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 준비를 위해 간만에 일찍 등규문하였더니 마주치는 분들마다 놀라셔서 겸연쩍었습니다. (니가 이시간에?) 지각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번 해봅니다.
ㅇ 소문자 역사들을 읽는 소문자들의 세미나
제게 역사 공부란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잘 정리하고 암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무작정 암기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고, 역사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했는데, 그 흐름이라는 것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이루는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의 관계를 잘 파악하고 의미를 도출하는 것이었죠. 그 습관이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읽는 동안에도 대문자 역사의 렌즈를 벗기 힘들었습니다. 독해도 쉽지 않은 터라, 얼른 선생님의 핵심 정리 강의를 듣고 싶었죠. 과제를 할 때도 ’꿈 아카이브’, 소문자 역사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하나의 포장지로 잘 싸보려는 의식을 버리지 못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들을 '1830년 7월 혁명의 배경과 의의', '생시몽주의의 주요 사상과 푸리에주의와의 비교'와 같은 대문자 역사의 갈래로 분류하고 요약하게 되더라구요.
조별 세미나에서도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방향을 잡지 못해 어지러웠습니다. 7주 정도 멀미를 하다 보니, 같은 책을 보고서도 서로 다른 관점과 해석이 난무하는 시간의 축적이야 말로 소문자 역사를 읽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닐까 깨닫게 됩니다. 저처럼 갈래를 잡으려 애썼던 정우샘은 이제 이러한 역사를 거쳐온 자본주의를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지셨고, 산푸른샘은 랑시에르의 문장의 앞면과 뒷면을 살피며 그의 시선을 좇고 계십니다. 경희샘은 여전히 선생님 안에 작동하는 분할선의 문제를 살펴보고 계시고, 나연샘은 당대의 사상들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현재적 관점의 날카로운 비평을, 주영샘은 이 꿈 아카이브와 후대 자본주의 역사가 이어지는 지점을 짚고 계십니다. 연희샘은 그 날 우리의 이야기와 선생님의 일상에서 맞닿은 경험을 나눠주고 계시고, 우리의 역사 선생님 시누샘은 숨은 역사적 배경과 함께 고니의 자취를 따라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밤, 고니 ‘되기’를 상상하고계신 듯 합니다. 이처럼 소문자 역사를 읽어내는 각자의 관점을 생생하게 듣고 섞어내며 꿈 아카이브에 대한 독해 아카이브를 이뤄가는 세미나 시간입니다.
ㅇ 난무한 해석의 아카이브_7주차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주의의 발목을 잡았던 빈곤문제. 빈곤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 가능할 것인가? 자본주의 이전에도 빈곤의 문제가 있었을까? 빈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 자본주의 이전에는 각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었고, 소유하는 방식에 따라 사회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빈곤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천재지변에 의한 특수한 상황이지, 사회적 문제는 아니었을 것. 생산력의 크기는 한정적이나 모두가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 사회에서, 거의 무한한 생산력을 가진 생산수단을 가진 소수와 노동을 통해 그 잉여를 얻을 수밖에 없는 다수 노동자의 사회로 재편되며 빈곤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 아닐까.
-노동을 통한 영혼의 만족을 약속한 부르주아 사도들의 생시몽주의도, 그들의 도덕적 전제를 비판하며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에 기대 물질적 빈곤의 해결을 우선으로 한 푸리에주의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결국 자본주의로 귀결 되는 것의 아이러니함. 이에 대해 마르크스를 포함한 사회주의 역사의 사상들이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생산-잉여를 전제하고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분할선에 놓여 있음을 지적. 인간이 생각하는 안락함의 전제는 부의 소유를 벗어날 수 없는가?
