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책은 어려우면서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책에 나오는 개념들이 아주 명쾌하게 이해되진 않고, 저자의 대안이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자기지시적’, ‘체계적 사고’의 글쓰기가 어떻게 ‘인지적 실천’이 될 수 있는지 배웠습니다. 챕터를 쪼개고 쪼개고, 거기다 하이픈으로 일일이 번호를 매기고, 체계적인 설계에 따라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이 인상깊었어요. 저자는 서문에서 매클루언의 미디어론을 소개하면서 매클루언은 선형적 사고가 아닌 촉각적이고, 모자이크적인 발상과 표현을 중시했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의 원칙에 반하여 분석과 기술을 철저하게 선형적으로 수행할 거라고 단언하지요.
어쨌든 그의 체계적인 분석 덕분에 또 하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만의 ‘체계이론’이라는 진입장벽이 높은 사상을 저자의 요약과 설명으로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고, 밖으로 열려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회를 '닫힌 사회', ’단 하나의 사회'라는 개념으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에 따르면 디지털로 연결된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는 유일한 세계라는 겁니다. 나름 이해한 것 같아서 발제자인 저는 설명을 시도해보지만 중간에 자꾸 막혀서 (긁적 긁적... 일단 여기까지만 말할게요..^^)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네요ㅎㅎ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이해한 거라고 하던데, 역시 만만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발제하면서 꼼꼼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어제 생기 세미나에서 읽은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라는 책도 디지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제목도 도발적이고 내용도 디지털 산업의 엄청난 환경 파괴를 고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러다이트식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비물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디지털 화면, 클라우드, 데이터 사용, ‘좋아요’ 클릭 하나 하나가 전 세계적이고 물질적인 하부구조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네요. 우리는 이미 전 세계적 단위로 연결되어있고 어떤 사회 문제와도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무해하고 순결한 실천을 추구하거나, 체계 밖으로 도피해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내부에서 사유하고 실천할 수밖에 없는 세상인 거죠. 바깥으로 나가 초월적이고 객관적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전체를 파악하고, 외부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정보사회의 철학>의 저자는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체계 내부에서 전체를 파악하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계의 외부에 이르는 길이다. (...) 대신 하향적 분석을 경유하여 상향적 종합으로 나아가 체계 자체의 존립 구조를 내부에서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를 통해 내부에서 외부를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체계 외부를 알기 때문이 아니라 체계의 ‘자기인식=자기비판’을 위해 그 외부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시간에 해당한다. (32쪽)
- 루만에 따르면 정의란 현재의 구분, 즉 프로그램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한 관찰, 정확히는 체게의 자기관찰이다. 바꿔 말해, 이는 체계 스스로 산출한 외부로 인해 구조 변용을 압박하는 사태이다. (229쪽)
SNS파트에서는 네트워크 미디어에서의 무분별한 정동 노출 현상이 고차원적인 ‘승인 욕구’가 아니라 ‘퍼포먼스에 대한 지지 요구’에 불과하다고 평가합니다. 책에서는 극단적인 사례로 들고 있는데, 정동 노출의 형태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승인 욕구와 지지 요구를 구분하기 모호한 지점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반대로 어쩐 지점에서는 소외되어왔던 정동의 해방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성적이고 정돈된 언어, 혹은 의사소통행위와 합의(하버마스)로부터 배제되었던 목소리, 몸짓들 또한 주목받을 수 있는 세상인 거죠. 온갖 정동적 노출 행위의 범람 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않도록, 다양한 전략으로 양화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사회를 상상해봅니다.
‘소통이 소통한다’라는 말도 기억에 남습니다. 탈주체적이고 비인칭적인 소통은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고, 글이 글을 쓴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말을 한다. 내가 쓴 글은 나의 정신이나 내면을 내 의지만으로 재현한 결과물이 아니다. 글쓰기는 저자에게 귀속되지 않고 언어적, 비언어적 소통 안에서 만들어지는 효과에 불과하다, 라는 공상을 해봅니다ㅎㅎ 내가 쓴 글이지만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을 때가 있고, 내가 쓴 글에서 무언가를 배울 때가 있는 것 같아서요.
다음 책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 지식>입니다. 부제가 비판적 포스트인문학이네요. 벌써 내일이구요! 내일은 발제자 샘들에게 조금 기대어보겠습니다. 내일 만나요^^
내일 만나요~~가 위로처럼 들리는 밤이네요.. 왜냐하면 지금도 이번 책으로 높은 언덕을 한번 더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거든요.. <정보 사회의 철학>에서의 '세계사회'의 사유에 이어 포스트휴먼의 주체를 생각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기를 그만두는지, 또 우리가 무엇으로 생성되어가는 과정인지를 쌤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SNS와 정동적 소통(?)에 대한 샘의 해석이 인상적이네요. SNS가 소통을 가속화하고 탈중심화한 결과 '구역질 나는'(저자의 표현) 감정의 배설만 남게 되었다는 저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쩐지 저자가 바깥에 서서, 관찰자 시점에서 현상을 단순화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거든요(다이고쿠 다케히코씨가 61년생인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아무튼 샘이 생각하신 것들을 차분히 풀어주셔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곧 뵈어요 ^^
저어ᆢ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바깥에서 관찰자 시점에 서는 것과 61년생이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지요? 61년도가 이와 관련된 무슨 변곡점이 되는 시기였는지요? 설마 ᆢ연령주의?
어이쿠 딱 걸렸네요ㅋㅋㅋㅋ 저의 짧은 경험에 근거한 편견 가득한 물음이었습니다^^
'매클루언은 선형적 사고가 아닌 촉각적이고, 모자이크적인 발상과 표현을 중시했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의 원칙에 반하여 분석과 기술을 철저하게 선형적'. 저도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매클루언의 미디어론의 가치를 살펴보기 위해 그와는 반하는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을 밝히는 저자를 보면서 지성을 갈고닦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달까요? 자신의 맥락과 전제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힘이 지성이 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어요. 글 전반에 걸쳐 저자가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밝히면서 글을 써내려간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생각의 시작이나 전제를 알 수 없어 혼돈 상태에 있는 저로서는 그것이 명쾌하게 느껴져 통쾌함까지 느꼈습니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외연이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사회가 '유일한' 것이 되어, 폐쇄성으로 작동하는 확장으로 정리해주신 경덕샘의 정리도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