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지식의 고고학』 4장의 3~4번, ‘모순들’과 ‘비교적 사실’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용이한 내용들이 주를 이뤘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모순들’에 관해서 한 번 복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푸코는 ‘모순’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고고학과 지성사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는 단지 학문의 영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것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모순에 어떤 지위를 부여할 것인가? 이건 우리가 삶 전반을 대하는 태도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순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고, 곤란에 처하게 하는 것이니까요.
지성사는 모순을 “숨는 또는 숨겨지는 어떤 통일성의 외관”(211쪽)으로 취급합니다. 어떤 부조화를 발견했을 때, 양립불가능한 것들의 공존을 맞닥뜨릴 때,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질서, 조화, 통일성에 ‘대한’ 무질서, 부조화,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질서, 조화, 통일성이 ‘결여된’ 결과가 바로 모순이고, 우리가 이것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결여된 것들을 되찾아주는 일이라는 생각. 지성사도 그렇습니다. 표면의 모순들에 대해 결여된 통일성을 되찾아주기.
이를 위해 지성사는 모순을 이중화하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어떤 모순들을 사소한 것으로, 또 다른 모순들을 앞의 것들을 설명해주는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령 모든 대립과 모순들을 경험론 VS 합리론, 기계론 VS 생기론, 유물론 VS 관념론 하는 식의 거대한 테마들에 종속시키는 거죠. 그런데 정말로,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알게 해주는 걸까요? 예를 들어 최근의 젠더 갈등을 ‘여진남보’, 그러니까 여자는 진보적이고 남자는 보수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순과 갈등을 ‘진보 VS 보수’라는 익숙한 틀에 맞춰 설명하려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책임을 묻는 데에나 소용이 있지, 스스로의 관점을 조금도 확장하거나 변형하지 못합니다.
토론 중 난희샘께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도 모순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저도 공감합니다. 저는 ‘상식’으로는 현실이 잘 설명되지 않거나 아주 따분한 방식으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에 처음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초조함이 한때 제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타났습니다. 니체를 읽으면 니체로 모든 걸 설명하려 하고, 일리치를 읽으면 일리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고. 설명되지 않는 건 무시하려 하고. 그러나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오히려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과 더불어 자신의 이해를 변형하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다면 고고학은 모순을 어떻게 다룬다는 걸까요? 푸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고학적 분석에 있어서는, 모순들이란 극복해야 할 외관들도 이끌어내어야 할 비밀스러운 원리들도 아니다. (…) 그들 자체로서 기술해야 할 대상들이다.”(212쪽) 그런데 모순을 ‘그들 자체로서 기술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냐는 겁니다. ‘그 자체’라는 게 어디 따로 존재한다는 걸까요? 중요한 건 ‘모순의 우선성’이라는 원칙입니다. 한 마디로 모순은 통일성의 결여가 아니며 그 자체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 없이 언설적 형성의 장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는 하나의 언표이고 사건이며 기념비라는 말이지요.
여기서도 지성사와 고고학의 분수령은 ‘복수성’에 대한 사유입니다. 고고학은 통일성이 아니라 복수성을 지향합니다. 모순을 취급함에 있어서도 고고학은 복수적인 불화의 공간을 기술하고자 하는데요. 이때 ‘복수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서로 다른 것들이 둘 이상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측정 가능한, 전체성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동일한 테이블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대적 차이들이나 다양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상이한 영역들, 수준들, 실증성들, 규칙들을 지니는 언표들과 언설들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고고학은 이를 합리성이나 정합성의 결여로 파악하기보다는 그 자체 분석되고 기술되어야 할 것들로 봅니다. 아마도 복수성을 지향하는 이런 작업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기’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주어진 인식의 틀로부터 달아나는 데에 도움이 되겠죠.
다음 시간에는 『지식의 고고학』 4장을 끝까지 읽고 과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채운샘 강의가 예정되어 있고요. 간식은 현정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과 더불어 자신의 이해를 변형하는 일- 그래서 다음 고고학적 기술 5. 변화와 변환이 나오는가 봅니다. 한가지로 귀결시키려는 습에서 벗어나서 지식의 영토를 한껏 확장해보고 싶네요.
복수성을 지향하는 이 모든 작업들이 우리가 지닌 인식의 틀을 깨는 작업이다. 우리의 공부 또한......나두 이러고 싶다.....'모든것을 설명하고자하는 욕망'을 어떻게 해야할까?...아주 잘 읽었습니다. 건화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