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혁명celebration of awareness》을 6장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난희샘께서는 “일리치의 언어가 철벽처럼 느껴진다”라고 하셨는데요. 저도 공감했습니다. 《학교 없는 사회》도 어려웠지만 일리치의 일관된 비판과 논증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이 책은 뭐랄까 좀더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책입니다.
예를 들어 자선에 대한 일리치의 비판에는 삶에 대한 일리치 나름의 깊은 이해가 깔려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상식과 충돌하는 것이어서 막막합니다. 끊임없이 물음표를 찍게 만듭니다. 일리치 말대로 막무가내식 자선은 그 수혜자들을 무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걸까요? 일리치는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역의 성구실(聖具室)에서 식량 배급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하는데,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도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가난과 고통이란 무엇일까요? 가난과 풍요, 고통과 기쁨은 대립적인 걸까요? 가난은 구호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걸까요? 그 전에, 가난과 고통은 정말로 해결되어야만 하는 걸까요?
저는 책을 읽으며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요. 우리가 아무런 의식 없이 ‘가난’을 ‘결핍’으로 고쳐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가난이란 배고픔은 아닌 것 같고요. 비싼 (뷰티, 멘탈, 헬스 등등에 대한) 케어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것이고, 폼 나는 차를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사치스런 해외여행을 즐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다 가지면 정말로 결핍감은 사그라들까요? 삶은 충만해질까요? 분명 새롭거나 더욱 치명적인 결핍과 공허가 찾아오겠지요.
우리는 결핍에 대한 공포 속에서 가난을 혐오합니다. 그런데 사실 결핍에 대한 공포는 가난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환상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에리히 프롬의 표현에 따르면 이 환상은 “삶의 목적이 ‘소유’(따라서 사용)에 있지 ‘존재’에 있는 게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쉽게 말해 명품을 갖고, 고급 서비스를 받고, 비싼 동네에 살면 내 삶이 근사해질 거라는 믿음이죠. 이것의 다른 버전은 모든 외부 조건이 완벽하게 세팅되면 ‘해피엔딩’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고요. 또 다른 버전은 내가 뛰어난 재능을 소유하거나, 남다른 능력을 개발하거나, 불굴의 노력을 경주한다면 내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리라는 믿음입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상품이 되었건, 환경이 되었건, 능력이 되었건 희소한 자원들로 자기 삶을 칭칭 감으면 삶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 이때의 ‘더 나은 삶’이란 아마도 가난과 병과 장애와 슬픔과 지루함이 제거된 상태, 기쁨과 자극과 즐거움과 행복이 계속 이어지는 삶일 것입니다. 토론 때 나왔던 표현으로는 ‘꽃길만 걷기를’ 바라는 마음. 계획과 관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프로메테우스적 ‘기대’가 바로 이런 것이겠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대와 환상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겪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배제된다는 점입니다. 권태로움을 어떻게 겪을까? 늙음을 어떻게 겪을까? 병을 어떻게 겪을까? 쾌락과 어떻게 관계할까? 이런 질문은 사라지고 동시에 쾌적하지 않은 순간들은 죄악시되지요.
저는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유물을 상대적으로 적게 갖는 것으로서의 가난을 신비화하는 것도 소유중심적인 사고의 일환이 아닐까요? 우리는 나름의 풍요와 향상을 도모해야 합니다. 일리치가 말하듯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음식과 옷과 거처를 제공하는 일”(20쪽) 또한 중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 풍요이고 향상인지 알려면 소유에 대한 환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억압을 재생산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욕망입니다. 욕망이 결핍을 재생산하는 한 해방은 요원하고 우리의 반쪽짜리 자유는 차별과 배제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유에 대한 환상과 거기에 딸려오는 결핍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면 분명히 다르게 살아갈 길은 있습니다. 간단치 않을 것이고 완벽한 구원은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다르게 해볼 수 있을지 질문할 여지는 언제나 있습니다. 결핍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일리치가 말하듯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해방하고 서로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솔직히 여전히 어렵네요. 소유에 대한 환상이 불만족을 재생산한다는 것, 그 때문에 일리치는 라틴아메리카에 미국식 우상을 이식하러온 이상주의자들을 비판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소유냐 존재냐’라는 에리히 프롬의 정식에서 삶의 목적을 소유가 아닌 존재에 놓는다는 건 뭘까요? ‘모두가 부자가 되는 꿈’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요? 일리치는 그 해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우상을 세우는 일을 경계했던 것이겠죠. 예수의 삶에서 보듯이 다른 이의 구원을 대신해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난희샘이 과제에서 ‘나는 나’를 넘어가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의 삶이 나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을 의심해보지 않고서는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아닌 다른 삶의 비전을 상상하기가 어렵겠죠.
