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새로운 책 『포스트휴먼 지식』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음... 뭐랄까 영감으로 가득한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인 로지 브라이도티 선생님께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긍정’인데, 정말로 긍정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게 다 잘 될 거라는 낙관주의라기보다는 무너져가는 것과 함께 거기서 새롭게 발생하고 있는 것들을 주의 깊게 살피는 섬세한 시선에서 오는 긍정 같다고 느꼈습니다. 책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생각한 것들을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포스트휴먼 조건
한동안 ‘지올팍’이라는 가수가 온라인을 휩쓸었습니다. 적당히 알려진, 나름대로 팬층이 있는 가수였는데 갑자기 확 떴어요. 유튜브 쇼츠, 인스타 릴스 할 것 없이 누르면 지올팍의 신곡 후렴구와 키치한 춤동작이 나왔습니다. 초기에는 천재라느니 대세라느니 유니크한 음색이니 하는 긍정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나오다보니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이 생기고 ‘세계 최초 주입식 천재’라는 식의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올팍 측의 해명이 흥미로웠습니다. 지올팍은 기획사에서 올린 홍보 영상들이 알고리듬의 간택을 받은 것이고 자기도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놀랍지 않나요? 알고리듬이 어떤 뮤지션이 뜰지 안 뜰지를 결정하는 아주 강력한 행위자로 기능하고 있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 모두가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지올팍은 음악을 만들었을 뿐이고, 그 음악이 널리 공급되는 과정에서는 행위의 주체도 책임의 주체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포스트휴먼 세상이 아닐까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호소한 것이 바로 피로감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이 음악이 좋은 음악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논하기보다는 피로를 토로했습니다. 브라이도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로 ‘우리’, 즉 서구 포스트모더니티의 인간 상속자들이 점점 더 지치고 소진되어가는 반면, ‘그들’―우리가 탄생시킨 기술적 인공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영리하고 생기 넘친다.”(33쪽)라고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체계적 가속과 기후위기의 엄청난 가속 사이에서 우리 인간 주체들은 무력감과 피로함을 느낍니다. 알고리듬의 속도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느낀 피로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브라이도티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보고, 이러한 현상의 위험성보다는 해방적 잠재성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소진
1장의 소제목 중 하나는 ‘소진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하여’입니다. 제목부터가 흥미를 끌죠. 브라이도티는 여기서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부터 시작해서 자유주의 정치학, 일상의 정치학, 고전적인 해방론, 전문가들의 지식, 국가, 유럽연합, 학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소진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31쪽)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진단에 몹시 공감했습니다. 고전적인 해방론이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지나갔고, 저는 늘 뭔가 조금씩 고갈되어간다는 느낌을 갖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뭔가 거창한 이념이나 경직된 전통 같은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유연하고 알뜰한 자본의 논리가 깨알같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고요. 슬픔, 좌절, 분노가 아니라 우울이 우리 시대의 정서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진의 과정을 부정적으로밖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시대를 탓하거나 자본을 탓하거나 스스로를 탓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브라이도티는 “소진은 치료해야 할 병적 상태나 실제 질환이 아니라 힘들이 변환되는 문턱, 다시 말해서 창조적 생성의 잠재적 상태”(36쪽)라고 말합니다. 생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고갈, 죽음, 해체는 언제나 그 자체로 또 다른 변환, 생산, 결합을 함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브라이도티는 소진이 인간 이외의 힘들에 개방하는 역량의 표현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브라이도티는 소진을 긍정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우리’를 현장에 기반한, 책무를 지닌, 능동적인 존재로 구성”(39쪽)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뒤집어서, ‘우리’를 비인간 행위자들로 우글우글한 ‘여기’에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 소진을 긍정하기 위한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휴머니즘은 ‘인간’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을 특권적인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 아닌 것들과 맺고 있던 관계를 도외시하거나 평가절하한 것이죠. 그런 바탕 위에서 인간이 세운 비전이란 것은 굉장히 이상주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희망과 절망, 기대와 정체상태 사이를 오락가락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의미의 ‘인간’의 자리는 의문에 붙여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쇼핑을 할 때 종종 ‘로봇이 아닙니다’라는 박스가 뜨는 걸 보게 되는데요. 우리가 인간임을 수시로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적 인식-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위기에 놓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브라이도티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관계 맺을 수 있는 역량을 중심으로 주체성을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관계의 역량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창조적 기쁨. 여기에서부터 인식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아무튼, 어려운 철학 용어들이 난립하는 와중에도 긍정하는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책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공부를 해나감에 있어서 하나의 참조점이 될 것 같고요. 다음 시간에는 『포스트휴먼 지식』을 끝까지 읽고 옵니다. 발제는 5장 경덕샘, 6장 건화, 7장 승현샘이 맡아주셨습니다. 추가로 마지막 시간 에세이 주제를 간략히 구상해 오기로 했습니다. 간식은 경덕샘이 맡아주시겠습니다. 그럼 목요일에 뵈어요!
'민주주의부터 시작해서 자유주의 정치학, 일상의 정치학, 고전적인 해방론, 전문가들의 지식, 국가, 유럽연합, 학교 교육'. 우리가 소진의 감각을 느낀다고 제시한 것들은 제가 믿어왔던 가치나 제도들이었네요. 이후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믿고있기도 하구요. 하지만 여기에 '인간' 외의 것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