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텍스트의 포도밭』 1장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눴고, 『서양 중세 문명』 5~7장에 관하여 토론했습니다. 간략히 제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텍스트의 포도밭』 1장
『텍스트의 포도밭』 1장에서 일리치는 생 빅토르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의 첫 구절을 소개하면서 중세 수사들의 읽기에 접근해갑니다.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다.” 위그는 이 문장을 인용하며 책을 열고 있는데요. 일리치는 여기서 첫째(prima)라는 단어에 대한 해설을 통해 중세 수사들의 배움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때 ‘첫째’라는 것은 둘째, 셋째, 넷째... 로 이어지는 순서에서 맨 앞에 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causa prima'라는 표현은 최초의 원인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낳는 근원적이고도 내재적인 원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후고에게 ‘지혜’는 읽기공부의 이정표 같은 것으로, 읽기의 방향을 설정하도록 해줍니다.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 이런 식으로 지혜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고향이 된다.”(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현암사, 33쪽)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요? 일리치는 후고에게 진리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후고에게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신성한 존재와 만나는 것이고, 그를 통하여 스스로의 병을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상적인 현자를 상정해두고 그를 향해가기 위해 철학을 했듯, 중세의 수사들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바라보며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에게 읽기란 지식의 내용보다는 존재 방식과 더 많은 관련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인용구에서처럼, 읽기에 매진하는 자란 망명을 자처하는 자입니다.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함으로써 기존의 습관과 거리를 두고, 관습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떠나는 일. 그리고 읽는 동안 자신이 만나는 지혜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재정립하는 일. 이것이 후고에게는 지혜의 추구였던 것 같습니다.
(성 빅토르 후고 1096~1141)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다’는 것. 제 차원에서 이것은 공부에 온전히 마음을 쏟는다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굉장히 미묘한 느낌이지만,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쳐내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공부를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의 필요성을 저도 느낍니다. 제가 공부하는 텍스트에 진지하게 매진할 때, 절실한 질문과 씨름하며 글을 쓸 때, 자연스럽게 공부가 제 삶의 중심에 놓이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수준에서 이해하자면, 지혜에 집중한다는 것, 공부를 삶의 방식으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시간을 들이거나 가시적인 결과물을 생산해내는 것이기 이전에, 공부를 자기 자신과 씨름하는 과정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이런 작업을 지속하는 일이 너무(너무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집중을 흐트러뜨릴 만한 일들은 수도 없이 많고, 언제나 힘이 딸리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공부에 대한 회의가 엄습하기도 하죠. 어떻게 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일단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 한 번 더 마음을 내는 연습을 해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수사들처럼 공부의 어떤 궁극적 비전, 이정표 같은 것을 스스로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서양 중세 문명』 5~7장
“우리는 세계가 이미 노쇠해서, 말하자면 살 만큼 다 산 노인이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
『서양 중세 문명』 6장에서 자크 르 고프는 서양 중세의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구조에 대한 소묘를 제시합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기독교인들이 고대의 순환적인 시간관과 결별하고 직선적 시간관을 믿었으며, 자신들의 시대를 노쇠기로 느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광스럽고 젊고 고결했던 과거의 추억에 비해 현재가 타락했음을” 증언합니다. 세계는 늙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되고 오므라들었습니다. 중세인들은 과거에 비해 당대의 사람들은 어린이와 난쟁이 같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는 우리 시대와의 유사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후위기와 제로성장의 시대, 한국의 경우엔 저출산의 시대. 우리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고, 우리의 문화나 문명이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갖습니다. 중세인들에게는 계시와 신학이 이런 감각의 근거를 제공해줬다면 우리는 환경과 관련된 각종 지표들이나 종말을 예견하는 과학적 근거들이 이런 감각에 확실성을 부여합니다.
‘세계가 노쇠했다’라는 이런 느낌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자크 르 고프에 따르면 중세인들이 직선적 시간관과 관계하는 방식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데, 그 가운데는 역사적 비관주의로 귀착하는 방식과 영원한 진리에만 관심을 갖는 낙관주의 양쪽으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도 존재했습니다. 이 두 가지 주류적 경향에 맞서 “현재와 미래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조심스런 노력들”(286쪽) 또한 존재했던 것인데요. 르 고프에 따르면 이는 노년기의 이점을 강조하는 독특한 태도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지만 그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라는 구절이 이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줍니다. 우리의 시대가 노쇠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 이상을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는 성장과 발전의 시기에는 볼 수 없던 어떤 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을까요?
“중세에 토지의 낮은 생산성에 작용한 다른 요인들이 있을 수 있음을 부언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중세 장원의 자급자족적 경향이 그러하다. 이것은 경제적 현실의 결과인 동시에 사고방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바깥 세계에 의존하는 것, 필요한 모든 물품을 자체 생산하지 않는 것은 정신적 취약함일 뿐만 아니라 치욕이었다. 수도원 장원의 경우 바깥 세계와의 어떤 접촉도 피하는 것은 고립에 대한 영적 이상에서 직접 연유하며, 영적 순결을 위한 조건이었다.”(자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문학과지성사, 348쪽)
“중세 서양 경제의 목표는 인간의 생존이었으며, 결코 이것을 넘어서지 않았다. 만약 서양 중세 경제가 이러한 최소한의 필요를 만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물론 생존이라는 것이 순전히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자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문학과지성사, 348쪽)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중세 경제의 형태였습니다. 중세 경제는 자급자족을 지향했고, 생존이라는 명확한 목표에 의해 한정되었습니다. 중세 서양의 경제적 목표는 ‘필수적인 것necessitas’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르 고프는 말합니다. 필요한 것 이상으로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절제를 알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풍경만으로 결과하지만은 않습니다. 중세의 장원들을 고립되어 있었고, 식량을 장기적으로 보관하는 기술이나 사회적 안전장치들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굶주림이라는 위협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이 불확실한 마당에 필수품의 조달에만 신경쓰고 생산성의 증대에 관심이 없는 경제는 무모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중세 문명이 우리에게 결여된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들은 ‘적절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충족을 위한 수단은 희소하다는 자본주의의 교리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세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적 신앙과 토착적인 삶의 방식, 그리고 신분의 위계 같은 것들이 ‘필요’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히 제시해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이들의 욕망은 무한하지 않았던 것이겠죠. 우리는 거시 경제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나 적절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조건들을 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이것이 일리치가 말한 ‘뿌리 뽑힘’이겠죠. 중세 문명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적절한 게 무엇인지,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대지에 발을 붙이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서양 중세 문명』을 끝까지 읽어오시고, 『텍스트의 포도밭』은 2장 중간 정도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영아샘께서, 발제는 희욱샘과 미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