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차 채운 샘 강의 정리]
크크랩 2학기가 시작되었는데요. 첫 책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민중들의 이미지>(여문주 옮김, 현실문화연구)에서 우리는 이미지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채운 샘께선 이 책을 통해 작품 분석을 할 때 어떤 지점에서 어떤 논의들을 가지고 와서 풀어내는지, 이미지를 맥락화하는 방식을 배워 보라고 하셨죠. 또한 조별 토론할 때는, 읽은 부분의 제목이나 키워드 등의 핵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규정할 때 각자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는지, 그 전제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들을 통해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공부한다는 것은 매번 어떤 ‘렌즈'를 갖는 것이며, 렌즈들을 바꿔 끼는 과정에서 자신의 시력을 조정하는 것, 즉 자신의 고민의 지점과 맞닿는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지난 학기에 읽은 랑시에르의 정치에 대한 개념 렌즈로 우리 삶을 바라본다면, 지금까지 정치라고 생각해 왔던 많은 지점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즉, 우리가 평소 정치적인 것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보지만 기존의 경계를 강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은 아무리 정치 얘기를 하더라도 ‘치안’ - 랑시에르가 정치를 새롭게 정의하면서 그것과 대비하여 만든 용어인 - 의 영역으로 불러야 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이다는 것은 주제로 삼은 것이 정치일 때가 아니라, 어떤 것들의 경계를 계속 의심하고 교란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읽기 시작한 <민중들의 이미지>도 치안적으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것과 싸우는 것으로서 예술의 문제를 다룹니다. 민중을 찍는다는 것이 뭘 찍는 걸까? 민중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민중을 드러낸다고 하는 많은 과잉노출의 이미지들이 과연 민중인가? 과잉 노출로 인해서 안 보이는 게 있다는 것. 노출과 은폐 사이에서 어떤 것을 민중적 이미지로 선택할 것인가? 선택 자체가 느낌이고 판단일 때 예술과 윤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등의 많은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책 초반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필리프 바쟁의 사진을 통해 예술가가 무엇을 다룰 것인가 - 누구의 시선과 목소리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 자체가 이미 윤리이자 정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지금까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기 몫을 갖지 못한 이들을 조명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자 정치였던 점을 다시 한번 환기하게 됩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파울 첼란, 프리모 레비의 증언 문학들은 끊임없이 ‘내가 증언할 자격이 있을까?’란 질문을 제기한다고 하는데요. 살아돌아온 자로서 나는, 호명을 받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옆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던 자로서 나이기도 하죠. 진짜 증언할 자격이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인데 죽은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은 증언할 수 없기에 살아 돌아온 그들은, 유일하게 증언할 자격을 가진 유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집니다. 나는 누구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란 선택의 문제는 그 자체로 예술의 윤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치매 노인들은 시선을 가질 수 없다고 보는데 그들이 보는 세상은 어떨까? 우리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이미지의 정치성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강독해 주신 몇몇 구절들을 짚으며 마무리하겠습니다.
(30) 민중들은,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에서 ‘자신들을 위한 이데아'를 가졌을지 의심했던 그 ‘비루한 대상’-체모, 진흙, 때-과 같지 않을까?
→ 플라톤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데아를 갖고 그것으로부터 모방물이 생겨납니다. 플라톤에게서 우리는 이 이데아와 모방물의 관계만을 보게 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플라톤이 정말 밀어내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데아라는 원본이 없는 환영들 - 시뮬라크라였습니다. 먼지, 때, 아지랑이 같은 존재들은 원본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없이 그때그때 차이로서 존재하므로 특정한 스테레오타입을 가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이 ‘있다'라는 것을 연장적인 개념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일 무엇이,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있음'을 보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인데요. 플라톤의 시뮬라크라는 느끼고 발견하는 순간 존재하게 되는 것들이고,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민중이 바로 ‘누가 어떤 것을 민중으로 발견하느냐. 누가 그것에 시선을 던지느냐’에 따라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31-32) … 우리는 외양에 속박되어 있지 않으며, 소위 말하는 진정성(절대적 진리)이라는 것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다. 존재와 외양은 실로 같은 하나이다. 오직 외양만큼 정치적인 것이 있을 따름이며, 거기에 그것의 고귀함이 있다. 존재가 외양과 맺는 관계가 모방적 관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지만, 또한 감춰진 것과 현시된 것, 은닉된 것과 노출된 것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는 … 항상 현시되는 것의 편에 있다. 이 현시는 [고전적인 의미의] 재현 문제와 관계가 없는 만큼이나, 현시될 수 없는 것의 문제와도 관계가 없다.
→ 형이상학은 존재(있다)와 외양(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현상)을 구분했는데,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어떤 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와 그것의 존재는 분리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반딧불의 잔존>에선 국경을 넘는 난민의 존재가 반딧불과 같은 미미한 외양을 통해 드러나듯 존재와 외양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32) 그렇다면 이 정치적으로 나타나기, 이 민중들의 나타나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나 아렌트는 얼굴, 다양성, 차이, 간극 등 네 개의 패러다임을 환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얼굴. 민중들은 추상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몸으로 만들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제시하고 노출한다. 다양성. 물론 이 모든 것은 그 어떤 개념도 그것을 종합할 수 없는 유일성-유일한 운동, 유일한 욕망, 유일한 발화, 유일한 행위-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군중을 만든다.
