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5. 지식의 고고학 5주차 후기. 미현
이번 주에는 채운 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특강 전에 각자가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가장 많은 질문이 ‘언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언표란 무엇인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언표는 무엇인가가 저도 궁금했습니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타자기의 문자판 자체는 언표가 아니다. 그러나 타자연습용 책자에 열거되어 있는 A, Z, E, R, T라는 일련의 문자 자체는 프랑스의 기계들에 의해 채택된 알파벳 상의 언표다.”(127) 라 하는데, 과연 알 듯 모를 듯한 언표는 무엇일까요, 채운 샘 강의를 저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푸코는 왜 언어라 하지 않고 언표라 하는가, 언어는 랭귀지, 랑그(langue)다. 랑그는 늘 파롤의 차원을 가지고 간다. 랑그와 파롤은 무엇인가? 랑그는 우리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이고 실체적인 그런 언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을 쓰고 발음하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언어가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고, 어떤 사전적인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사전적인 의미와 부합하지 않는 묘하게 다른 뉘앙스가 맥락마다 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문법적인 의미나 사전적인 의미가 다 안 갖추어져 있어도 그게 어떤 뉘앙스인지, 어떤 맥락에서 말하는지를 다 안다. 그 구체적인 발화행위가 파롤이다. 파롤은 언제나 변수에 의해 맥락에 의해 지배된다. 즉 열 사람이 ‘사랑’이라고 말을 하면 다 다르다. 이는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근대 이후 언어 자체가 분석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면서, 언어와 사유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즉 보편적이고 추상적이고 실체적인 랑그가 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랑그는 늘 파롤의 차원을 가지고 간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말은 보편적이고 사전적인 의미도 있지만, 구체적인 발화행위를 할 때는 그 뉘앙스를 가지고 간다. 이런 랑그가 어떻게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언어학의 대상은 언제나 랑그였다. 구조주의 이후 서양은 본격적으로 언어학이 랑그를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을 비판한다. 진짜 언어라는 것은 발화행위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변수 속에서 계속 변이하는 언어만이 언어의 존재 양식이라 한다. 푸코는 이를 부정하면서,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를 거부하면서, 언표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푸코는 어떤 주체의 말이 아니라 ‘말해진 것’을 다룬다. 주체나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언어들. 역사의 공간은 유의미한 혹은 무의미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유의미/무의미로 규정되기 이전의 ‘언표들’로 웅성거린다. 언표란 단순한 질료도 아니지만, 어구나 명제, 담화행위도 아니다. “언표란, 그의 존재 양식에 있어서, 우리가 어구, 명제, 언어 행위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말할 수 있기 위해, 또 어구가 참인지(또는 수락 가능한지), 그 명제가 합법적이며 잘 공식화되었는지, 그 행위가 요구되는 무엇”(지식의 고고학, 128)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언표는 그 자체로 무엇을 지시하거나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웃하고 있는 다른 언표나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타자기의 문자판 자체는 언표가 아닌 도구다. 타자연습용 책자에 열거되어 있는 알파벳은 프랑스 기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 언표다. (채운 샘 <말과 사물> 강의록 인용)
언표는 구체적인 시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배가 고프다’가 거북이 등껍질, 돌, 그리고 종이 등에 씌여져 있다면, 이는 언어가 물질성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를 우리는 물질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가 어떤 개념, 어떤 본질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 자체로부터 물질성을 탈각시켜버린다. 언어의 물질성이라는 것은 똑같은 말도 돌에 새겨져 있느냐, 텍스트에 새겨졌느냐에 따라 다 다르다. 또 그 말을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권위를 갖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언표들의 희박성, 희박하다는 것은 바다에 섬과 같은 거다. 언표는 발화된 것이고 섬처럼 떠 있는 거다. 어떤 시대에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다 해도 중요하지 않아서 말해지지 않은 것이 아닐 수 있다. 지식인들이 말하는 것,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 일반인들이 말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가지는 지식의 한계다. 모든 시대의 담론은 레어하다. 근본적으로 서로의 말들은 레어하다. 우리는 어차피 바닷속에 가라앉아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해석한다는 것은 언표의 결핍된 것을 해석하는 것으로, 이는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한다는 것으로써만 존재한다. 어떤 언표도 누가 말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조건, 섬을 해석한다는 것은 떠오르지 않은 것을 해석하는 것이고, 복잡한 지칭 속에서 의미를 복수화하는 것이다.
문서고는 자료실이다. 공식적인 기록물은 일정 기간을 지난 다음에 보게 되는 것이며,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씌여진 것들만 보게 된다. 그 당시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못 본다. 왕조실록은 레어하다. 지식인의 자료, 민중들의 자료는 다 다르다. 이 층위를 이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문서고는 아프리한(선험적인) 조건이다. 문서고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 거다. 선험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의 앞에서, 우리는 씌여진 것들 사이의 관계를 봐야 한다. 그것들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나를 봐야 한다.
『지식의 고고학』은 어떻게 담론이 형성되는가, 역사적 조건을 본다. 문서고는, 담론적 형성물은 언표들의 범위, 언표는 타자기의 문자와 같은 거다. 이는 일정한 방식으로 타자기의 문자판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같다. 어떻게 타자기의 문자판을 두드리느냐, 언표들을 어떤 방식으로 계열화하느냐,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담론이 구성된다. 담론은 분산적이다.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 담론이 형성되는가, 어떻게 담론이라는 걸 구성하느냐, 즉 담론을 기능하게 하는 힘들의 배치를 본다.
바다의 섬과 같은 담론들. 미현샘 후기 덕분에 채운샘 강의를 다시 복기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