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새해, 우리는 새해를 몇 번이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정 한번 구정 한번, 뭣보다 공부를 하는 우리들에게 새해는 뭐니뭐니 해도 공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날이 새해겠지요. <방법론으로서의 푸코>!! 지난해 <욕망인의 계보학>이라는 타이틀로 만난 푸코에 이어 다시 만납니다. 욕망인이라니! 우리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제를 의심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푸코의 욕망인의 계보학이라 불리는 <성의 역사>는 욕망이나 성을 실체로 두고 그 욕망, 그 성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깨부셔버렸습니다. 건화샘은 이번 세미나의 타이틀을 <방법론으로서의 푸코>라고 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푸코의 저작을 탐험책과 방법론 즉 도구로서의 책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 같은 책이 푸코가 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를 들고 철학적 실험과 탐험을 한 책이라면 이번에 우리가 다룰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 같은 초기 저작이 바로 푸코의 철학적 사유 방법, 문제 접근 방법 즉 도구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죠.
읽을수록 밀림인 푸코를, 뭐 하나를 알면 남들한테 자랑하기 바쁜 요즘 같은 때, 몇 년을 공부해도 누가 ‘담론’‘언표’‘에피스테메’‘통치성’이 뭐냐? 고 물으면 갑자기 자라목이 돼버리는 푸코를 우리는 왜 공부할까? 왜 푸코를 놓지 못할까? 오늘 함께 공부하러 오신 도반들을 보면서 반가움에 엔돌핀이 막 솟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매일 규문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면서 푸코 세미나에 등록한 분이 누구일까 확인하는 게 습관이었거든요. 그런데 등록된 숫자보다 훨씬 많이 오셔서 세미나 분위기가 열기로 가득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첫 시간이니만큼 각자 자기소개를 하면서 푸코를 공부하게 된 계기를 말했습니다.
저에게, 우리에게, 왜 하필 푸코일까요? 어느 인터뷰에서 푸코는 자신의 관심사는 시종 ‘주체화’의 문제였다고 한 적이 있죠. 제게는 푸코가 내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철학자, 나는 어떻게 해서 이런 나가 되었는가, 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끝없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론을 생산하고 그 문제를 넘어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푸코도 자신의 이론적 작업이 자신의 ‘자서전의 한 조각’이라 했고 그 ‘이론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철학적 사유를 부르는 ‘이론적 욕망의 핵’(미셸 푸코 1926~1984 23P)은 항상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 내가 관여하는 제도들 속에,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균열. 미세한 진동. 기능장애’(54P)들 속에서 발견된 것들이라 했죠. 철학자의 사상은 그의 삶의 징후의 표현이라는 니체의 말과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이러면 철학이 주는 이미지가 우리가 그동안 철학에 대해 품었던 ‘진리’를 찾아가는 특이한 천재들만의 고행길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되죠. 일상과는 동떨어진 어딘가에 존재하는 진리, 진리에 대한 초월적이고 숭고하고 초역사적인 이미지 말입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과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을 결부시켜놓고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앎은 불완전한 앎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공부에 대한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종종 느낍니다만, 푸코를 공부하면서 저는 공부를 한다는 게 어쩌면 저항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적 번뇌야 내가 의도했건 말건 일어나는 일이고 거기 일일이 반응하는 것이 능동적인 삶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확실한 것, 푸코를 만났으니 쉽건 어렵건 그의 실험에 동참해보는 것, 이게 능동성이 아닐까. 그걸 저항, 혹은 ‘반성적 불북종’ ‘아스케시스’라는 멋진 개념으로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디디에 에리봉이 쓴 푸코 평전을 꼼꼼히 읽고 연보를 만드는 과제를 하면서 놀랐던 것은 프랑스의 고등사범학교 합격 기준이 엄청나다는 것과 푸코가 섭렵한 지적 영토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죠. 우리가 귀동냥으로나마 들었던 거장들이 한 시대 같은 공간에서, 우리들처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부했던 사람들이었다니! 