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는 승현샘이 학교 연수로, 희윤샘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했지만 다른 샘들이 과제도 모두 해오셔서 덥지만 즐겁게 세미나를 했습니다. 샘들 대부분이 지난주 이우환 선생님의 책에 비해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1조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는 크게 4가지입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문제’, ‘예술가의 감정의 문제’, ‘무엇’과 ‘어떻게’의 문제, 마지막으로 ‘삼각형’의 비유입니다. 이중 ‘무엇’과 ‘어떻게’와 ‘삼각형’의 문제는 다른 조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온 듯합니다. 1조 세미나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해봅니다.
= 예술을 위한 예술
칸딘스키가 활동했던 시기는 파시즘 시대였고 전쟁이 있었죠.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예술은 물질적으로 타락하고 있다고 칸딘스키는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미술사조인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등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지 못했죠. 특히 예술이라는 형태만 갖추고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면서 파시즘의 정치적 선전 도구로 예술이 활용되기도 했는데요. 칸딘스키는 이를 ‘예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예술은 내적 음향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힘을 무산시킵니다. 바로 칸딘스키가 추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 (예술가의) 감정
“예술작품은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로 성립한다.”(18)’ 여기서 내적인 요소는 “예술가의 영혼 속에 있는 감정인데, 이 감정은 관람자에게서 유사한 감정을 환기시키는 능력”(18)이다. “감각된 것은 비물질적인 것(예술가의 감정)과 물질적인 것을 이어주는 다리, 즉 물리적인 관계인데 이러한 결과로 예술작품이 탄생”(18)한다. 다시 감각되는 것은 물질적인 것(예술가와 그의 작품)에서 비물질적인 것(관람자의 영혼 속에 있는 감정)에 이르는 다리“(18)인 것이다.
여기에서 (예술가의) 감정→감각된 것→예술작품→감각된 것→(관람자의) 감정에 이르게 되는데요. 예술가의 감정 이전에 필연적 감각이 있는데, 생략이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감각된 이후 감정이 나와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또 다른 의견으로 예술가의 감정은 충동, 욕망처럼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체적 감정이며 감정 이전에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꽃을 봤을 때 그 예술가가 음악가라면 왈츠로 표현했을 것이고 화가라면 그림으로 표현했겠죠. 우리들은 예술가는 자신의 시각과 촉각이 반영되어 예술작품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 ‘무엇’과 ‘어떻게’의 문제
‘무엇’과 ‘어떻게’는 다른 조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아요. 우리는 흔히 무엇은 주제나 내용, 어떻게는 형식이나 기교적 측면을 생각하는데, 칸딘스키는 ‘어떻게’보다 ‘무엇’를 더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은 내적인 요소이며 감정, 영혼과 같은 것이며 예술에서의 정신에 해당됩니다. 세잔의 진동하는 힘이나 고흐의 색채적 정서가 이 ‘무엇’에 해당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예술에서 ‘어떻게’에 치중할 경우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고 파시즘의 도구화로 사용되는 일이 벌어지겠지요.
칸딘스키의 주요 개념인 ‘점,선,면’과 ‘색채와 형태’는 ‘무엇’일까요. 아니면 ‘어떻게’일까요. 회화론까지 읽으면 답이 나오겠지만 ”색의 조화는 오직 인간의 영혼을 합목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칙에 근거한다.“(62)는 내용도 있듯이 내적 필요성에 근거, ‘무엇’에 해당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 삼각형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삼각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칸딘스키는 예술의 정신적인 생활의 도표로 예각 삼각형을 가져옵니다. 삼각형의 위로 올라갈수록 불안이 심해지지만 정점에 올라가면 이런 불안이 사라집니다. 정점에 있는 사람(예술가)는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사람으로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칸딘스키, 세잔, 마티스,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이 아닐까요?
삼각형의 아래의 변은 대중들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정점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예술가들이 등장하죠. 정점을 향해 올라가다가 퇴보하는 예술가들도 있고 이런 예술가들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독이 되는 예술가들입니다.
정점의 바로 아래에는 과학이나 물질문명에서 완벽한 사람들이 있는데 정점에 거의 도달해도 이들이 예술의 내면적인 요소인 영혼이 빠지면 금방 폐허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영혼이 개입해야 정점으로 갈 수 있는거죠. 정점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예술밖에 없으며 계속해서 열려 있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규문의 큰 공부방(주방옆)의 에어컨이 고장나 규문이 엄청 더웠는데요. 그래서 크크랩에서 얼른 에어컨을 준비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얼른 실현되길 바랍니다. 더운 날씨에 청년들이 맛있는 밥을 준비해주셨는데 오늘은 정말 더워서인지 더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채운쌤의 강의로 칸딘스키, 고흐, 세잔이 새롭게 다가오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규문! 고맙습니다. 샘들도 한주 잘 보내시고 담주 뵈어요.
우와~~~ 일목요연한 후기를 이렇게 빠르게 작성하신 승연샘 역시 능력자!!! 👍 칸딘스키의 글은 이우환 선생님의 글에 비해 더 다가가기 어려웠는데요. 그런만큼 궁금한 점도 많고 샘들의 해석도 더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무엇'과 '어떻게'에 관한 칸딘스키의 의견이, 제가 기존에 생각하던 규정과 달라서 흥미로웠는데요. '무엇'과 '어떻게'가 어떤 배치와 맥락에서 얘기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네요.
영성에 관심이 많았고 그림이 영성을 전달하는 매개로 생각했던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저는 아직 영성을 발견 못했는데, 남은 부분을 읽으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수업 끝나고 휘발되었던 내용을 샘 후기 덕분에 머릿속에 다시 잘 새겼네요. 감사합니다.😉
와아!! 크크랩 최초 당일 후기! 역시 승연샘 최고이십니다! 1조의 토론 내용을 다시 한번 빠르게 복기하게 됩니다~ 1조에서 특히 칸딘스키가 말하는 감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메커니즘을 논의하신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이번주 텍스트 이해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명쾌한 후기 빠르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두 눈을 의심케 하는 속보후기네요. 😊 저희 조에서는 삼각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1조에서 나눈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삼각형의 예각의 정점을 향할 수록 고양된 정신 세계에 가까워지고, 이를 향하기 위해 영혼을 살피며 공부해야한다는 내용으로 이해되네요. 빠른 정리 감사합니다.
이열치열, 역시 더위에는 열정으로!! 따끈따끈한 속보후기(수빈샘!! 저절한 표현 ㅎ)를 숨차게 속독했습니다. 항상 느끼지만 우리 샘들의 복기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토론하면서도 가닥없이 난분분해서 이걸 어떻게 꿰나 싶거든요. 채운샘이 잡아주시는 맥락에 우리 샘들의 살붙이기가 매번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 같아요. 덕분에 복습 야무지게 했습니다.
승연샘~~ 후기 휘리릭 써내시고 (수해)현장으로 달려가셔야했나 봅니다^^
정신의 삼각형의 정점에 높이 오르면 결국 불안에 빠지지 않게 되며 그 과정에 영혼을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흥미롭네요. 문득 승연쌤의 영혼이 궁금해지는데요? ㅋㅋㅋ 지난 에세이때 쌤은 파시즘적 관점에 대해 쓰셔서 승연쌤의 마음에서 예술은 쌤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기대되네요... 벤야민이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품'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거론하며 예술의 정치화를 비판했던 내용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부지런하신 승연쌤~~ 후기 잘 읽었습니다! 토욜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