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치 리-리딩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난희샘이 신속한 후기를 올려주셨고, 거기서 세미나 분위기나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주셔서 저는 간략하게 세미나 하면서 제가 생각하게 된 것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텍스트는 『학교 없는 사회』였습니다. 저는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며 새삼 ‘학교’라는 장치의 엄청난 영향력을 실감했습니다. 마치 군대를 전역하고 나면 그 경험을 현재와는 무관한 일로, 생각하기 싫거나 종종 추억할 만한 과거로 남겨두려고 하게 되는 것처럼. ‘졸업’하는 것으로 학교와 깔끔하게 이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리치에 따르면 학교는 현대사회의 의례를 수행하는 장치입니다. 신학자였고 신앙인인 일리치는 학교가 중세나 전근대에 교회가 맡았던 역할을 행하고 있다고 봅니다. 학교는 사회적 신화의 저장고이고 신화의 모순을 제도화하는 수단이며 신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재생산하고 은폐하는 장소라네요.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학교’가 그리고 ‘학교화된 사회’가 우리에게 특정한 사고체계와 삶의 방식을 보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이 의무화된 이후의 사회에 태어났고 정상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공교육이건 대안교육이건 홈스쿨링이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인간’은 교육(제도화된 가르침)의 필요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너무나 당연하게 믿습니다. 난희샘 표현처럼 물고기가 물에 대해 질문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학교와 교육에 대해 질문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세미나에는 전현직 교사 분들이 몇 분 계신데요. 저는 학교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매일 교실로 향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에게만 한정된 과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름의 교육을 하고 있는(학교에서의 공부와 연구실에서의 공부를 ‘교육’이라는 같은 단어로 지칭할 수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큽니다만) 규문이라는 공간 역시 학교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전제하는 배움의 이미지에 저항하고 또 무의식적으로 학교를 모방하기도 하면서요. 어쩌면 학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교사에게 만큼이나 비제도권의 학인들에게도 절실한 문제일 수 있겠죠. 앎이란 무엇이고 배움이란 무엇인지 학교화된 관점과 긴장을 형성하며 계속 질문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제가 하고픈 말은 학교가 우리 모두의 화두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자의식이 형성되는 시기에 또래 학생들과 함께 교실에 수용되어서, 계획된 커리큘럼에 따라 정해진 과목들을 배우고, 성적에 따라 미래의 직업과 삶의 양태가 결정되는 것을 보는 경험은 확실히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매우 독특한 경험일 것입니다. 일리치가 말하듯 역사상 이렇게 비싼 사회적 의례를 갖고 있던 사회는 없었습니다. 일리치가 책을 쓰던 당시에 미국에서 교육 예산은 국방 예산 다음으로 많았다고 하죠. 아마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 학교에 대해 설명하면 무모하고 위험하고 사치스런 공상으로 여기거나 아예 학교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교를 중심으로 학교를 모방하고 재생산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는 어떤 가치들을 전제하고 있는 걸까요? 또 학교와 관계된 경험 속에서 우리는 가치 있는 배움과 삶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를 갖게 되는 걸까요?
가치의 제도화
일리치에게 ‘학교화’란 곧 ‘가치의 제도화’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가치의 제도화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제도가 가치를 재현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풀어보자면 제도란 소수의 전문가나 통치자들이 다른 이들(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고안한 절차나 장치입니다. 도시계획, 공교육, 도로와 대중교통, 재판절차와 감옥체계 등등. 제도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도들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기도 하고 공원이나 전화망, 도서관 같은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그 제도에 대한 필요나 그것을 사용하는 특정한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유용성을 가져다주곤 합니다.
