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투사 그리고 사유하는 철학자 푸코
혼전의 대통령선거가 엎치락뒤치락 결정되고, 강원과 동해에 연이은 산불로 모두의 마음까지 타들어 갈 즈음 단비가 감사히 내리는 월요일이었습니다. 오늘은 68혁명 후속으로 세워진 ‘뱅센실험대학’과 역사와 권위의 대중강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의 정치적 활동과 지적사유에 대해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푸코는 활동범위가 광범위했으며 관계는 다양했습니다. 구조주의의 형식을 띤 글을 썼고, 한 때 마르크스사상에 경도된 적이 있었지만 이후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심리학, 정신분석학, 문학, 역사 등에도 심오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곳곳에서 푸코의 저항하는 목소리를 뱔견할 수 있었습니다. 뱅센실험대학 존폐논의에 항의하고, 감옥정보그룹활동과 이주노동자 사건 항의 등 국외까지 종횡무진한 푸코를 쫓아가느라 우리도 많이 바빴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규정짓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푸코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달라“, ”철학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라고 묻습니다. ‘그의 글과 강의는 뒤죽박죽되기도 하고 비늘모양처럼 한데 겹치거나 포개지고, 서로 단절되거나 중첩된다.’고 에리봉은 표현했지요. 정말 그의 말대로 그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광맥을 캐는 광부처럼 우리에게 들리지 않은 목소리를,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시선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앎의 구조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는 무엇의 전달자였던 것일까요.
‘두 모습의 푸코’라 책에는 쓰여있지만, 그의 실천과 사유는 분리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정면으로 싸우는 투사의 모습으로, 어느 때는 도서관에서 고문서를 뒤적거리며 사유의 체계를 분석하는 치밀한 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던 푸코. 그가 한 앎의 분석 자체가 학문적, 이론적 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닌 ‘일상적으로 규제받는 실천들’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새롭게 읽었습니다. 사유의 시작이었던 박사논문 <광기와 비이성> 속에서 이미 그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고문서 속 웅성거림에 주목하고 있었고, <말과 사물>은 우리의 사유체계가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 발생되고 분산되어왔는지 앎의 층위들을 펼쳐 보여준 것이라 합니다. 우리가 의심없이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실증적, 동일자적 앎들의 출현과정을 보여주니까 모닝빵처럼 팔려나갔겠지요. 우리자신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샘들도 빨리 읽고 싶으시죠?
지식인의 역할, 실천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왔습니다. 격렬했던 이번 대선의 후폭풍-감정을 모두들 겪고 있는데요. 누구라 말하지 않아도 노곤한 얼굴이 잘 말해주고 있었지요. 어떻게 겪어나갈 것인가, 우리는 푸코를 통해 길을 찾아나가기로 해요. 마오이즘처럼 추상적인 중심, 거대담론에 의존하지 않고 푸코는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타협할 수 없는 제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끊임없이 해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체적 현장’이란 뭘까요? 난희샘이 묻고 정리를 해주셨지요. 현장이란 각자 자기자리에서, 관계 속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일 뿐, 나자신의 불편한 지점을 살펴서 그것이 무엇인지 보는 것도 한 발 내딛는 거라고요. 건화샘의 뭔가 실천은 결정적이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상일 뿐. 그런 관점에서라면 나는 언제나 불완전, 미완성인 상태로 있을테니까요. 저 역시 그런 주저함 속에서 아름다운 타협점을 찾아 성급한 결론을 내렸던 것 같고요. 그래서 온전히 불편하고 서걱거리는 감각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또 일상의 지질한 싸움은 엉렁뚱땅 얼치기로, 혹은 대인배처럼 위장하고 위안하며 넘어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인간의 품위를 잃게 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에 대한 관념, 인간화 역시 구성물이라고 했을 때는 뭔가 다른 차원으로 이해의 관점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 생각의 그물 속에서 이리저리 얽히는 중이네요. 푸코가 자신의 문장이나 관념, 어떤 분석을 연장통으로 사용하길 바랐던 것처럼 내게 익숙한 전제, 혹은 습관을 어떻게 다르게 볼 것인지 그의 드라이버와 펜치를 다부지게 잡고 세밀하게 풀어봐야겠습니다.
‘실천적 대안은 뭔가, 답답하다’라는 성연샘 마음과 같이 먼저 푸코를 공부를 시작한 샘들도 그리 시원하지는 않습니다^^그 대신 진득하게 이해해보려는 수양의 정신을 기르고 있다 할까요. 정답을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 스스로가 수동적 주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네요. 푸코가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와 실천은 자기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것. 그는 제도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려 했고, 그 속에서 우리의 예속성을 발견하고, 주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계-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주체가 되는가?’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되겠습니다. 한계-경험은 관계망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주체의 소멸이나 분해에 이를 수도 있는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경험인데 파편화된 우리 존재는 늘 바깥으로 눈을 돌리고 맞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푸코가 인간과학이라는 근대의 앎의 형성을 통해 우리 삶의 토대를 보여주었다면 좋은 삶의 발견은 거대 담론의 대의나 보편의 목적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앎과 실존 속에서 자기를 정립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일 수밖에 없겠군요. 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셨던 ‘철학은 답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문제제기를 통해서 우리는 능동적 주체화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겠지요.
