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미셸 푸코 1926~1984』 2부 4~6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푸코는 『레몽 루셀』을 비롯하여 바타유, 클로소프스키, 블랑쇼, 로브그리예 등 여러 작가들에 대한 평론을 썼고, 『임상의학의 탄생』과 『말과 사물』을 출간했으며, 『말과 사물』이 일으킨 소란을 뒤로하고 튀니지로 떠났습니다. 저는 5, 6장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구조주의 논쟁’도 재밌었고 푸코가 튀니지의 학생운동에 휘말려들어 ‘정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대목도 두근두근 하며 읽었습니다.
『말과 사물』은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이론적이고 전문적인 책으로 다가옵니다. 푸코 스스로도 『말과 사물』을 ‘방법의 책’이라고 명명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 책이 ‘1966년 프랑스’라는 조건 속에 놓이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투쟁적 텍스트가 됩니다. 디디에 에리봉에 따르면 “『말과 사물』 그것은 우선 현상학에 대한 거부, 부인의 제스처”(281쪽)였습니다. 『말과 사물』은 본래 투쟁적 철학서였으나, 싸움의 상대인 현상학이 퇴조함에 따라서 오늘날에는 그 풍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푸코는 ‘인간과학의 고고학’이라는 부재가 달린 이 책을 통하여 무엇에 맞서 싸우고자 했을까요?
현상학과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의 기획은 푸코에게서 칸트의 『인간학』 서문을 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푸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질문 방식 자체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인간이 인식의 주체인 동시에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이성의 한계와 조건을 인식하는 일을 이성에게 맡긴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과학이라는 이러한 기획은 결국 인간 자신의 시선을 초역사적인 위치에 놓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 자신을 객관적 앎의 대상으로 객체화하는 것으로 결론 납니다. 인간의 시선은 특권화되는 반면 그 존재는 생기 없는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인식의 특권화를 통하여 인간은 표준화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규명 가능하며, 따라서 얼마든지 획일적으로 관리하고 개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이러한 인간과학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현상학과 실존주의에 대한 거부가 되는 걸까요?
“우리는 사르트르 세대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삶과 정치와 실존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용감하고도 덕성스러운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전혀 다른 것, 전혀 다른 열정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개념에 대한 열정이며 내가 ‘체계’(systéme)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열정입니다”
1966년에 『라 켕젠 리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푸코가 한 말입니다. 푸코가 현상학과 실존주의에 대해 제기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일단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좀 공부하고 또 『말과 사물』을 읽어봐야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은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이해해보는 수밖에 없겠죠? 아무래도 푸코는 인간 자신이 이 세계의 총체적인 ‘의미’라거나 ‘역사의 방향’이라고 하는 것들을 결정할 수 있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는 이 근대적인 망상과 싸워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기존의 가치들이 의문에 붙여지는 가운데, 사르트르는 여전히 ‘인간’의 편에 서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세계에 의미를 주는 존재인 인간으로서, 의미와 가치가 무너져내리는 시대 속에서도 그것을 재발견하고 복원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주장했던 사르트르는, 그러니까 인간의 실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의미를 발명하고 가치를 세울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이죠.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에 나오듯 ‘인간은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푸코는 그러한 노력이 ‘덕성스러운’ 것임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런 나이브한 덕성으로는 이 현실을 돌파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 같은 전전(戰前)세대에게는 그 말이 먹힐지 몰라도 푸코 자신의 세대에게는 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과 인간이 세계를 보는 관점 자체의 전복이 필요하다고 느낀 걸지도 모르겠네요. 인간의 비대한 자의식을 부수기 위하여 푸코는 인간이란 아무 시기에 아무 것에 대해서나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초시간적인 존재가 아니라 (폴 벤느의 비유를 빌리자면) 어항 속의 물고기 혹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어두운 밤을 운전하는 운전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푸코가 ‘체계에 대한 열정’이라고 부른 것에 당시 사람들이 반응한 것을 보면, 당대의 젊은 사람들은 근대인 특유의 기만적인 비장함에 지쳐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구조들이 기능하는 엄격한 이론 분석의 방식이 정치적 행동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행동이란 구조들을 다루는 방식이며, 결국 구조를 바꾸고 뒤흔들어 그것을 완전히 변형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나는 구조주의가 오로지 책상머리 지식인들의 이론적 활동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실천에 접목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접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조주의가 모든 정치적 행동에 반드시 필요한 분석적 도구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라고 해서 꼭 무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푸코, 룬둥과의 인터뷰)
이것은 푸코가 구조주의자를 자처하던 시기의 인터뷰입니다. 푸코는 인간을 역사를 바꾸는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서도, 인간에게 세계에 의미를 주고 역사를 진보로 이끌 거짓 사명을 부여하지 않고도 충분히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정치적 실천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상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겠죠. 현재 우리의 존재방식과 담화의 양식을 규정하는 담론적이고 비담론적인 조건을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힘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관계맺을 것인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푸코에게는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시대를 짊어진 인간의 경직된 이상주의와 허무주의가 자리할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지적이고도 구체적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심이나 결정적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 자신의 변환과 능동화를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푸코적인 ‘실천’과 ‘정치’란 무엇인가. 이건 우리가 앞으로 공부하면서 계속 질문하고 답해나가야 할 주제인 듯하네요.
다음 시간에는 『미셸 푸코 1926~1984』 3부 1~5장을 읽고 과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과제 프린트는 현정샘, 설샘, 미현샘께서 맡아주셨고요. 다음시간 간식과 후기는 미영샘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나의 중심으로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자기변환의 운동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충분히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정치적 실천.. 생각이 필요하네요..
후기 한 번 쓰기도 너무 어려운데 늘 이렇게 공지를 통해 모르는 것도 알려주시고, 공부한 것도 정리해주시는 건화샘 감사와 감사를 드립니다~!!
글로만 보다가 사진으로 보는 푸코도 반갑네요. 오랫동안 아는 사람 같군요~^^
'하나의 중심으로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자기변환의 운동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충분히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정치적 실천.. 생각이 필요하네요..
후기 한 번 쓰기도 너무 어려운데 늘 이렇게 공지를 통해 모르는 것도 알려주시고, 공부한 것도 정리해주시는 건화샘 감사와 감사를 드립니다~!!
글로만 보다가 사진으로 보는 푸코도 반갑네요. 오랫동안 아는 사람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