침묵의 문법
또 한 가지, 우리는 《깨달음의 혁명》 4장 ‘침묵의 문법’을 읽고 오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에서 일리치는 외국어를 배우는 경험에 기초하여, 언어란 언제나 비언어적 차원(침묵)과 맞닿아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일리치의 멋진 표현에 따르면 언어란 “침묵의 줄에 소리를 매듭지어 놓은 끈”(63쪽)입니다.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이 놓인 맥락을 살펴야 하지요. 그 맥락이란 표정이나 제스처일 수도 있고, 문화적인 배경일 수도 있고, 어떤 발화가 전제하고 있는 바의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의 말에서 말해지지 않고 있는 것까지 들을 수 있어야 우리는 그와 깊이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상호적 변형으로서의 소통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자신의 연구가 ‘언어의 역사’가 아닌 ‘침묵의 고고학’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여기에서 푸코와 일리치는 언어에 대한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리치는 철학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수행으로서의 침묵을 탐구합니다. 침묵은 소통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언제나 말을 아끼는 편이 스스로에게 이롭다는 식의 통속적 교훈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침묵은 사랑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무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세계가 멀면 멀수록 관심의 침묵은 더 큰 사랑의 표시”(66쪽)라는 일리치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국인이 미식축구에 대한 잡담을 듣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하이 알라이(스페인, 중남미 등지에서 즐기는 스쿼시 비슷한 실내 스포츠)라는 낯선 게임 얘기를 경청하는 것은 사랑의 표시라는 것이죠. 시골 버스에 오른 도시 신부에게 어느 집 염소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은 일종의 선물이고요. 자신의 앎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 자기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은 것을 들으려는 이의 침묵. 이것이 사랑의 침묵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리치가 말하는 침묵이 공감이나 동일시 같은 것이 아니라 거리를 변주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해 가능한 것들에만 귀 기울이는 것, 이해불가능한 것을 이해불가능한 채로 내버려두는 것은 침묵의 문법에 어긋납니다. 나의 중심에서 벗어나 거리를 좁히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면서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 이것이 일리치가 말하고자 하는 침묵을 통한 소통이 아닐까요? 일리치에 따르면 이러한 의미의 소통, 관계 맺기는 또한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세상을 구원한”(74쪽) 마리아의 침묵, 피에타의 침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기력한 순응을 말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미지의 것으로서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 자기 사고의 전제나 익숙한 범주들을 회의할 수 있는 유연함, 낯선 이 앞에서 스스로를 무장해제 할 수 있는 강인함 같은 것으로 저는 제 나름 이해를 해보았습니다.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태도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일리치는 스페인어를 배우는 외국인 선교사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는 일도 언어를 배우는 일입니다. 일리치의 언어를 배우고, 푸코의 언어를 배우고, 다른 시대를 살아간 누군가의 언어를 배우고, 같이 공부하는 스승과 동료의 언어를 배우고, 또한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언어를 다시 배우고. 이 과정에서도 침묵은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권위를 지닌 고전이나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야 한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고요. 나와 텍스트 사이의 거리를 감각하면서, 또 그 거리를 변주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점에서요.
‘일리치의 사상’이라는 고정된 내용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이 세미나도 별 의미가 없겠죠. 그런 거라면 일리치 사상을 잘 요약해놓은 책을 읽고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을 취하고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은 걸러내면 되니까요. 일리치는 선교사의 침묵은 그 자신에게 하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극히 먼 곳의 낯선 이들이 드리는 기도에서 이 선물을 배우며, 고향의 누구보다 더 멀고 낯선 그들을 사랑하는 데서 이 선물을 경험”(71쪽)한다고 합니다. 일리치의 책을 읽는 것도 우리에게 일종의 선물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깨달음의 혁명》을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미현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지난 세미나 이후 일리치의 '무력함'의 의미가 마음을 두들겼습니다. 능력 중심의 세상에, 힘을 갖지 않고선 산다는 말조차 무색해지는 세상에, 무력함이라니ᆢ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세상을 구원"한다니 ᆢ이런 마음이 피에타의 마리아의 영성이라니 ᆢ<깨달음의 혁명>의 원제가 '깨어있음의 기쁨'인데, 이 책을 리ㅡ리딩하면서 저를 가로막는 언어는 무의식의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모종의 힘을 욕망하고, 눈 먼 힘이라 하더라도 일단 잘난체를 하고 싶은 모양이예요. 공부도 하고 세상에서 잘 나고도 싶고 이 두가지를 한번에 다 하는 게 모순이라는 걸 일리치가 너무 정확히 찔러주니까 ᆢ그래서 이 책이 그렇게 어렵게 다가오는 게죠.
건화샘의 후기 공지가 힘을 뺀, 수수하면서도 성실함이 베인 글로 다가옵니다. 흑백의 일리치 사진과 잘 어울리네요.
