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책임
“저는 1964년 초 브라질 동부 세르지피 주에서 프레이리가 가르치는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한 저녁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날 한 농부가 일어나더니 뭔가 단어를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한참 만에 입을 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말은 제가 지금까지 말하고자 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젯밤에 한숨도 잘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엊저녁에 제 이름을 처음 썼거든요…. 게다가 저, 저는… 아니, 우리는 알게 되었어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요.’”(깨달음의 혁명, 228쪽)
우리가 한참 동안 토론했던 구절입니다. 조금 의아했습니다. 프레이리와 함께 글을 배운 한 농부에게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쓰게 된 순간은 정치적 책임에 대한 자각의 순간이기도 했답니다. 어째서일까요? 문해력을 갖추는 문제와 정치의식을 갖는 문제.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은 완전 별개의 문제니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랑시에르가 떠올랐습니다. 그 역시 일리치처럼 어떤 식의 배움이 우리에게 예속을 가져오고 또 어떤 식의 배움이 우리를 정치적 해방으로 이끄는지를 질문했다는 점에서요. 배움을 둘러싼 조건, 그리고 그 안에서 주체가 앎과 맺는 관계가 그 자체로 예속이나 해방을 낳는 정치적 장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요.
프레이리가 마련한 6주 간의 성인 문해교육에서는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논쟁의 초점이 되는 단어들을 통해 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글을 깨우치는 학기 내내 선택한 단어를 분석하는 데 학습을 집중했다고 하죠. 이 과정은 존재와 능력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 배움의 과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처음 배웠을 때가 기억납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저는 둘리가 나오는 비디오를 보면서 글자를 깨쳤는데요. 그러고 나서 얼마 동안은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간판이나 메뉴판, 표지판 등등 보이는 모든 글자를 닥치는 대로 소리내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건 제게 늘 바라보던 풍경에 보다 깊이 참여하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글자를 깨친다는 것은 중립적인 기술 하나를 습득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세상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 맺는 일이 아닐까요?
어쩌면 모든 배움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주워듣기로는 코딩의 언어를 배우면 컴퓨터 화면이 달리 보인다고 합니다. 법률 용어와 그 원리를 배운다면 어떨까요? 건축공학이나 산업디자인은? 목공은 또 어떨까요? 이 역시 크고 작은 관점의 변형과 관계의 확장을 수반하겠죠. 다만 우리는 누군가 계획한 방식대로,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거나 더 높은 등수를 얻는 것에 초점을 맞춰 배우기 때문에 이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프레이리의 학생들이 느낀 것을 공감하기가 어렵죠. 다분히 정치적인 단어들을 통해 글자를 깨친 이들에게 문해력의 획득은 수동적인 존재로 남아있던 일상의 많은 영역에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알고자하고, 알게 된 것들에 응답해야 할 책임으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의무라기보다는 관심이나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뉘앙스로 저는 읽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배움은 정치적 책임의식을 촉구하는 걸까요? 저는 공부를 하면서 느낀 독특한 경험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금 우리가 어떤 시간적 맥락 속에 있는지를 알게 될 때, 또 철학을 공부하면서 저의 사고를 규정하고 있던 전제를 의식하게 될 때 느끼는 해방감이 제게는 공부의 가장 큰 기쁨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나의 삶이 ‘나’에서 출발하여 ‘나’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이러한 경험은 어떻게 해서 기쁨을 주는 걸까요?
저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스피노자가 떠올랐습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유한한 존재들의 실존은 관계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내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모든 존재들은 또한 스스로를 지속하려는 경향(코나투스)을 갖습니다. 제가 어쭙잖게 이해하는 바로는 이때 코나투스란 고정된 실체로서의 무엇을 보존하고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방식의 관계들을 구성하려는 노력입니다. 특정 상태만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진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우리 몸의 신진대사도 제한적이겠죠. 마주침들에 대해서 특정한 방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은 존재역량이 작은 것이고, 더 복잡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마주침을 번역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역량이 큰 것이겠죠.
