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를 다 읽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이 지났는데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이나 사고의 전제, 익숙한 삶의 방식을 돌이켜보게 만드니까요. 실제로 일리치의 글을 읽으며 불편을 느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저도 책이 술술 넘어가지는 않았고요. 저는 그것이 일리치가 우리의 제도화된 시선의 맹점을 찌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글을 써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불쾌한 말을 써서가 아니라 관점의 전환을 강요함으로써)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소유냐 존재냐
“현대의 ‘진보’ 개념은 생산과 소비의 끝없는 증대와 시간 절약을 통해 최대 능률과 이윤에 이르는 원리, 즉 삶의 질이나 인간 본성의 발현에 미치는 효과와는 상관없이 모든 경제 행위를 측정하는 원리를 말한다. 소비 증대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며, 대규모로 기업 경영을 하려면 관료화와 비인간화는 불가피하다는 신조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목적이 ‘소유’에 있지 ‘존재’에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에리히 프롬)
일리치가 ‘학교’에 반대한 적은 없습니다. 일리치는 ‘학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가치체계’를 의심합니다. 일리치가 문제 삼은 것은 저개발국에 학교를 지어주는 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라는 믿음, 교육 예산을 더 많이 책정하고 더 뛰어나고 혁신적인 전문가들에게 교과과정을 짜도록 하면 배움이 증진될 거라는 믿음, 인간의 능력을 표준화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에 깔려 있는 것은 제도와 서비스와 상품이 인간의 삶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자면 일리치는 학교 비판을 통하여 현대의 진보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요.
지난 세미나에서는 배움에 대해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습니다.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게 무엇이기에 일리치는 배움을 제도화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습득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배움이 주는 기쁨이란 뭘까요? 저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구절을 통해 배움에 접근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리치가 말하는 배움, 학교화에 의해 훼손되는 배움, 관리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측정불가능한 경험에 의존하는 배움이란 ‘존재’와 연관된 것입니다. 반면 학교화는 배움을 ‘소유’를 중심으로 조직함으로써 그것을 왜곡하고 맙니다.
‘소유’로부터 오는 기쁨은 언제나 반응적입니다. 남들보다 더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 남들보다 같은 문제를 더 빠른 시간 안에 풀 수 있다는 것, 평균 이상의 교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등등. 자기 역량의 직접적인 변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졸업장, 자격증, 높은 지능, 풍부한 교양 등의 ‘소유’와 연관된 기쁨은 자기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의 비교나 자아상에 대한 집착과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엔 공부와 그 결과가 분리됩니다.
반면 ‘존재’와 연관된 배움은 배움과 그 결과가 분리되지 않는 차원입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더욱 긍정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상식의 인력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 불충분하지만 이것이 ‘존재’와 연관된 배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학교화하는 관점이 전제하고 있는 삶에 대한 어떤 판단들이 소유의 대상으로서의 앎과 배움의 이미지를 강하게 전제함으로써 ‘존재하기’와 더욱 관련된 배움을 알아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겠죠.
학교 없는 사회
첫 시간에는 『학교 없는 사회』의 개념과 사유를 좇아가느라 바빴다면 이번에는 ‘학교 그 이후’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습니다.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를 출간한 직후 볼프강 작스와 같은 젊은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됩니다. 즉 일리치 자신이 “의무 학교교육의 바람직하지 않은 부작용을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이미 학교로부터 교육적 기능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과, 또 점점 더 다른 형태의 의무적 학습이 현대 사회에 제도로 자리 잡게 되리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일리치,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81쪽)입니다.
수목적이고 위계적이며 강제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육중한 도구인 학교. 일리치는 여기에 집중한 나머지 학교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가 학교화에 대한 유효한 저항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었다. 사회가 교육에―마약처럼―중독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뒤 1970년대 내내 나의 사고와 성찰은 대부분―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다음 질문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항상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많은 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뭔가를 배워왔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교육의 획득이라는 것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교육을 희소성이 전제된 상태에서 배우는 것으로, 즉 지식이라 불리는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은 희소하다는 전제 하에 배우는 것으로 정의하게 됐다.”(일리치,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81~82쪽)
일리치의 초점은 처음부터 학교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를 출간한 후 시선을 더욱 넓혀 학교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폐지하는 것을 넘어서 교육에 대한 중독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문제 삼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희소성이 전제된 상태에서 배우는 것으로서의 ‘교육’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고 하고요.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도 ‘탈학교’라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안교육은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교육’과 ‘배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요. 그와 무관하게 학교는 교육에 대한 독점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령기의 아동, 청소년들이 여전히 학교에 가지만 (승현샘과 영아샘께서도 말씀해주셨듯이) 이들에게도 이미 학교는 대체 가능한 하나의 수단일 뿐 교육 그 자체의 담지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다양한 교육 서비스들이 학교 바깥에 포진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존재의 상품가치는 이제 일리치가 비판했던 ‘졸업장’과 ‘자격증’을 넘어 경계를 확장하고 있고요.