-결국 어떤 노력에도 경제 양식이 오늘날의 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면, 이 자본주의야 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어쩌면 가장 적절한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혹은 해결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문제제기. 이에 대해 이러한 공부를 통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시도가 중요하다는 감동적인 답변
-푸리에주의가 강조한 ‘매력’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해, 노동을 착취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느끼게 하는 것. 이를 통해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된다. 이는 노동을 자기 욕망의 기반으로 환원한 것으로, 노동을 도덕적 가치로 환원한 생시몽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노동에 대한 분할선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이 와중에 여전히 생시몽주의에도, 푸리에주의에도, 정말 어디에도 편입되지 않는 고니의 독자성에 대한 또 한번의 감탄. 한편 수빈은 훗날 철도사업을 하게 된 앙팡탱과 그에게 일자리를 청탁한 고니의 변화를 일종의 변질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를 ‘근사한 여유’로 바라본 시누샘의 해석을 통해 자신의 관점이 여전히 불우한/혁명적 노동자라는 분할선위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의견을 폐기.
-분할선을 해체하기 위한 노정은 지속될 것.
유독 주관적으로 쓰인 후기이니, 댓글로 조원분들의 활발한 반박과 보완을 부탁드립니다.
수빈샘 덕에 1조 토론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역사를 대문자역사로써 대하는 습을 벗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한편 저는 꼭 그 만큼의 정도로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고니가 답'이라는 무의식이 매 장을 읽을 때마다 펼쳐짐을 느끼네요. 소문자 역사를 대문자화하려는 저의 욕망을 들여다봅니다. ㅎㅎ 1조에서 말씀 나눈 '빈곤의 문제'를 2조에서는 삼중의 실존으로 축소된 쉬잔의 운명을 통해 나누었던 것 같아요. '섬기는 일 대신에 노동하고, 사랑하는 대신에 쾌락을 찾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데지레 베레가 사랑의 포기를 감수하고 쾌락에 만족한다고 할 때의 먹먹함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우리 주변에 편재한 많은 쉬잔과 데지레 베레들, 우리들 자신과 우리 친구들의 모습이 겹쳐 옵니다. 한편, 수빈의 의견을 폐기하게 만든 시누샘의 '근사한 여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네요? 🙂 조원들 각각의 독해 아카이브를 살뜰히 정리하여 펼쳐주신 수빈샘 후기 재밌게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소문자들의 세미나의 복닥복닥. 아기자기, 그러면서도 냉철한 분석도 이뤄지고 자기 안의 분할선을 "깨닫고" "해체하기 위한 노정을 지속"할 것을 다짐하는, 제가 보기에 이보다 꿈같은 세미나가 있을까 싶어요.
제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질문은
"결국 어떤 노력에도 경제 양식이 오늘날의 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면, 이 자본주의야 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어쩌면 가장 적절한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혹은 해결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흥미롭네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있을까? 만약 있다면 하나일까 여러개일까. '본성'은 처음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여겨지고 변하지 않는 본성이라 생각하는데 ᆢ과연 그런 게 있을까. 어렵네요. 인간에. 덮씌운 규정을 벗기기가. 그래서 뻔하지 않은 고니가 낯선가 봅니다.
수빈샘의 후기. 꼼꼼히 정독했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글이었어요~~덕분에 프밤을 다시 파보고 싶은 의욕이 생기네요. 푸리에주의부터 약간 열기가 식으려했거든요. ㅎ
오~~ 중구난방으로 분기되었던 토론 내용을 질문을 중심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핵심적인 부분을 잘 짚어주셨네요. 👍 매주 대문자 역사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인 소문자 역사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한데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리 잡았고, 이 시기에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며 실험을 했는지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당연한 전제가 된 현 시대보다 19세기 초반에 오히려 사유와 문제의식이 더 풍부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면서 전제와 규정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최근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나온 쿠바의 극심한 경제난과 국민들의 물질적 고통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니, 자본주의에 시스템이나 제도적으로 대항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나라는 질문이 들었는데요. 무엇보다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서 독자적인 방식보다는 결국 관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쿠바의 실험도 의미가 있지요. 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통해 고니처럼 우리의 문제를 깊이 그리고 더 넓게 사유하며 얘기를 나눠보아요. 수빈샘의 깊이 있는 후기 덕에 복습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