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푸코1926~1984』 1부를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윌름 가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이후 청년 푸코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정말로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우선 심리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그러면서 스웨덴의 심리학자 루트비히 빈스방거의 『꿈과 실존』을 번역했지요. 그 연장선상에서 『정신병과 인격』을 출간했고요. 다음으로는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탈당하기도 합니다. 푸코는 격렬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이론적 실천도 없었습니다. 공산당, 맑시즘과 불화하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한계 경험’의 작가들의 세례를 받습니다. 바타유, 블랑쇼, 클로소프스키, 베케트 등등. 그 와중에 피에르 불레즈 사단의 천재 작곡가였던 장 바라케와 연애도 했죠. 떠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스웨덴, 폴란드, 바르샤바로요. 떠돌아다니면서 일도 했어요. 프랑스어 강사로, 프랑스문화원장으로 행정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크게 간추려 ‘방황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조목조목 따져보면 푸코는 늘 치열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하게 읽고, 쓰고, 만나고, 헤어지고, 놀고, 떠돌고, 일하고, 질문하고……. 뭐랄까 삶의 큰 줄기에서는 정처 없는 시기였겠으나, 그 세부는 늘 알찼다고나 할까요? 저는 그 가운데에서도 공산당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푸코와 맑시즘. 맑스를 ‘찻잔 속의 폭풍’ 취급했던 『말과 사물』의 유명한 구절 때문이 아니더라도 푸코와 맑스주의는 뭐랄까 도저히 섞이지 않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푸코가 젊었을 적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소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평전을 읽고 보니, 푸코의 공산당 입당은 꽤나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고등사범 시절에는 당의 세포에서 활동하고 싶어했고, 나름대로 소규모 공산주의 서클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으며, 『정신병과 인격』에서도 맑시즘적 지향을 드러내기도 했었죠.
푸코는 맑스주의에 대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저항’이 곧 ‘공산주의’를, ‘소비에트’를 의미하던 시대에, 곧 교수나 정치인, 공무원 같은 ‘부르주아적’ 직업을 갖게 될 예정인 고등사범학교 학생으로서 모르긴 몰라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억압에 맞선다고 말하는 맑스주의가 스스로에게 과학의 권위를 부여하려 하고, 소비에트가 그들이 맞서 싸우고자 하는 적을 닮아가고, 공산당이 게이와 같은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묵살하려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쩌면 이는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 의해 푸코 자신의 욕망과 실존이 비정상으로 질환으로 규정 당했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 아니었을까요? 배제의 경험, 막다른 곳에 다다른 느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푸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개인사 속에서도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 진정 배척되었다는 것, 사회의 그늘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성 정체성이 바로 자기 문제일 때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과적 문제로 변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라는 의미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환자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론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 내가 관여하는 제도들 속에,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균열·미세한 진동·기능장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작업을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서전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신의학과의 관계 속에서, 또 맑시즘과의 관계 속에서 배제와 기능장애를 경험한 푸코는 어떻게 했을까요? 푸코는 ‘튀었습니다.’ 스웨덴 웁살라로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저작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진정으로 사유를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지요. 이 시기 이후로 푸코는 프랑스와 유럽의 정치적 사건의 현장에서 늘 빗겨나 있게 됩니다. 식민주의자들과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드골이 정계로 복귀했을 때 푸코는 스웨덴에 있었고, 68혁명 때는 튀니지에 있었죠. 이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1955년부터 시작된 ‘유배의 시기’ 동안 푸코가 사유와 글쓰기를 통하여 주어지지 않은 정치와 저항의 양식을 발명해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자신이 직접 쓴 책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흔적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푸코입니다. 감사하다! 그럼 다음시간 공지 하겠습니다.
1. 『미셸 푸코 1926~1984』 2부 1~3장을 읽고 연보를 작성합니다. 후남샘, 미영샘, 진아샘은 과제를 출력해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푸코 세미나 과제방에 일요일 12시까지 올려주시면 됩니다.
2. 『미셸 푸코 1926~1984』 2부 1~3장을 읽으며 인상 깊은 구절이나 대목을 2개 픽해옵니다. 토론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두루뭉술하게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페이지 ~문단을 읽고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다’라고 말씀을 해주시면 적극적이고 활발한 토론이 가능해집니다. 꼭 푸코의 철학과 관련된 진지하고 무거운 부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뭐가 되었든 ‘썰’을 풀 수 있을 만한 대목을 선정해서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준비해 오세요~
3. 간식은 소현샘 후기는 청샘께서 맡아주실 겁니다.
그럼, 저는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쓸 때 즐겨 들었다고 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띄우며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ㅎㅎ확실히 건화샘이 달라졌다!!! 음악 서비스까지 챙기는 이 곰살맞음의 실천을 적극 환영합니다.
저는 이번 세미나를 하면서 그 '배제의 경험' '도저히 섞이지 않는 느낌'이 지배하던, 제 20대가 떠올랐고, 그 시절의 그 서걱거림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제 공부의 새로운 출발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다보니 노회함이랄까, 주변과 너무 익숙하게 찰떡이 되어버리는 능숙함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푸코의 '이론적 욕망의 핵'을 계속 추동시키는 힘은 무엇이었까...아마도 자기와 불화하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것이 아니었을까...싶습니다.
ㅎㅎ확실히 건화샘이 달라졌다!!! 음악 서비스까지 챙기는 이 곰살맞음의 실천을 적극 환영합니다.
저는 이번 세미나를 하면서 그 '배제의 경험' '도저히 섞이지 않는 느낌'이 지배하던, 제 20대가 떠올랐고, 그 시절의 그 서걱거림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제 공부의 새로운 출발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다보니 노회함이랄까, 주변과 너무 익숙하게 찰떡이 되어버리는 능숙함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푸코의 '이론적 욕망의 핵'을 계속 추동시키는 힘은 무엇이었까...아마도 자기와 불화하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것이 아니었을까...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