→ 추상은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기에 어떤 것이 추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체적 눈코입이 매번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된 얼굴은 추상이 아닙니다. 구체적 장에서 행동하는 여성이 있을 뿐, 여성은 추상화된 여성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존재들을 추상적 규정으로 덧씌우려고 할 때 우리는 폭압적이 됩니다.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또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 환원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유일한'이라는 뜻은 singularity 독특성(특이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요. 가령 우리의 신체는 모두 인간종으로서 비슷한 세포수 분포 등을 가지지만 각자의 신체는 모두 다 다릅니다. 아주 복합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독특함을 유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위인들은 그 유일성을 얼굴에 부여받지만 민중은 얼굴이 없습니다. 그러한 민중에게 고유한 형상을 부여한 고야와 같은 화가도 있죠. 특이성은 규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채운 샘께선 말씀해 주셨는데요. 결합 요소는 같다고 해도 결합한 것은 다르며 여성성은 여성의 수만큼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에 어떤 뉘앙스를 부여하는가 그 의미를 다르게 띠도록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필리프 바쟁(Philippe Bazin) '탄생연작' 젤라틴 알루미늄에 실버프린트 44.6×144.2 cm (1998)
(63) 왜냐하면 신생아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볼 시간이 없었던, 그렇지만 어렴풋이 삶을 향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미 강렬하고, 이미 집중하고 있으며, 이미 호소력있고, 이미 주의 깊은 눈을 뜨고 있는 존재로, 아직 바라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노인의 경우, 삶을 이미 전부 또는 너무 보았던 그는 아마도 더는 진짜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바쟁이 “동물성"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아마도 일종의 최저 생명선에 집결된 이 인간성에 다름없는데, 여기서 각각의 강렬함은 무정형과 맞서, 그리고 각각의 몸짓은 바로 그 몸짓 실행의 불가능성과 맞서 싸운다. (...)
외설적 존엄성이라고? 우리는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판단의 통상적 범주에 대한 이 도전을 앞에 두고서 아마도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표현, 다시 말해 몸에 관한 모든 이미지와 모든 연극을 위한 가혹한 요구처럼 이해되는 잔혹성에 대한 그의 표명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필리프 바쟁은 그 이미지들이 벌거벗은 삶의 초라한 편린으로, ‘텅 빈 힘[들]’ 또는 ‘죽음의 장[들]’이기도 한 유일한 얼굴로 축약된 휴머니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잔혹한' 이미지를 생산했을 것이다.
→ 이 구절에서 외설적이라는 의미는 분명 바쟁이 포착한 아기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인데 우리가 기대하고 떠올리는 아기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섬뜩하고 낯선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타유의 외설과 아르토의 잔혹함은 인간의 가장 낯선 모습-가령 수치심과 금기가 작동하는 섹스와 죽음 (무엇을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행위- 등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의 상태에서 오히려 ‘인간성’의 뭔가를 끄집어 내려고 시도했다는 지점에서 통합니다.
바쟁의 사진은 흔히 얘기하는 인간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인간이라는 형상을 위협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에게서 우리는 문명이라든가 우리의 일상으로 집어넣기에 겁나는 것을 볼 때 느끼는 공포를 느낍니다. 일반적 앎의 체계 속에서 소화시키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고 정리되지 않는, 듣도 보지 못한 최초의 사건이 주는 트라우마와 같은 것으로서의 폭력이나 외설. 그러나 이러한 외설적인 것이 존엄함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고 없는 것 취급하는 것을 클로즈업해서 맞닥뜨렸을 때 더 이상 추상화되지 않은 삶이 주는 내밀함을 공유하며 우리가 그러한 존재와 함께 살고 있음을 잊지 말길 촉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나를 형성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는 점. 바쟁의 사진은 모든 얼굴이 아니라 특정한 바로 ‘이 얼굴’을 통해 고유하게 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쟁의 사진으로부터 우리는 예술이 구체적 삶의 현장을 가진 존재, 그러나 없는 셈 치는 존재들 -을 포착하는 것임을, 또한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고 윤리의 문제임을 보게 됩니다. 이 점에서 비평은 내가 어떤 사진을 어떤 영화를 이야기할 것인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2주차(5/11) 공지]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민중들의 이미지>를 2장. 그룹초상까지 읽으시고 발제 및 공통과제 작성하셔서 금요일(10일) 저녁 8시까지 올려 주세요.
2) 미술사진팀은 로절린드 크라우스의 <언더 블루 컵>, 영화팀은 <세계영화사>를 조별로 발표 순서에 맞춰서 정하시고 읽어 오시면 되어요.
3) 다음주 간식-후기-정리는 인영샘, 신우샘께 부탁드려요~
4) 다음주 수업 후, 채씨네에서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노 베어스> 2024, (107분)를 상영하오니 많은 분들 함께해요🤗
바쟁의 노인과 아기 사진이 보여주는 동물성, 일종의 최저 생명선에 집결된 인간성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인간에 대한 관념, 인간성에 대한 선입견 등을 깨워주는 작품이었죠. 아기의 극도로 연약한 얼굴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시간과 고통과의 싸움에서 보이는 매우 비극적인 의미의 파토스가 나타납니다. 이번 수업에서도 무엇을 볼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보고 드러낼 것인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디디씨와 함께할 이미지 공부가 우리를 사유의 길로 이끌겠죠. 쉽지 않지만 새로운 길에 대한 도반들과의 즐거운 탐사가 예상됩니다.😉 힘들고 바쁜 와중에 강의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 넘넘 감사합니다.👍💚
렌즈를 갈아끼우니 추상적으로 다가오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삶을 공유하는 중에 나의 세계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없다고 생각했는지 질문하게 되는거 같네요. 분할선의 흔들림이 함께 공부하는 장이 만들어내는 효과임을 다시 느껴봅니다!! 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