가치의 제도화란 따라서 소수의 전문가가 계획하고 예산을 투자하여 절차나 자원을 확보하고 스스로 마련한 틀에 따라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배움이나 건강, 문화 등등의 증진을 꾀하는 일을 가치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산 과정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가치 있는 무언가가 생산되게끔 되어 있고, 생산이 있으면 반드시 수요도 생긴다는 믿음”(88쪽)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학교의 ‘숨은 교육과정’은 제도가 가치를 담보한다는 관점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즉 전문가의 계획 하에 교사에 의해 가르쳐진 것, 교과서에 적혀 있는 바에 근거한 것, 교육전문가들이 공인한 것이 제대로된, 믿을 만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 부모나 조부모의 말들은 미신적인 것으로, 무시해도 좋을 것으로, 앎이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자격증이 없는 독학자의 배움은 배움이 아닌 것이 되죠. 결국은 학교라는 장치,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온갖 절차들과 증명서들이 ‘앎’과 ‘배움’을 인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에 대해 아주 제한적이고 배타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제도가 곧 가치이므로 더 많은 제도화된 교육과정을 밟아나가고, 더 많은 의료 서비스를 소비하고, 더 많은 전문적 관리가 이루어지는 동네에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가치 있는 삶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수에게 제한될 수밖에 없죠. 즉 누군가를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도 역시 제도화된 관점이 기준의 역할을 합니다. 교육 서비스를 더 많이 소비한 사람, 제도에 의해 측정 가능한 (줄 세울 수 있는) 역량이 더 큰 사람에게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가 다시 공급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게 됩니다. 학교는 가치를 제도화하고 배움을 제도화하고 역량을 수량화함으로써 학력에 따른 명백히 부당한 차별이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사실상 제도에 더 부합하는 자, 제도적 관점에서 더 유능한 인간이 더 가치 있고, 그의 삶이 더 귀중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일리치가 가치의 제도화를 말함으로써 저항하고자 했던 것은 차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차별에 대해서만 언급하면 우리는 결국 모든 이들에게 더욱 평등한 교육의 기회와 의료의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최근 제가 하고 있는 공부에 따르면 맑스주의도 이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맑스주의에서 제도적 장치들은 단기적 이익을 내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하고 없어선 안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오직 국가가 이 비용을 부담하면서 기업의 이윤추구에 은밀하게 기여한다는 점 뿐입니다. 도로를 정부가 깔아주면 그걸 이용하여 기업은 사적인 이윤추구를 한다는 거죠. 이러면 제도와 제도가 깔고 있는 전제 자체에 대해 질문할 수는 없게 되고, 결국은 제도의 ‘이로운’ 결과물과 제도에 접근할 권한을 공정하게 분배한다는 상식적인 결론 이상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일리치는 배움의 제도화가 배움 자체에 역행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제도화한 관점이 삶에 대해 어떤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일리치에 따르면 배움은, 개인의 성장은 측정할 수 없는 경험에 의존합니다. 지식을 효율적인 과정에 따라 많이 섭취한다고 해서 그 결과로 진정한 배움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죠. 우연히 스승을 만나고, 어떤 사건이 각성을 초래하고, 아주 일상적인 순간이 낯설게 경험될 때 우리는 배움을 얻게 됩니다. 이런 특별하고 일회적인 순간들만이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자가 자기 고유의 맥락 속에서, 세상을 보는 자신의 익숙한 관점과 대결할 때, 혹은 각자의 욕망과 구체적인 관계들 속에서 특정한 지식의 습득이 관계의 변형이나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가져올 때에도 배움이 일어나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배움이란 각자의 리듬, 관계, 욕망, 문제의식, 경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과 우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교육산업은 배움을 예산 책정과 제도적 절차의 수립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위험한 믿음을 강하게 전제합니다. 그 결과는? 교육이 배움에 역행하게 됩니다. 일단 학교는 제도화된 교육이 배움의 전제조건이라는 믿음에 의존하는 제도이기에, 학교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학교화된 사회는 독학자나 제도 바깥에서 배운 사람들의 앎을 부정함으로써 제도로부터 벗어난 배움의 씨를 말립니다. 그리고 “학습의 동기와 책임을 학습자나 그와 가장 가까운 선생”에게서 효과적으로 빼앗아감으로써, 교육과정에서 고유성과 자율성을 박탈합니다. 이렇게 보면 왜 ‘좋은 교육’을 위해 힘쓰는데도,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학교 안에서 학생들은 무기력해지고 우울해하고 공부라는 것 자체를 혐오하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제도화의 가장 큰 문제는 측정할 수 없는 관계들 속에서 그러그러하게 살아지는 삶에 대한, 가르침 없이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인간이나 비인간들의 다종다양한 역량이 지닌 수량화할 수 없고 줄 세울 수 없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박탈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삶은 비싼 것이 되고,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온갖 제도와 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무기력해집니다. 그렇게 제도화된 삶에 지칠 때면 우리는 명상 ‘프로그램’이나 힐링 ‘세션’에 참가합니다. 혹은 책 읽기 ‘수업’에 등록하고요.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제도화에 전면적으로 반(反)하는 것으로서의 배움을 상상하지 않고 우리가 자유나 공생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지성의 이미지를 바꾸기
문제는 거대해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놓인 자리에서 고민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듯, 저는 ‘학교화’가 제 삶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공부, 제가 속한 규문이라는 공간을 비춰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틀을 일리치의 학교 비판으로부터 얻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지금 제가 알게 된 것은 앎의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제 차원에서 고민해볼 수 있는 탈학교화라는 점입니다.