또 새롭게 보였던 것은 감옥정보그룹의 해체에서 푸코가 보여준 태도였어요. 사법에 의해 사회적으로 배제된 당사자들이었던 죄수행동위원회의 목소리가 시작되면서 이전의 투쟁조직이었던 감옥정보그룹은 해체가 되었지요. 이 해산과정에서 푸코는 씁쓸함과 실패의 감정을 느꼈지만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이 부분이 푸코의 남다른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패에 분노하고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지식인 참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시험할 수 있었던 ‘모험’이며 ‘경험’이 중요하고, 참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 즉 그러한 경험인 감옥정보그룹은 ‘언표생산’의 한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둡니다. 갇힌 자와 아닌 자들에 의해 말해진 언표들은 과거에는 결코 말해질 수 없었던 것이었지요. 한 번 부여했던 의미(마치 소실점처럼)에 대해 상황과 조건이 변했음에도 당위로 이어지는 행동에 대해서 예리하게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식-권력-주체의 관점으로 푸코의 사유가 계속 이동하는 것도 우리자신이 경험과 실천의 과정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존재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연결해서 이런 언표의 방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의 상상력을 점검해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언어를 참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분할선에 가려져 있는 낯선 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 일상을 매번 그대로 살아가고 느낀다면 그런 감각을 어디서 일깨울 수 있을까요? 샘들과 만나 함께 푸코를 읽고 매번 깨지고 새롭게 느껴지는 이 시간들이 바로 그 이유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깊게 나누지 못한 것으로 ‘담론의 물질성’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될 이야기이기에 연관된 인용문을 올려놓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담론이 무한히 증식한다는 사실이 왜 그토록 위험하게 여겨져야 할까? 도대체 그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오늘 저녁에 펼치고 싶은 가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힘과 위협을 제거하거나 담론에서 야기될 수도 있는 사건을 통제하고 또 그 담론의 무겁고도 무시무시한 물질성을 회피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는 어떤 절차들이 그 사회의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택하고 조직하며 재배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외관상 우리 문명보다 더 담론을 존중하는 문명이 어디 있는가?..”(364)
건화샘이 달리전을 보고 마네와의 차이, 재현과 전복의 차이를 직감했다고 했지요. 계절은 새롭게 돌아와 따뜻한 봄날이 되었습니다. 우리 일상의 익숙함을 다르게 비틀어버리거나 세계관의 균열을 표현하는 예술의 세계로 잠시 시선을 옮겨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계속 맞딱드리는 것은 우리의 앎이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들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는데, 모든 사물이나 존재가 바로 ' 경험과 실천의 과정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존재' 라고 하는 말이 깊이 와 닿네요... 결국 내가 아는 것을 시도해보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갑니다^^
그게 참 어렵습니다. 절대적인 해결이나 전인민의 구원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는 실천이란 어떤 것인지... 담론의 물질성... 은 다음 주에 함께 이야기 해보아요~ ㅎㅎ
"아름다운 타협점을 찾아 성급한 결론을 내렸던 것 같고요. 그래서 온전히 불편하고 서걱거리는 감각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
이 부분이 특히 공감이 가네요. 누군가에게 사람 괜찮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 부품한 자기기만, 푸코가 참을 수 없었던 것 중 하나가 아닐까 ᆢ싶어요. 진득한 수양의 기운이 느껴지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사유와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던 푸코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저도 함께 무엇인가를 새롭게 보고 싶네요^^
"실천은 결정적이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탁 들어오는 문장이네요. 공부하면서 뭔가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알아서 구하라니 뒷목이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해보니 제 아무리 세상을 꿰뚫는 현인이라 해도 내 삶을 구현해 나가는 데 있어 "이게 정답이다!"라고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습니다. 푸코의 말대로 철학은 연장통이라는 것. 철학을 통해 내 삶에 필요한 기술을 어떻게 습득할 것인가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라는 것 . 이게 진정한 공부라는 걸 깨달았지만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고 지지부진해 보일 때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과제를 해야 된다는 중압감에 느낄 겨를이 없었던 걸까요? 그런데 채운 샘이 하신 말에 "와! 나도 모르는새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리치 최종본 원고 냈을 때 그러셨거든요. "발가락으로 쓰던 사람들이~~" ㅎㅎㅎ 미영샘이야 원래 잘 쓰던 사람이니까 예외일지 모르겠는데 꼭 절 두고 하는 말씀 같았어요. 네, 저 발가락으로 썼던 사람이죠 ㅎㅎ. 그래서 새로 온 샘들이 모르겠다고 걱정을 하면 내가 처음 공부할 때보다 훨씬 나은데 웬 걱정들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하게 되더라구요. 푸코 평전에서 일리치 글쓰기를 얘기하는 건 그렇지만 공부라는 점에선 다를 게 없어서 하게 됐네요. 암튼 항상 중심 잘 잡고 든든한 미영샘. 샘을 보면서 배울 게 많은 사람이로구나라는 생각을 늘 해요. ^^
엘리트 코스를 밟고 그 속에 잘 안착한 푸코이지만, 그에겐 지식인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참을 수 없는 것들과 투쟁하는 삶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 것 같아요.
혼전의 대선이후, 나는 무엇을 참을 수 없기에 이렇게 힘든지 고민중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