푸코가 만난 스승들, 특히 장 이폴리트와 캉길렘, 알튀세르 같은 스승들의 영향 속에서 그의 저작들의 싹이 자라고 키워져 왔다는 사실은 감동이었습니다. 푸코가 살았던 시대가 우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현대인데도 마치 아득한 고대와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쩐 일일까요? 푸코를 공부하면서 얻는 중압감 내지는 지지부진 속에서도 느껴지는 뿌듯함은 공부할 게 엄청나게 많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작년에도 푸코가 아니었다면 평생 읽을 일이 없었겠다 싶은 고대 철학자들의 텍스트부터 중세 기독교 교부들의 텍스트를 읽게 되었고 푸코의 분석을 통해 그 텍스트들이 지닌 위치를 가늠하게 되었지요. 올해도 첫 시간인데도, 벌써 푸코의 스승 장 이폴리트가 프랑스에 소개한 헤겔이 그 시대 지적 양심들에게 어마어마한 태풍이었다는데, 어떤 지점에서 그랬는가를 두고, 아는 것이 쪼가리만한 우리는 이런가 저런가 머리를 맞댔습니다. 푸코가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넘어섰다는데, 주체주의와 총체화하는 지식인의 이미지와 목적으로서의 역사 진보주의를 넘어섰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여전히 어디서 주워들은 ‘설명’에 그쳤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정도를 ‘아는’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가 좀 더 세밀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 속의 커다란 질문 하나에 비추어, 현상학이란 그리고 실존주의란 우리의 어떤 사고방식과 맞닿은 사유방식일까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푸코가 이런 사상들을 넘어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헤겔의 '절대정신'과 현상학의 그 '현상'과 실존주의의 '주체'를 넘어서는 걸까요?
또 하나 제가 느낀 것은 푸코가 당대가 설정한 문제에 포획되지 않고 그 문제 설정 자체를 회의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푸코가 1차적 삶의 경험을 문제화하는 방식이었다는 거죠. 저는 푸코가 스승 장 이폴리트의 추모식에서 “철학적 사유란 끊임없는 실천이고, 철학 아닌 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이란 것을 가르쳐”준 스승에게 “그리고 우리의 존재와 엮여있는 그 비-철학 옆에 항상 가장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는 글을 읽고 울컥했습니다. 푸코는 참 뜨거운 사람이구나, 나 같으면 꼴 보기 싫은 것들한테는 당장 금을 그을 텐데, 싶더라고요. 푸코는 자신의 당면한 성 정체성의 문제로부터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깊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왜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와 같은 직업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디디에 에리봉의 이 말에서 저는 푸코를 깊이 느낍니다. “푸코의 모든 작품을 그의 동성애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록 최초의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실존적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경험 속에서 하나의 지적 기획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리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에서의 투쟁 속에서 하나의 지적 모험이 어떻게 창안되는지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사회적 투쟁 속에 매몰되지 않았고, 다만 그것들을 사유하고 극복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 예컨데 정신의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의 질문을 아이러니하게 뒤풀이하는 형태로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은 당신의 이성에 대해, 당신의 과학적 개념에 대해, 당신의 지각 범주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것들을 문제화했다.” (54P)
공부거리가 풍년입니다. 푸코가 이끌렸던 작가들의 ‘위반’과 ‘한계 경험’이라는 게 뭔지, 그들을 통해 푸코가 희미하게 희망을 느꼈던 ‘광인 철학자의 가능성’이 뭘 의미하는지, 새록새록 궁금증이 마구 피어오르네요. 쉽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헤맬 것이 분명하지만 그 시간에 우리의 일상적 번뇌들은 저만의 길에서 멀뚱하겠죠. 우리는 우리끼리 놀면 되지않을까요?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철학적 사유란 끊임없는 실천이고, 철학 아닌 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이란 것을 가르쳐”준 스승에게 “그리고 우리의 존재와 엮여있는 그 비-철학 옆에 항상 가장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배웠다...비-철학 옆에 항상 가장 가까이.. 생각할 수록 뜨거움이 느껴지네요.