영아
2023-03-26 21:47
내 삶 근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미나 열어줘서 고마워요~이게 선물의 경험이네요~❤️
새콤달콤
2023-03-27 08:15
'깨달음의 혁명'이 '깨달음의 기쁨'인데, 잘난 채도 하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고... ㄷㄷㄷ... 큰 울림있는 소리네요.
휵
2023-03-27 14:52
저도 한때 소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존재를 향한 사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명품이 나를 더 돋보이게 한다는 행동에는 그 어떤 연유도 없이 그저 소유가 나의 존재가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서히 그 상품들처럼 내가 비싸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내 감각은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슬 촌스럽다고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근대적인 생각 대신 이젠 탈근대적인 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품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반짝이고 화려하게 변신하는 과정에 수많은 파괴가 발생한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존재하나하나에 값을 매기는 이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함께 갈 수 있을까요?
경희
2023-03-29 08:14
건화샘을 통해 저에게 확성(?)되는 '소유나, 존재냐'의 질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번에 문득 존재 옆에 나란히 놓인 '소유'가 너무 큰 무게로 내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여러 계기가 있었겠지만 건화샘이 세미나 때 인용했던 내용 중에 " 그들은 알고 있다, 욕망은 생산적 권력으로 삶을 껴안는다는 것을, 또한 욕망이 필요를 더 적게 가질수록 그만큼 더 강렬한 방식으로 삶을 재생산한다는 것을.”(들뢰즈·과타리,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62쪽)"라는 부분이 있었죠. "욕망이 필요를 더 적게 가질수록 더 강렬한 방식으로 삶을 재생산한다"는 전제 속에서 소유는 지금과는 다른 위상과 다른 값어치를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지금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소유는 존재의 일부분이고 하나의 방식일 뿐인데요. 물질적 풍요라는 '소유'를 '삶'과 동급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존재 옆에 나란히 놓인 소유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환상'이라는 건화샘의 말, 이 환상을 어떻게 걷어가며 살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정말 이 환상을 걷어내며 살고 싶은 걸까요? ㅎ
지난 세미나 이후 일리치의 '무력함'의 의미가 마음을 두들겼습니다. 능력 중심의 세상에, 힘을 갖지 않고선 산다는 말조차 무색해지는 세상에, 무력함이라니ᆢ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세상을 구원"한다니 ᆢ이런 마음이 피에타의 마리아의 영성이라니 ᆢ<깨달음의 혁명>의 원제가 '깨어있음의 기쁨'인데, 이 책을 리ㅡ리딩하면서 저를 가로막는 언어는 무의식의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모종의 힘을 욕망하고, 눈 먼 힘이라 하더라도 일단 잘난체를 하고 싶은 모양이예요. 공부도 하고 세상에서 잘 나고도 싶고 이 두가지를 한번에 다 하는 게 모순이라는 걸 일리치가 너무 정확히 찔러주니까 ᆢ그래서 이 책이 그렇게 어렵게 다가오는 게죠.
건화샘의 후기 공지가 힘을 뺀, 수수하면서도 성실함이 베인 글로 다가옵니다. 흑백의 일리치 사진과 잘 어울리네요.
내 삶 근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미나 열어줘서 고마워요~이게 선물의 경험이네요~❤️
'깨달음의 혁명'이 '깨달음의 기쁨'인데, 잘난 채도 하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고... ㄷㄷㄷ... 큰 울림있는 소리네요.
저도 한때 소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존재를 향한 사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명품이 나를 더 돋보이게 한다는 행동에는 그 어떤 연유도 없이 그저 소유가 나의 존재가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서히 그 상품들처럼 내가 비싸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내 감각은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슬 촌스럽다고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근대적인 생각 대신 이젠 탈근대적인 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품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반짝이고 화려하게 변신하는 과정에 수많은 파괴가 발생한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존재하나하나에 값을 매기는 이 시대에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함께 갈 수 있을까요?
건화샘을 통해 저에게 확성(?)되는 '소유나, 존재냐'의 질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번에 문득 존재 옆에 나란히 놓인 '소유'가 너무 큰 무게로 내 삶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여러 계기가 있었겠지만 건화샘이 세미나 때 인용했던 내용 중에 " 그들은 알고 있다, 욕망은 생산적 권력으로 삶을 껴안는다는 것을, 또한 욕망이 필요를 더 적게 가질수록 그만큼 더 강렬한 방식으로 삶을 재생산한다는 것을.”(들뢰즈·과타리,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62쪽)"라는 부분이 있었죠. "욕망이 필요를 더 적게 가질수록 더 강렬한 방식으로 삶을 재생산한다"는 전제 속에서 소유는 지금과는 다른 위상과 다른 값어치를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지금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소유는 존재의 일부분이고 하나의 방식일 뿐인데요. 물질적 풍요라는 '소유'를 '삶'과 동급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존재 옆에 나란히 놓인 소유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환상'이라는 건화샘의 말, 이 환상을 어떻게 걷어가며 살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정말 이 환상을 걷어내며 살고 싶은 걸까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