미 소유에 대한 감정이 들어가 있으며, 대상을 폭력적으로 대하거나 낭만주의처럼 미화하기가 쉽지요.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모습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物)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규정이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적 상황과 만남을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시공간적인 맥락이 소거된 물(物)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은 예술도 물(物)의 차원에서 접근했는데요. 그가 속한 모노파의 화가들은 고무, 천, 돌, 흙, 목재, 자연물 등을 서로 대면시키면서 대지, 공중, 창, 모서리 등 다양한 시공간과 여러 현상을 연계시키나 맞부딪혔는데, 이러한 방식은 소재로서 물질과 공간을 쓰는 게 아니라, 제각각의 요소를 상호적 관계로써 활용하는 태도에서 온 것입니다. 물질이나 공간을 오브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행위를 매개로 ‘물(物)’을 탈물질화로 이끄는 걸 행했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 대상-사물의 개념을 타파하고, 눈앞의 현실에 대해 되물으려고 했습니다.
<이우환, 관계항, 2019>
7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종의 추상적인 회화 현상으로 여겨지는 단색화에 관한 얘기도 흥미로웠습니다. 단색화라고 하면 하나의 색으로 된 회화를 떠올리기 쉽고, 서구의 언어로 하면 모노크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노크롬은 색채의 부정을 가리킨다면, 단색화는 단일한 색, 최소한의 물감으로 된 회화로 회화의 재생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단색화는 어떤 재료와 만났느냐에 따라 사물의 효과가 달라지는 걸 나타냈는데, 몸의 힘, 우연 등이 반영되었지요. 이우환 선생님은 단색화계 작가들이 얼어붙은 70년대에 표현이란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물어봤다고 평가를 했는데요. 화가 박서보는 캔버스에 하얀 그림물감으로 정성껏 바탕을 칠한 후 진한 연필로 규칙적으로 긁고, 이를 반복하며 표현에 대해 모색했고요. 화가 윤형근은 삼베에 솔이나 평필로 그림물감을 배어들게 함으로써 모든 걸 통제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단색화는 한국적인 것의 전형이 되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지역성에 관한 질문이 나오는데요. 반 고흐를 네덜란드적이라던가, 마네나 모네를 프랑스적이라고 한 것을 들은 적이 없지요. 유럽 작가들에게는 지역을 묻지 않고 보편성 속에서 논의가 됩니다. 아무리 개인성을 주장하더라도 작품에 감도는 공기에 배경과 지역성이 배어 나오는 건 어쩔 도리가 없지만, 이를 지역 그 자체로 예를 들어 한국적, 중국적, 아랍적이라고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 환원하는 건 많은 것을 숨기고 배제하기 때문이지요.
<박서보, 묘법, 1981>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은 1885년 작품인데요. 작품 안에서 등불 아래 5명의 가족이 낡은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거칠고 투박하며, 식탁 또한 감자와 차 한잔으로 초라한 편입니다. 반 고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대상화하여 아름답게 표현하거나 낭만화하지 않았는데요.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이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하였다.”라고 썼듯이, 이들의 삶을 진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한편, 반 고흐는 색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했고, 자신이 사물들에 대해 느꼈던 정서를 색으로 번역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노란색은 생명력이 느껴지고, 파란색은 우울한 느낌보다는 노란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빛나는 밤의 색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광기와 자살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으나, 그의 작품과 편지,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은 우리에게 감동은 물론, 자신의 한계를 넘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하네요.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1885>
# 3학기 3주차(7.29) 수업에 대해 공지합니다.
1)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63p(회화론의 5.색채의 작용)까지 읽어옵니다. A4 반쪽 이상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금요일 저녁 8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2) 3주차 간식은 1조 승연샘, 2조, 제현샘, 3조 경희샘께 부탁드립니다.
폭우와 무더위가 오가는 극단적 날씨 조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주에 만나요.^^
주영샘께서도 써주셨듯, 지난 시간에 훈련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것이 어떤 질적인 도약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기술적 반복 뿐 아니라 거기에 자신이 하는 작업과 일에 대한 사유를 동반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특히 화가, 작가, 가수 등등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그러한 직함을 갖는 것이 아니라, 화가라면 그러한 직함을 갖든 아니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작가라면 글을 쓰고, 가수라면 노래를 계속해서 부르고 그것을 사회와 공유하는 한에서 모두 그렇게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직함을 갖고는 있지만 현행적으로 전혀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과거의 직함대로 계속 부르는 것은 온당한가? 라고 채운샘께서 질문을 주셨죠. 무언가를 계속해서 해 나간다는 것, 그 과정에서 스스로 사유하고 고민하는 태도가 기본임을 깨닫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우환 선생님의 글들은 선생님의 작품과 더불어 그 자체로 실천적 활동임을 이번에 읽으며 많이 느꼈네요. 명료하게 잘 정리해 주신 덕분에 지난 시간 배운 내용을 한 큐에 복습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