푸코를 읽으면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치밀과 치열함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문제의식을 중심에 잡고 푸코가 문제를 제기하고 접근해나간 사유방식을 차근차근 배워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습니다.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고, 공부해야할 것의 풍년이라 놓치게 됩니다@@
난희샘~ 풀어놓으신 세심한 공부방향과 풍성한 후기 감사합니다!^^
푸코의 철학사적인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 푸코가 무엇과 싸우고 있으며, 어떠한 전제나 상식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는지, 또 어떠한 토양 위에서 사유를 펼쳐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걸 교과서적으로 '설명'하는 걸 넘어서, 푸코가 극복하고자 했던 사유가 "우리의 어떤 사고방식과 맞닿은 사유방식일까"를 고민해보자는 샘의 제안이 깊이 와닿습니다~ '철학이란 철학 아닌 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이라는 말을 해석하신 방식도 생각거리를 주네요. 푸코와 또 푸코 세미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후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뉘 첫시간부터 이리 풍성히 공부하셨다니후기만 읽고도 푸린이는 벌써 자라목 되었습니다 ㅎㅎ 난희샘 후기 덕에 첫시간이 얼마나 신선한 열기에 차있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난희샘 너무 반가워요 고이신 물님들 많이 가르쳐주세요~
설샘을 푸코의 중매로 만나다니~~~ 놀랍고도 기쁘네요. 가르쳐드릴 수준이 못됩니다. 다만 손잡고 맘껏 헤메드릴수는 있지요~~~^^ 반갑습니다 설샘!!
평전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푸코의 성 정체성으로 푸코의 저작을 말한다는 것이 꺼려졌습니다. 그 이유는 일부분을 전체인 양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게 되면서 굳이 성 정체성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부담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푸코는 개인사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있는 성 정체성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의 철학은 시작된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푸코의 이론 작업이 그의 자서전 한 조각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고 해서 무조건 철학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겁니다. 난희샘의 멋진 후기를 읽고 지난 시간을 다시 더듬어보았습니다. 푸코가 스스로를 문제화하고 탐구했던 방법론을 놓치지 않고 가다보면 저도 철학이란 걸 한다고 여기게 되는 때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얘기하고 나니 좀 민망하네요. ㅎㅎ 여튼, 두렵고 막막하면서도 왠지 설레는 이 맘을 잘 다스려가며 샘들을 믿고 총총총 따라가보겠습니다. ^^
여기가 푸코 맛집이네유 찬거리 풍성한것좀봐
담에 또 올게유
수업 시간마다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샘, 샘하고 같이 공부하게 돼서 참 좋구요. 저는 푸코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아무리 고민해봐도 속이 시원해지는 커녕 더 혼란스럽고 맴돌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다 보니 "고민해 본들 별 수 없네" 하면서 포기하기를 반복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푸코는 "나를 어떻게 조형해 갈 것인가" 자기 윤리를 구성하라는 건데 처음에는 이것 역시 애매하긴 마찬가지였어요. 사고를 바꾸는 게 하루 아침에 되는 일도 아니고 실천이 쉬운 노릇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공부할수록 이보다 구체적인 답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본주의는 완전한 삶의 표준이 있는 것처럼 환상을 유포하는데 완성된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하고 있는 행동, 그게 내 모습이고 실천이라는 것. 그 것 이상이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주 깜빡깜빡 잊고 자신이 찌질해보인다는 생각을 잠깐씩 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되짚으면서 실천하는 것 . 그게 자기 변형의 실천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은 푸코 공부하기를 잘했다!!! 덕분에 난희샘뿐 아니라 좋은 샘들 만났다 이렇게 생각하면서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