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치의 <학교없는 사회>에 이어 <깨달음의 혁명>으로 향하는 방향을 우리가 잘 잡아나가고 있는 것일까? 일리치의 의도에 맞게 잘 이해하고 뜻을 제대로 나누고 있는 지 알고 싶습니다. 나로부터의 혁명은 참 막연하고 어렵습니다. 당장 될 순 없겠지요. 그래도 누군가가 그려준 지도를 들고 방향을 잡아 함께 걷다보면 깨달음으로 변화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미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쯤에서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꼭 둘러봐야 할 것을 짚어 보고 싶습니다. 사실 요즘 저의 화두는 ‘깊은 성찰’입니다. 함께 공부하는 어느 선생님께서 저한테 툭 던져주신 주제였습니다. 매주 목요일 이 배움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나? 타성에 젖어 세미나를 임하고 있지는 않나? 함께 나누는 선생님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내뱉는 주장보다 일리치가 말한 침묵이 주는 기쁨을 묵상해 본 적이 있나? 내 삶에 한톨이라도 녹여내려고 애쓰고 있는가? 왠지 이 공부만큼은 한발짝 한발짝 꼭꼭 눌러가며 걸어가 보고 싶습니다.
교회적 감각을 통한 그의 믿음
일리치는 급진적인 사상가 이전에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입니다. 여타 철학자들과 이론가들과는 달리 특별한 무언가(신)의
믿음을 전제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정확하게 직업적으로 말해서 종교인인 것이죠. 그는 이것을 가지고 자신만의
복음을 전했을 텐데요. 그것은 어떤 논리적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단히 모호하면서도 뚜렷히 존재하는 ‘
교회적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적인
영성이랑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봐야하는데요. 여기서 흥미로운 시각이 등장합니다.
일리치는
전체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형성되는 방식과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이 연결되어 원래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규범)을 상정하고 있으며, 전체
질서속에서 적절한
감각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방식, 즉 산업사회에서 배제된 사고 방식입니다. 일리치는 산업사회는 더 많은, 더 높은, 더 편한 것만을 좇아가며 종국적으로 인간성을 파괴하며 작동되고 그런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 저주를 말하고 있으며 우주 안에서
인간다움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형태 자체가
규모를 규정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가 일정한
규모(형태)로 결정되어 있어 그 규모를 넘어가면 형태가 흩어지고 질서가 깨지고 혼돈의 세계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미지의, 미래의 어느 지점을 향해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규모의 적절한 인간의 삶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이것은 세속적으로 생각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사유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그럼
세속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시대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
(자율적)규범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유이며 욕망에서 출발한다거나 지금 나한테 어떤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지를 묻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유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규범 자체를 벗어버리고 기술과 적극적인 인간과의 결합이 순수 인간과는 다른 종으로의 변환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일리치는 철저히 거부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일리치의
교회적 감각은 그의
중세로 향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 산업사회는 모든 것이 도표안에 질서지어지며 고정된 틀에서 구조화된 근대적인 사상에 젖어 있습니다. 자 그럼 12세기 중세로 돌아볼까요? 우선 사제들은 늘 신의 텍스트를 암송하며 온동네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일정적으로 울리는 종소리에 하루의 일과를 맞추었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기계음와는 다른 소리의 감각으로 세상과
교감했을 겁니다. 아이들은 이집 아이, 저집 아이 할 것없이 함께
공동체 안에서 양육되었으며 공동체 생활을 신성시하여. 마을 단위 안에서 비교적 인간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든 타자와의 만남을 구성해 나가므로 자연스럽게
인본주의적 태도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의 교회적 감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인간의 삶을 이끌던 힘이었던 이념과 신조, 종교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긴 투쟁의 끝머리에 서 있습니다. 신의 초월성이 인간으로 육화된 사건 곧 ‘
성육신’의 의미에 대해서도 좀 더 폭넓은
자각이 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경험에 대해 “예”라는 위대한 긍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자각입니다.” (P.153)
일리치는 아마도 인간은 그 자체로 위대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알고 있는 사회적 명령들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근원적인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모든 것을 먹고사는 문제로 귀결시켜 발전이나 진보만을 향해 앞으로만 가는 유용성의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인간은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서 자율적으로 공생하는 존재이고 이런 생각은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라 영적인 교회적 감각이 전제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인간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우기를 할 수 있으며
배움은 지식의 결핍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의 축적으로 쌓다보면 이를 수 있는 길이 아닌 어딘가로 훌쩍
도약하는 지점이 바로 그의 영성 또는 교회적 감각이 가닿는 지점일 것입니다.
물론 일리치는
교회에 대한 입장이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품었던 그래서 일리치는 늘 그가 향하고자 했던
댜양한 고통이
실존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
성육신’의 체험, 자기를 넘어가는 체험을 시도하면서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각할 수 있는 힘,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넘어갈 수 있는 힘을 믿는 것이 바로 영성이자 그의 교회적 감각이다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는 현대 문명을 기독교의 타락과 연관지어 생각하면서도 기독교를 전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 아마 교회적 감각에 의한 그의 믿음일 것입니다. 그런 교회적 감각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며 가르칠 수 있는 것과 가르칠 수 없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를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잠재성을
신뢰하고 그것을 최대한 발현시키려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교회적 감각을 키울 수 있는 길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희망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고 그렇게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를 만든다 (P.304)라고 합니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려지는 기는 하나, 세미나를 통해 나로부터의 혁명을 향한 희망, 그의 교회적 감각을 더듬더듬 찾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우! 교희적 감각에 대해 이렇게 말 할 수 있군요... 교회적 감각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 안에서 훌쩍 도약할 수 있는 영성이다... 잘 읽었습니다.
휵샘~~잠못이루는 밤이셨군요. ㅎㅎ
세미나에서 우리가 얼마나 일리치에 가닿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후기네요. 이런가 싶으면 저렇다하고 저런가 싶으면 이렇다하는 공부의 길 ᆢ안개 속을 헤매는 그 감각을 위대한 텍스트 의 숲에서 만나는 행운은 누구나 누리는 게 아니지 싶어요.
샘과 일리치를 함께 만나 참 좋습니다~~
세미나에서 더듬듯 늘어놓았던 이야기가 희욱샘의 목소리로 정리되어 있네요! 여전히 일리치의 영성은 낯설고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함께 궁리할 수 있는 샘들이 계셔서 막막하지만은 않네요. 정성스런 후기 감사해요 샘!
휵샘 후기 읽으면서 교회의 감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볼드체 덕분에 중요한 키워드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일리치의 인본주의적 가치가 어떻게 동시대에도 이어질 수 있을지 탐구해보고 싶어요!
'삶의 경험에 대해 “예”라는 위대한 긍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자각', 살다가 적당히 내던지면 제 삶이 편해질 것 같은 외면하고 싶은 말이네요. ㅎㅎ. 이런 자각을 자신의 믿음으로 견지하려는 삶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적 감각'이라는 말은 여전히 거리를 쉽게 좁힐 수 없는 어려운 말인데요. 은연중에 저 멀리 밀쳐둔 말을 휵샘이 다시 꺼내서 제 앞에 가져다 두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