저는 제도 바깥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종종 제가 여전히 배움에 대해 수량화하거나 위계화하는 시선을 갖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에 들어 있는 함정 같은 것인데요. 공부를 다른 이들보다 우월해지는 것, 더 많은 지적 자산을 획득하는 것, 더 명료한 언어를 손에 넣고 그것으로 더 뛰어난(?) 글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처럼 지성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남들과 나를 비교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때, 어떤 순간이 오면 이런 이미지는 배움 자체에 역행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배움은 언제나 타자를, 나의 변환을 수반하는 것인데 지식을 위계화하는 관점은 타자의 앎을 앎이 아닌 것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배움을 지속할 것인가 지식-소유가 제공하는 자기 이미지에 머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최근 들어 ‘나를 위해 공부한다’라는 말을 뒤집어보게 됩니다. 저 자신을 위한다는 건 뭘까요? 다른 존재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저 자신을 높이는 것은 정말 저 스스로를 ‘위하는’ 일일까요? 일리치는 어째서 매번 뉴욕의 푸에르토리코 거주구역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멕시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소위 ‘낮은 곳’으로 향했을까요? 어쩌면 이것은 일리치가 스스로를 위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시간에는 <학교 없는 사회>를 끝까지 읽고 과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사월의 책'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구입해서 읽으시는 걸 추천드리고요. 다음 시간 간식은 경덕샘, 후기는 미현샘께서 맡아주시겠습니다~~
일단 일리치의 모습을 담은 마지막 흑백 사진을 킵해두었습니다. 지성을 소유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섬세한, 지속적인 주시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가 삶에서 약간의 다른 질적 비약을 경험할 때, 그 소중한 삶의 진실과 정황을 지속하지 못하는(=심화하지못하는) 이유는 그 지점을 계속 두드릴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ᆢ싶습니다.
맑스가 더 나아가지 못한 지점이 어렴풋이 짚이는군요. 제 젊은 날 이후 여즉지 신체에서 싹 빠지지 않은 짠 물인데 ᆢ샘이 예리하게 짚어주셨네요. 맛있는 공부란 역시 디테일에 있다는 것 ㅎㅎ
경희
2023-03-15 08:15
'학교는 사회적 신화의 저장고이고 신화의 모순을 제도화하는 수단이며 신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재생산하고 은폐하는 장소'.
글쓰기와 역사 수업에서 읽고 있는 미국민중사 1권에 19세기 미국교육과 관련된 대목을 채운샘이 짚어주셨는데요. 일리치가 말하는 신화나 은폐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막대한 수입의 일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돈을 벌고 있더군요-를 기부해서 대학과 도서관( 심지어 흑인대학까지도) 을 건립했죠. 하지만 그들의 '박애'적 행위 속에 탄생한 대학이란 체제에 대한 반감을 잠재우고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충실한 완충제' 역할을 해주는 중간층을 길러내기 위한 수단이었죠. 중간층- 교사, 의사, 변호사, 행정관리, 기술자, 전문가, 정치인 - 은 보수를 받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재화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 것.' (미국민중사1, 452쪽)
완충제 역할에 대한 보수, 따갑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교사와 학교교육의 일면이었어요. 신화나 은폐에 대한 저의 시각이 일리치가 말하는 교육담론을 너무 협소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우려도 있지만... 이렇게 저렇게 일리치가 말하는 언어의 세계로 다가가고 싶네요.
