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될지, 마치 막막한 해안에 서서 파도에 밀려오는 어떤 유리병을 기다리는 심정이었습니다. 마음을 보내면, 누군가가 소식통이 되어, 여기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있던 그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그리고 아주 미세한 그 진동을 따라 한 사람씩 여기에 도달할 것이라고. 일리-리 세미나가 어떻게 될지, 씨앗은 좋았으나 아직 밭이 마련되지 않으니 아쉽지만 묻어둬야 하는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닐까요. 그런데 세미나 문이 열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세미나의 문은 그렇게 열리는 것 같습니다. 세미나의 주인은 반장도 아니고 규문이라는 공간도 아닌 것 같아요. 이를테면 일리치와 들뢰즈와 니체와 푸코와 공자와 싯달타와 베르그손과 최근 내게 도달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같은 정신에 접속하는 안테나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의 장벽을 뚫고 한 걸음씩 걸어올 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죠. 누가 보낸 소식을 누가 듣고 이런 시간이 마련된 걸까요.
제가 이제껏 겪은 세미나 중 역대 최고의 분위기였습니다. 최고란 서열을 의미하기보다는(노래에 1등 2등이 어디 있을라고요) 안성맞춤이라는 의미입니다. 건화샘이 아마 좀 설렜나 봅니다.^^ 저 멀리 강릉에서, 남원에서 참여하시는 샘들을 위해 빔 프로젝트를 설치하고 (그 하얀 막이 마치 새로운 세미나 방을 하나 더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얌전히 동그랗게 앉아 있는 책상에다, 귀에 익은 팝송이 그 방을 따뜻이 적시고 있었거든요. 저 밖 혜화동 거리와 다른 차원의 공간, 순간 저는 먼 길을 떠돌다 집에 온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섞인다, 어떤 시간이 펼쳐질 것인가, 어떤 시간을 펼칠 것인가, 일리-리 멤버들이 함께 느꼈을 희망(기대가 아니라)이었을 겁니다.
일리치를 읽는다는 것, 그리고 일리치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학교 없는 사회>를 다시 읽는 경험은 건화샘이 말대로 ‘지성의 의미를 바꾸는 일’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그런 표현을 안 쓰지만,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그곳은 ‘진리의 전당’이었고 ‘지성인’을 산출하는 곳이었어요. 대학을 나와야 지성인이 된다는 생각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현실은 도무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도대체 ‘안다’고 생각하는 것, 지성이 뭘까, 그 앎을 관장하는 곳이 학교고 일정한 시간을 거쳐야 그 앎이 완성된다는 생각, 그리고 한 번 배워둔 것은 언제고 꺼내서 쓸 수 있는 보배라고 생각하는 이 생각은 정당한 것인가? 학교는 마치 국교처럼 우리 삶에서 한 번도 지적질을 당한 적 없는 전제인 것 같습니다. 일리치가 주장하는 ‘학교 없는 사회’란 단순히 제도로서의 학교를 개혁하자는 차원을 훌쩍 넘어서 있습니다. 일리치에게 저항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학교화’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치 물속의 물고기에게 물을 비판적으로 보라는 것처럼요.
과제를 항상 1등으로 올리는 영아샘은 과제 제목부터가 파격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허황되게 들리는 이유는’...뭘까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답답함이 느껴져서 (저도 일리치를 처음 읽을 때, 대체 어떡하라는 거지? 그러면 학교를 벗어나면 다음 대안은 뭐야, 책을 덮었다 폈다 했거든요) 하는 소리입니다. 저는 경덕샘이 제시한 독법이 아주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리치의 비판은 일리치가 살았던 구체적인 역사적, 정치적, 지역적 상황을 이해할 때 좀 더 잘 납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리치의 시대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저는 지나친 일반화, 성급한 단정으로 느껴지는 문장은 적당히 넘어가면서, 지금 시대에도 유효한 것 같은 진단들, 일리치 특유의 날카로운 비유들에 주목하면서 읽었어요.” 그리고 이런 말씀도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렇다고 탈학교 운동이 단순히 학교를 다니면 안 된다는 식의 규범으로 이어지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세미나에서 읽는 책이나 좋아하는 국내외 작가의 이력을 보면 제도의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거든요. 제도 안이냐 밖이냐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여러 구조적 문제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면서, 제도를 어떻게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제도를 떠나 살 수는 없지 않나요. 절대 일리치가 우리를 이분법의 절망 속에 내버려둘 리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겠지요.
