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란 관계다
『포스트휴먼 지식』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까다로운 철학 개념이나 새로운 용어들이 많아서 한 문장 한 문장을 모두 이해하며 따라가기는 힘들었습니다. 그치만 분명 이 따끈따끈한 책(2019년에 출간되고 2022년에 번역된)은 ‘포스트휴먼’이라는 우리의 공통된 조건을 분명히 보도록 했습니다. 저자인 로지 브라이도티가 처음에 언급한 두 가지 가속화, 즉 자본의 통제 불가능한 가속화와 기후위기의 엄청난 가속화는 파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결여나 부정으로 파악하지 않고 긍정의 관점으로 본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배우고 싸우고 연대하고 돌보고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을 발명할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알려준 것 같습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신유물론이라는 철학적 베이스 위에서 포스트휴먼 조건을 사유합니다. 신유물론은 우리의 주체성이 신체화되어 있고 뿌리박혀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관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죠. 초월적인 의식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브라이도티는 우리가 ‘자아’라고 불러온 것이 지닌 집단적인 본성과 외향적인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아는 집합이고 주체성이란 관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런 관점은 서구적 세계관이 주체와 의식에 부여해온 특권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건 무엇보다도 인간이 스스로를 국외자로 만드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관계로부터 등을 돌린 의식, ‘나’를 초과하는 관계들이 촉구하는 물음들에 귀를 닫은 자아. 서양 주류철학과 그것이 재생산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이런 것들을 이성이나 의식이라고 부르며 옹호해왔던 게 아닐까요?
로지 브라이도티의 관계적인 사유는 지식생산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포스트휴먼적 사유는 관계적 활동”(188쪽)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초월적 의식이 진리를 추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가 더 많은 관계들에 동참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물론 이때의 관계란 수량화할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자아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 양적으로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결국에는 총체적인 인식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환상을 포스트휴먼 지식은 거부합니다. 관계에 동참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변화한다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브라이도티는 관계적 사유가 인식론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해는 누군가의 조건들에 대한 비판적 해명을 요구”(200쪽)하기 때문이죠. 관계적 사유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고 다른 모든 것들과 익숙한 방식으로 관계하도록 하는 상식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촉발시킵니다.
저는 브라이도티의 인식론이 일리치가 배움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맞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리치 역시 배움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일리치는 배움이란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들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길게 토론했던 프레이리의 학생들의 경우, 글자를 깨친다는 것은 스스로의 책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리치는 배움을 지식 수집의 과정으로, 계획하고 개발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학교의 논리를 비판했죠. 그런데 브라이도티와 일리치의 관점에는 분명 유사성이 있지만 학교라는 제도에 대한 두 사람의 관점은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일리치는 학교의 국교폐지를 주장하며 배움의 제도화가 배움 자체에 역행하게 된다고 말했죠. 반면 브라이도티는 대학의 소수적 사용을 상상합니다. 대학이 이미 비판적 포스트 인문학을 증식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하죠. 두 사람은 상충되는 주장을 펴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난희샘께서 에세이 주제로 거론해주셨는데요. 아마도 이런 질문을 통해서 일리치의 학교 비판을 좀더 첨예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난희샘께서 어떻게 풀어오실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이제 에세이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각자의 에세이 주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시혜적 태도에 대한 고민, 제도 밖에서 하는 공부에 대한 고민, 소진의 경험에 대한 성찰 등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가올 에세이 발표를 기대하며 공지는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2페이지 내외로 함께 읽은 세 권의 책들을 부분적으로 가능하다면 모두 참조하여 배움에 대한 각자의 고민을 풀어와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목요일에 뵈어요~~
드디어 마지막 에세이네요.. 다들 어떤 주제들을 가져오실지 기대가 됩니다.. 이 시대의 배움이 새롭게 다가오길, 지식이 관계라는 명제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다시 되새기는 마지막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또 이어질 배움의 인연이 어떻게 맺어질지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에 의존해보시죠~~ 다들 이따 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