휵
2023-03-15 11:05
"나를 위해서 공부한다"는 말을 읽으면서 지난 세미나에서 유용성에 대해 얘기했던 게 떠오릅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거야"라며 우리는 어디다 써먹으려고 하는 공부, 쓸데있는 공부를 합니다. 시험, 입시, 자격증, 취업등을 위해 사회에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하는 공부에는 왜 지금, 현재는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공기, 온도, 계절,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소통, 나누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계속 말하는 미래, 뿌옇고 잡히지 않는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금을 그냥 녹여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은 어딘가에 쓰여야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쓸모있는 인간과 잉여인간의 구분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잉여인간은 사회에서 배척해야 할 존재일까요? 쓰임없이 같이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정말 우리가 나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시스템의 한 부속품으로 충실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지 나와 다른 이를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는 판 위에 배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하는 것인지 저한테 진지하게 묻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난희
2023-03-15 11:12
와~~~댓글들이 정말 새로운 질문과 다른 것과의 연결로 가득하네요. 경희샘의 성찰도 휵샘의 숙고도 정말 와닿습니다. 사유에 징검다리놓기 ~~
새콤달콤
2023-03-17 14:15
나를 위해 공부한다......왜 일리치는 뉴욕의 푸에르토리코 거주구역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멕시코로... 동남아시아로 도보여행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때 신었던 낡은 운동화를 친구 리 호이나키에게 선물했을까요?..... 공부한다는 것과 떠난다는 것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일단 일리치의 모습을 담은 마지막 흑백 사진을 킵해두었습니다. 지성을 소유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섬세한, 지속적인 주시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가 삶에서 약간의 다른 질적 비약을 경험할 때, 그 소중한 삶의 진실과 정황을 지속하지 못하는(=심화하지못하는) 이유는 그 지점을 계속 두드릴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ᆢ싶습니다.
맑스가 더 나아가지 못한 지점이 어렴풋이 짚이는군요. 제 젊은 날 이후 여즉지 신체에서 싹 빠지지 않은 짠 물인데 ᆢ샘이 예리하게 짚어주셨네요. 맛있는 공부란 역시 디테일에 있다는 것 ㅎㅎ
'학교는 사회적 신화의 저장고이고 신화의 모순을 제도화하는 수단이며 신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재생산하고 은폐하는 장소'.
글쓰기와 역사 수업에서 읽고 있는 미국민중사 1권에 19세기 미국교육과 관련된 대목을 채운샘이 짚어주셨는데요. 일리치가 말하는 신화나 은폐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막대한 수입의 일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돈을 벌고 있더군요-를 기부해서 대학과 도서관( 심지어 흑인대학까지도) 을 건립했죠. 하지만 그들의 '박애'적 행위 속에 탄생한 대학이란 체제에 대한 반감을 잠재우고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충실한 완충제' 역할을 해주는 중간층을 길러내기 위한 수단이었죠. 중간층- 교사, 의사, 변호사, 행정관리, 기술자, 전문가, 정치인 - 은 보수를 받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재화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 것.' (미국민중사1, 452쪽)
완충제 역할에 대한 보수, 따갑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교사와 학교교육의 일면이었어요. 신화나 은폐에 대한 저의 시각이 일리치가 말하는 교육담론을 너무 협소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우려도 있지만... 이렇게 저렇게 일리치가 말하는 언어의 세계로 다가가고 싶네요.
"나를 위해서 공부한다"는 말을 읽으면서 지난 세미나에서 유용성에 대해 얘기했던 게 떠오릅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거야"라며 우리는 어디다 써먹으려고 하는 공부, 쓸데있는 공부를 합니다. 시험, 입시, 자격증, 취업등을 위해 사회에 쓸모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하는 공부에는 왜 지금, 현재는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공기, 온도, 계절,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소통, 나누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계속 말하는 미래, 뿌옇고 잡히지 않는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금을 그냥 녹여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은 어딘가에 쓰여야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쓸모있는 인간과 잉여인간의 구분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잉여인간은 사회에서 배척해야 할 존재일까요? 쓰임없이 같이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정말 우리가 나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시스템의 한 부속품으로 충실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지 나와 다른 이를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는 판 위에 배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하는 것인지 저한테 진지하게 묻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와~~~댓글들이 정말 새로운 질문과 다른 것과의 연결로 가득하네요. 경희샘의 성찰도 휵샘의 숙고도 정말 와닿습니다. 사유에 징검다리놓기 ~~
나를 위해 공부한다......왜 일리치는 뉴욕의 푸에르토리코 거주구역으로, 푸에르토리코로, 멕시코로... 동남아시아로 도보여행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때 신었던 낡은 운동화를 친구 리 호이나키에게 선물했을까요?..... 공부한다는 것과 떠난다는 것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