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과 물
이우환 선생님은 유럽에서는 동의어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두 단어, ‘대상’과 ‘물’이 일본에서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에게 Object, 즉 “대상은 그야말로 대상화된 것, 곧 개념으로 덮어씌워진 대상, 그야말로 언어에 붙잡힌 물(221쪽)”인 것인데요. 반면, ‘물(Thing, Matter)’은 불확정하고 애매모호한ambiguous 것으로 봅니다. 그 자체로서 온전히 존재하는 물이란 알 수 없기에, 특정한 조건의 속에서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인데요. 이 물은 어떤 조건인가에 따라서 드러나는 방식이 다른 물이기도 합니다. 문화, 세계관, 언어, 쓰임의 차이에 따라 뭉뚱그려 때로는 어떤 하나로 여겨지기도, 또 때론 다른 여러 것들로 여겨지기도 할 수 있는 것이 물이지요. 그의 모노하는 오브제Object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매개로 ‘물’의 관계를 만들고 동시에 그것을 만나는 관객의 신체를 통해 또 다르게 끊임없이 관계할 수 있는 애매함과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모노파는 자포니즘 또는 오리엔탈리즘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 온갖 존재의 타자성을 서로 인정하려 했던 세계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언표되지 않은 것, 만들지 않은 사물에 시선을 돌려, 그러한 불확정한 사물과 만드는 것과의 새로운 연과—그 관계성의 탐구였다는 것(249쪽)”
모노화와 단색화
작가는 일본의 한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전시하는 동양작가로서, 한국에서는 외국(일본)에 머무르는 작가로서, 상황에 따라 덮어씌어진 여러 상징 속에서 자신과 작품이 존재하고 보여지는 상황을 경험합니다. 수업을 들으며 작가의 모노하는 특정 장르, 언어, 국가 등의 규정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전에는 주의깊게 보고 읽지 않았지만, 지난 수업에서 70년대 한국의 남성 작가들의 단색화를 통한 예술에서의 저항에 대한 이우환 선생님의 관점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한국 남성 작가로서 그 시대를 직접 겪었기에 짚어낼 수 있는 이야기고요. 박서보, 하종현 등의 단색화 작가들이 단일한 색,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표현, 지리한 자기 반복성의 작업은 시대를 외면한 채 침묵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얼어붙은 시대에 있어서 표현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근원적으로 물었던(253쪽)”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이우환은 이런 단색화를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상황속에서 더없이 치열하고 거침없었던 예술의 저항으로 봅니다.
저희 조에서는 대상과 물, 신체성, 데셍에서의 화가와 모델의 상호적인 만남, 인공지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크크랩 시작 후, <양의의 표현>만큼 토론에서 선생님들께서 텍스트의 영향력에 대해 자주 언급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일한 분량의 텍스트를 읽고서도 각각 다른 지점으로 글로 풀어오시는 것을 보면서, 토론의 특별함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다른 조에서도 질문주셨던 대상과 물, 수업에서 인상 깊었던 단색화에 대해 후기 남깁니다.
예전에 ‘무리는 생각한다’라는 책에서 일본어로 ‘것’ 이라는 말의 다층적 의미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는데요. 영어의 thing과 같은 단독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가지는 맥락과 배치를 포함한 것으로서의 사물성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이번 이우환 선생님의 책에서 모노하 운동이 이와 연계되어 이해되었어요. 모노하 운동이 특정 민족으로 규정되지 않는 이유 또한 이것이 관계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드네요~ ^^ 각 조별로 나눈 얘기들이 흥미롭습니다~ 후기 감사드려요😊
저도 단색화에 대해 "얼어붙은 시대에 있어서 표현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근원적으로 물었던” 것이란 작가의 해석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드러난 것은 그렇게 드러나도록하는 조건과 함께 읽어야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 같았어요.
모노, 사물성이라는 것이 제게 다시 물음표로 다가오네요. 후기 쓰시느라 애쓰셨어요,덕분에 지난 시간 정리가 됐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의 글을 통해 보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눈 뜨면 보이는 걸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게 보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크크랩 공부를 하면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합적인 과정인지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린 삶 속에서 만나는 것들을 주로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지요. 이우환 선생님의 '물'이라는 개념이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조별 토론에서 나눴던 중구난방의 내용 중 핵심적인 부분을 간단 명료하게 잘 정리한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