(“인적 자본’의 평가는 명시적인 자격증이나 ‘스펙’ 같은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성형수술은? 외국 여행은? 필라테스 1년치 티켓은? ‘슈트발’ 세울 수 있는 명품 정장은? 자신의 클래스를 보여줄 수 있도록 ‘핫플’에서 폼나게 찍는 SNS 사진의 생산 비용은? ‘인적 자본’의 ‘매력’이여, ‘네트워크의 마력’이여. ‘지식 자본주의’와 ‘네트워크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청년 세대는 이제 일상의 매 순간이 자신의 ‘자본 형성’의 계기라는 강박 속에서 살아가야 하며, 거기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면 빚을 내서라도 질러대야 하는 상황에 살고 있다.” 홍기빈)
저는 학교 바깥의 교육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소비 행위 이상으로 확장되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서모임, 글쓰기 수업, 다양한 공방, 자격증과 무관한 여러 가지 클래스들이 요즘 정말 많이 보이는데요. 학교보다 훨씬 유연한 이 비-학교적 교육 서비스들은 배우려는 사람이 더 많은 선택권을 지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이는 자기 취향과 관심에 부합하는 서비스를 계속 소비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끊임없이 향상시켜야 한다는 강박과 그로부터 오는 초조함, 불안감을 벗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토론 때 나왔던 이야기는 우리가 ‘관계맺음’을 통해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리치는 배움을 위한 조건으로 ‘동료’와 ‘연장자’를 꼽았습니다. 공부가 단순히 나의 취향, 나의 관심, 나의 향상을 위한 것으로 귀결되고 닫혀버리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동료와 연장자, 친구와 스승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덕샘께서는 사물, 모델, 동료, 연장자라는 일리치가 정한 배움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고 시작할 수는 없는 것 같다고 얘기해주셨습니다. 일단 동료들을 만나면 필요에 따라서 연장자를 초청할 수도 있겠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어떤 기관이나 도구, 네트워크 같은 것과 배움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배움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면서 나아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깨달음의 혁명>을 6장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영아샘, 후기는 경희샘께서 맡아주시겠습니다.
상식의 일방적인 힘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자신을 끊임없이 향상시켜야 한다는 강박과 그로부터 오는 초조함, 불안감을 벗어낼 수 있는 것... 에 대해 일리치는 '더러운 흙을 만지거나 어리석은 실수 또는 실패를 통해서만 계획되지 않는 것이 주는 시적 경이를 경험할 수 있다. 시궁창의 귤껍질, 거리의 웅덩이, 질서와 프로그램과 기계의 고장이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빈둥거리기야 말로 우리가 바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일 것이다.'(213) 라 합니다. 이런 일리치~ 너무 멋찌죠~^^
건화샘의 글을 읽다보니 앞서 새콤달콤님이 후기에서 인용한 '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학습자가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사물과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인용문이 떠오르네요. 학교에서 가르침은 '무엇'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학습조건으로 흔히 목표, 계획, 내용, 평가를 이야기하곤 했죠. 이 네 개의 말만 봐도 어디에도 가르침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배움의 위치는 없습니다. 일리치가 제시하는 '공부경로'('학교없는 사회', 박홍규, 생각과 나무, 153쪽)로서 배움은 가르침 중심의 학교교육의 전제를 훌쩍 뛰어넘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경로라는 말 속에 이미 도전과 실험을 포함한 행위의 말이자, 구심력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학교교육과는 달리 원심력과 자율과 같은 다른 차원의 일들이 전개될 수 있는 말이다 싶었지요. 공부경로로서의 배움에 우리가 이야기한 '동료'와 '연장자' 외에 '사물'과 '모델'이 있었지요. 학교가 사물과 관리맺도록 하는 방식- 관리와 통제, 제한과 배타성 등- 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배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동은 기술과 가치의 모델이 되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사물의 세계에서 성장한다.(...) 사물, 모델, 친구, 연장자는 학습에 필요한 네 가지 자원이다." (같은 책,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