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7. 일리-리 세미나. 학교 없는 사회 1-2. 후기. 새콤달콤.
우선 『학교 없는 사회』를 제 나름대로 간단히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 교육을 강제하는 것이 오히려 배움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라 한다. 난 처음 학교 교육 자체를 비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학교교육을 ‘강제’하는 걸 비판하는 거였다. 그에 따르면 ‘강제’ 교육은 ‘배우는 과정과 배움을 혼동’하게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정’은 나이가 어릴 수록, 더 많은 단계를 밟아야, ‘교사 앞에서 습득한 행동’이어야 ‘특별한 가치’가 있고, ‘특별한 이익’(성공)을 얻어 ‘제대로 된 인간’, 책임감 있는 사회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일리치는 이 믿음이 ‘학교화’, ‘사회화’, ‘가치의 제도화’를 만들어내는 논리이며, 관료주의적 행동을 만들어내는, 소비 사회의 향하는 논리로 보는 듯하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이 내 개인적 목표를 선택하고 결정하고 평가해도 된다’만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배움’ 뭘까, 일리치는 그 어떤 전문가의 가르침보다 ‘자기 선택하에 이루어진 만남에서 우연히 얻는 수확에 더 가치’를 둔다. 예를 들어 우연한 배움에서 보통의 아이들은 모어를 배우고, 보통사람은 외국에 살거나, 외국 여행을 하거나, 외국인과 사랑에 빠질 때 외국어를 잘 배운다는 것이다.
우리의 발제 내용과 토론은 이렇습니다.
경덕샘: 일리치는 ‘순차적인 교육 과정’이 아닌 “교육 네트워크, 곧 각각의 학습자가 자신의 통제하에 자율적으로 자원을 조합하는 망”(147)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희욱샘: ‘교육과 배움의 차이가 있다. 교육에는 강제성, 의무성, 집단성의 성격을 띄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위치가 수직적이다. 배움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자율적이며 주체화 객체가 불분명하다.’
영아샘: 살면서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내는 사회의 요구에 끌려다닌다. 그로 인해 실제로 가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꽤나 볼 수 있다. 이런 ‘현대화된 가난’의 굴레에 오르게 되면 또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삶을 자본에 가져다 받치고, 그렇게 자율성을 잃은 사람들은 또 다시 타자가 제시하는 가치를 따른다.
토론: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자율성은 뭘까, 자율성은 자기 맘대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자율은 누군가가 가르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결여가 없는 자율적 공생이다. 우리 몸 자체는 이미 살아내고 있으므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제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자유는 뭘까, 우리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전제 조건하에서 배우고 싶은 어른, 동료, 스승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소비의 자유도 있다. 그건 과연 자유일까, 학교 안에서 획일화된 만들어진 욕망이 아닐까...
영아샘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써 자신의 학생들이 이런 남과의 비교로 자신의 삶을 허비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지 않기를 바란다. 또 학교에서 주어지는 무상 교육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자신을 아끼고 타자들을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영아샘은 현재 학교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복지 혜택을 최대한 누리기를 바라는 듯했다. 지난주 영아샘은 집에서 돌봄을 받지 못할 수 있는 학생들을 걱정하며 학교라도 그런 학생들에게 돌봄을 행할 수 있는, 그나마 다른 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이 학교에서라도 돌봄을 받을 수 있고, 나아가 전쟁터 같은 학교 밖 삶의 현장 속에서 잘 살아내길 바라는 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영아샘은 학생들이 그들의 ‘운명에 순응하는 것’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했다. 그 생각에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비록 일리치의 탈학교화는 좀 거리가 있을지라도.
운명에 순응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토론은 길게 이어졌으며, ‘아이들이 공부할 때 견뎌야 한다’고 까지 진전되었다가, 아이들이 어떤 배치 속에서 견뎌야 하느냐, 억압하는 규율이냐, 예속시키는 규율이냐에 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이는 자기 윤리가 아니다. 자기 규율은 자기 기쁨이 되는 규율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경희샘: 제도에 대한 믿음, 학교 안에서 관계의 갈등과 문제해결의 만능열쇠처럼 작동했던 지침, 규정, 공문... 모든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기준으로 삼았던 말들... 학교 안에서 각 개인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협의에 조금이라도 이견들이 있으면 어김없이 공문 내용이나 지침이 거론 됐다... 그 지침을 넘지 않는 선에서 아니 오히려 그 지침이란 것을 어떻게 잘 지킬 것인가가 논의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제도가 ‘욕구불만의 원인이 되는 힘’을 발달시켜왔다는 일리치... 나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고 각각의 욕망을 초월해서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위상을 제도에 부여하고 있었다. 한 제도가 현실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지만 제도 자체가 벌이는 일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토론: 이에 대해 누군가는 경희샘의 글이 교사로서의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다... 학교에서의 배움은 활동을 분리하게 한다. 반면 일리치가 말하는 배움은 자기 배움과 활동을 분리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나와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제도가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일리치는 그것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학습자가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사물과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162)
이제 일리치는 그 누구도 학교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 한다. 실제로 승연샘은 학교에서 학생들 상담을 하는데, 요즘 학생들은 대학가는 걸 목표로 두지 않는다고 한다. 전자 음악 독학을 하거나, 그림만을 그리거나, 어쨌든 요즘 학생들은 자기 목표가 뚜렷하고, 학교생활도 충실히 따르고, 학교 밖 길도 스스로 찾는다 한다.