그래서, 랑시에르와 스피노자를 경유해서 생각해보면 ‘배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인 것 같습니다. 새롭게 획득된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겪는 관점과 태도의 변화,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변용이 배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때때로 공부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다양한 목소리들에 (패턴화된 방식을 벗어나) 보다 신중하고 섬세하게 응답하도록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타율적인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인 책임을 갖도록 하는 것 같고요. 물론 이것은 규범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규범을 해체하도록 추동하는 책임감이겠죠. 일리치를 읽고, 또 일리치를 통해서 이전에 읽은 것들을 다시 불러오면서, 저는 ‘공부’에 대한 저의 편협한 생각들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성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은 하나
그래서, 일리치는 ‘성적(性的) 책임과 정치적 책임은 하나’라고 말하는데요. 이것은 계획과 관리와 통제를 통해서 사람들을 계몽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하는 것 같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피상적인 산아조절 정책들이 실패를 맛보는 것을 보면서 일리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인위적인 조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대신에 우리는 주어진 규범과 전제를 뒤집어보면서, 보다 섬세한 관계맺음들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과정에서 문제를 다르게 겪을 수 있는 길들을 계속해서 모색할 수 있겠죠.
일리치가 다루고 있는 산아조절 문제를 읽으며,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저출산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이 낳아도 문제 적게 낳아도 문제, 정책적 관점에서 삶은 언제나 문제투성이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난희샘께서는 ‘왜 대한민국 여성만 낳는 아이만 아이라고 여기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셨는데, 거기에도 공감이 갔습니다. 일리치가 보았듯, 우리의 저출산도 정책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을 퍼준다고, 완벽한 시스템을 만든다고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까요? 그건 정치인들의 환상이죠.
근본적인 전제를 뒤집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출산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진단을 내리고 있지만, 이 현상을 문제화하는 시선은 대동소이한 것 같습니다. 노동인구 감소가 그것이죠. 노동인구가 감소해서 일하는 사람이 줄고, 연금을 내는 사람의 숫자와 그 액수도 줄고, 그러면 GDP도 줄고 경제규모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점점 늘어나는 노인들은 더 오래 일하거나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할 것이고 등등등. 이게 심각한 문제인 것은 맞지만 정말로 우리에게는 출산율을 회복하거나 다 같이 망하는 길밖에 없는 걸까요? ‘정상 가족’이 아닌 다른 관계 맺음들을 시도하고, 노동과 소비를 벗어난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아닌 풍요를 모색할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요?
저출산은 질문을 촉구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경제학자들은 재화가 늘어나면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데(그래서 다시 재화는 희소해지고 인간은 결핍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죠), 지금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현상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GDP가 늘어나고 즐길 거리가 많아져도 사람들이 이 사회를 ‘살 만한 곳’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증거 같기도 합니다. 저를 포함해 제 주변 친구들은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데 다른 존재를 책임진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삶이 버거워진 걸까요? 이건 경제적 문제이기도 하겠지만(높은 월세와 살인적인 물가, 미래를 그리기 어려운 노동조건 등등), 그 이전에 삶을 바라보는 경제적 관점이 만든 덫이 아닐까요? 삶을 끊임없는 투자와 개발로 보는 전제들이요. 이런 전제들에 함께 맞서는 것이 저출산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저출산의 원인이자, 저출산이라는 문제를 편협한 방식으로밖에 겪지 못하도록 하는 전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정보사회의 철학>을 2장까지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다음주 간식은 희욱샘, 후기는 영아샘께서 맡아주시겠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뵈어요!
내 이름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응답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는 부분에 주목하게 되는데요. 농부는 기존 교육과는 다른 방식의 배움을 통해 삶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이 이름을 쓰는 행위가 세상에 깊숙히 참여하게 되는 문을 열게 되어 그 내디딤을 묵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문자의 접근은 어떠할지 몹시 궁금하네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한글을 익히다는 게 배우지 못한 한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 응답하고 있다는 해석은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매주 정리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자를 깨친다는 것은 중립적인 기술 하나를 습득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세상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 맺는 일이 아닐까' 지난 주 세미나에서 글자를 배워 자신의 이름을 쓴다는 행위가 농부에게는 해독 불가능했던 낯선 세계의 관문을 발견한 일이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었죠. 저는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을 만났을 때의 난감함이 떠오르네요. 저에겐 규문에서 읽는 대개의 책들이 우주 저 멀리 떨어진 거리감을 주지요. 그것을 좁혀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속에서 이해되지 않음을 경험해요. 그 때 답답함과 막막함은 강렬하죠. 다가갈 수 없다는 감각을 겪는 시간, 정지한 듯한 관계. 알게된다는 것은 대상과 관계의 실들을 조금씩 엮어가는 일 같기도 해요. 배움에 있어서 '섬세'나 '신중'은 두고두고 고민하고 싶은 태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