모든 영감을 주는 책들이 그런 것처럼 일리치 또한 다층적으로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년들이 일리치를 읽는 의미와 노년의 샘들이 읽는 의미, 어떤 직업군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일리치가 던지는 직구의 충격파는 다르게 느껴질 텐데요. 저는 일리-리 세미나에서 다채로운 그 충격파가 고루 전달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각자의 일상 속에서 일리치가 말하는‘가치의 제도화’가 어떤 식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선명하게 짚혔으면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희욱샘 과제의 다음과 같은 문장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로지 개인 탓, 사회 탓을 하기보다는 학교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 주기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일련의 현상들을 따져가 보는 것” 그것이 희욱샘의 이번 세미나의 목표, 나아가 우리의 목표이기도 하다느 생각이 드네요. 두서없이 '의식의 흐름'에 올라타 막 쓰는 후기 같아 올리기가 망설여집니다만, 어딘가를 급히 가야 해서... 잘 부탁드릴게요.
하나의 세미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인연! "일리치와 들뢰즈와 니체와 푸코와 공자와 싯달타와 베르그손과 최근 내게 도달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같은 정신에 접속하는 안테나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의 장벽을 뚫고 한 걸음씩" 다가온 결과 우리가 일리치를 만나고 또 서로를 만나게 된 거군요 ㅎㅎㅎ 어찌보면 이거야말로 탈학교적인 사고방식이네요. 규문이라는 제도(기관?)가 있어서, 반장이 세미나를 기획했기 때문에 우리가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니까요.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도, 규문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 일리치가 <학교 없는 사회>라는 책을 쓰게 된 것도 제도를 넘쳐 흐르는 관계들의 연쇄인 것이겠네요.
일리치 충격파(!)가 이 세미나에, 그리고 이 세미나를 통해 예측하지 못한 다른 어딘가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네요 ㅎㅎ
지난 주 세미나 이후로 줄곧 '학교화'라는 말이 풀리지 않고 낯설기만 합니다. 세미나에 참여한 팀원들이 나름대로 학교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해주었는데도 말이죠. 국민 대다수는 학교를 거치고, 우리는 학교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인데도 이 '학교화'라는 말을 정의할 수 없고 낯섦을 넘어 쉽게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난희쌤의 감동글 잘 읽었습니다.. 답글을 아니 달 수가 없군요. 역대급 최고의 세미나.. 저도 감동의 세미나였습니다.. 특히 저의 배고픔을 어찌 알고 맛난 저녁을 준비해 주시다니... 오늘 우연히 회사 동료와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학교없는 사회에 대해 얘기나누었습니다. 뜻밖에 이분도 학교는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퇴보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누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사람들의 학교에 대한 생각이 일리치의 그것과 같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학교없는 사회를 꿈꿉니다. 결코 현실적이지 않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향점은 동일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배움의 장소나 공간에서도 참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휵샘의 감동표현에 답글을 안 달수가 없네요 ㅎㅎ
맞아요. "어떤 배움의 장소나 공간에서도 참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항노화제가 아닐지 ᆢ가장 비현실적인 것이 실은 가장 현실인 것이지 않을까요?
난희샘이 저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고 매맴 돌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요. 전 좀 과하지 않나 했었는데, 이런 세미나시작 전 분위기를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었군요. 와우! ㅎ 건화샘과 이심전심? ㅎ 그래그런지 그 분위기는 세미나 내내 어떤 뜨거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어떤 설램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집으로 왔었는데, 그게 난희샘이 말한 '역대급 최고의 세미나'였기 때문이였군요. 완존 난희샘 후기는 후끈하게 생동감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