이에 대해 다양한 토론이 오고 갔다. 이제 숨은 교육 과정이 되고 있으므로 비판하기가 힘들다... 이제 공생의 삶과는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패쇄적인 자본화가 아닌가... 이제 기술 발달과 함께 교사는 네트워크 상담자, 관리자로서의 역할도 주어지는 듯하다... 이제 온라인으로 하는 배움은 내가 관심 있는 것만 있다는... 이에 대해 누군가는 그곳에 갇히지 않게 나를 흔들어 줄 수 있는 ‘비판적 조언자’로서의 ‘연장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그 연장자 역할이 채운샘이 아니냐...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세미나야 말로 스스로 배우는 기쁨을 만들어가는 중이라 했다.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세미나야 말로 기쁨을 만들어가는 중이라는 미현쌤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오늘은 깨달음의 혁명을 읽고 과제를 했는데,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이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더라구요.
저도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싶고, 제가 머무는 공간들의 사람들도 삶의 기쁨이 넘쳤으면 좋겠고 하던데, 우리 세미나도 그런 삶의 기쁨이 넘치는 과정으로 만들어가요~❤️
학교교육을 강제하는 것은 배움의 권리, 즉 선택권을 빼앗는 일이라고 비판했죠.. 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배움의 기쁨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상기해 보고 싶습니다. 아이들한테는 교육을 강제해야 제대로 성장한다는 생각을 하죠. 저는 이책을 통해 그게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움을 선택하는 것은 어른들의 특권같아 보였습니다. 아이들한테도 배움의 선택권을 주고 옆에서 약간의 가이드(연장자의 역할)만 준다면 배움의 기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배움의 기쁨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견뎌내는 힘은 충분히 길러질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요.. 토론의 전개를 잘 정리해 주신 새콤달콤 자두사랑 쌤 글 잘 읽었습니다~~
'난 처음 학교 교육 자체를 비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학교교육을 ‘강제’하는 걸 비판하는 거였다.' '학교교육 자체'라고 할 때 학교교육은 무엇일까요? 저는 '학교 없는 사회' -물론 번역된 제목인지만- 라는 전제를 접하며 불온한, 혹은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것에 접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학교를 없애자는 말이겠어, 다른 뜻이 있겠지 하면서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회해서 생각하려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국가 없는 사회, 민족 없는 사회 등 이 시대를 규정짓는, 너무 당연하게 있어야 하고 그래서 삶을 유지 가능하게 믿고 있는 것을 제거한 상상력을 우리는 차단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학교자체처럼 자신에 대한 규정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학교교육이 하고 있고... 그런 학교교육을 제거한 출발이나 전제로서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학교교육이 도대체 뭐길래 나는 이런 태도를 취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남네요. ㅎㅎ
경희샘 말을 듣고 보니 학교 교육 자체라는 말도 어색하네요. 일리치는 교육과 배움도 구분해 쓰고 있는데~ㅎ~
오얏꽃 자두사랑 새콤달콤 샘의 꼼꼼한 후기 고맙게 읽었습니다. 토론을 복기해보니 그야말로 광막한 사막에 흩날리는 모래 바람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만큼 일리치의 사유와 언어가 우리의 좁고 딱딱한 사유의 틀에 갇히길 거부하는 징후겠지요. 신체가 굳는 것과 비례해 사고도 굳어가는 것은 일면 진실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도 시간이 별로 없는데 ᆢ일리리 세미나가 굳은 껍질을 두드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몸 자체는 이미 살아내고 있으므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제도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토론 중에 나온 말인 듯한데 후기에서 만나니 또 새롭네요. 이런 멋진 말을 우리가 얼마나 책임질 수 있을까 괜스레 검열도 하게 되고요 ㅎㅎ
새콤달콤샘이 정리해주신 토론 내용을 따라가다보니 <학교 없는 사회>를 2주만에 읽은 것이 새삼 아쉽습니다. 토론 주제 하나하나가 다 세미나 시간을 모두 할애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문제들이라서요. 동시에 다음 책들을 읽으며 어떤 이야기를 또 나누게 될지 기대도 됩니다.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는 토론의 여러 결들을 살린 정말 좋은 후기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