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년...인데 우리는 여전히 푸코를 모르는 와중에 있습니다. 알 듯 모를 듯 머리 아프고 답답하지만 그럼에도 묻고 답하며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미나 일정에 채운 샘 강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번 주 세미나에서는 ‘불연속’이라는 개념을 아주 상세하게 풀어 주셨습니다.
구조주의와 구조의 바깥
연속과 불연속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일관되게 흘러가던 어떤 흐름이 갑자기 멈추거나 바뀌면 불연속일까?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게 되는 불연속은 구조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불연속, 우발성, 계열화와 같은 개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조주의는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를 깨뜨렸습니다. 구조주의에 의해 모든 출발점에 주체를 놓았던 사고에서 벗어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주체를 기술하게 되었습니다. 푸코와 들뢰즈가 구조화된 주체라는 개념을 가지게 된 배경, 그들이 구조주의의 아들로 불리게 된 배경이 구조주의가 말한 구성되는 주체에 있습니다.
그럼 이때 구조는 무엇일까요? 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규준으로 틀 지어진 상징체계인데 대표적인 것이 언어입니다. 격자 안에 위치한 어떤 “A”는 서로 이웃한 “B”와 “C”의 관계에 따라 의미가 발생합니다. 틀 지워진 구조 안에서 관계 맺는 다른 것들과 차이를 드러내며 존재 의미를 가지는 것이 주체입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에 대한 무엇이라는 관계비 속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관계는 차이와 동의어이고, 무의미하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고정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히지만 68혁명을 겪으며 구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주의가 가진 정태적인 면, 보편 구조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보편주의적인 면을 넘어서는 무엇을 찾게 됩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구조주의에 대한 변환으로 푸코는 “구조의 바깥”이라는 말을 가져옵니다. 격자에 맞춰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구조주의에 비하여 훨씬 더 구조가 가진 역동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알파고를 이긴 이세돌의 78번 수는 지금까지 놓은 수 77개가 가진 의미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앞서 두었던 77개 돌이 이 78번째 돌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출현시켰고 알파고에게 버퍼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운동경기에서 발생하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들도 지금까지의 흐름을 바꾸는 ‘우발점’입니다. (강의에서 에드가 엘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셨는데 셈나 끝나고 한번 읽어 볼 예정입니다 ^^)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지금까지의 흐름을 바꾸는 돌연한 무엇, 돌연한 솟아오름. 이 우연한 마주침은 비정상이 아니고 기형이고 돌출이며 이것이 ‘사건’입니다.
사건으로서의 역사, 고고학
사건은 우발적 마주침으로 인한 휨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생성입니다. 불연속은 돌출된 것이고 균열이며 고고학적 어긋남입니다. 여기에서 이웃 관계를 바꾸는 몇몇 지점들을 특이점이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이상하다거나 혹은 특별하다로 쓰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철학적 개념어죠. 특이점은 계열화하여 의미를 도출해내는 데서 불 수 있는데 예를 들자면 명탐정이 사건을 해결할 때 하는 추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벌어진 사건 현장에서 어떤 것들을 증거로 가져와 묶느냐에 따라 그 사건은 다른 의미를 드러냅니다. 무능한 형사들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증거들을 계열화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범인을 색출하게 됩니다.
고고학은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기술합니다. 전혀 다른 계열들로 전혀 다른 의미들을 기술합니다. (르네 톰의 ‘카타스트로프 이론’이나 가스통 바슐라르의 ‘단절, 문턱’과 같은 개념들) 이는 선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다큐멘트와 대비되는 모뉴멘트라 할 수 있습니다. 모뉴멘트는 의미화할 수 없는 덩어리들에서 우발점을 중심으로 언표를 계열화하는 방식입니다. 사건과 더불어 표출되기 전에 존재하는 의미는 없으며 모든 역사는 계열화 작업, 즉 이웃 관계를 밝혀 의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어떤 구조 안에서 무엇을 묻는 것은 그 배치 안에서 만나고 있는 욕망(푸코라면 힘 관계)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구조주의에서 찾을 수 없는 실천적 지점을 고고학에서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나는 어떤 욕망의 배치 안에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들의 유희
고고학에서는 올바름이나 진리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이런 계열화를 통해 이런 의미를 도출해내는 데에는 어떤 힘 의지가 들어가 있는가를 묻습니다. 무엇이 진리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을 진리로 만드는 데 어떤 힘 의지가 작용했는가를 분석할 수 있을 뿐(니체)입니다. ’나는 어떤 격자 속에서 구성되고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나를 어떻게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구조는 장과도 같은데 장이란 어떤 힘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곳입니다. 이웃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 주체가 영향을 받는 곳이자 이웃 관계를 다르게 배치하는 주체에 의해 변형되기도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구조 안에서 법칙과 함께 구성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규칙은 없습니다. 세상에 법칙은 없다 규칙이 있을 분이라고 말했던 니체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차이를 생성하는 조건들, 존재 의미를 다르게 만드는규칙을 바꾸는 것, 즉 차이의 유희입니다. 고고학은 어떤 것이 진리라고 믿게 하는 특정한 조건 속에서 구성된 지식을 앎이라고 믿게 하는 장을 분석합니다. 어느 시기에 특정한 진리를 출현시키는 장의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마무리
강의 전 세미나를 한 부분은 4장 고고학적 기술에서 마지막 부분(5.변화와 변환들, 6.과학과 지식)입니다. 맨 처음 질문은 변화와 변환은 무엇이 다른 걸까요? 무엇이 다르기에 둘을 구별하는 걸까요? 였습니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역사를 기술할 것인가’를 다르게 보는 관점에서 기인한 구별이 아닐까요? 시간의 흐름을 선형적이라 여기고 목적론적인 관점을 가진 기존의 역사적 기술 방식과 계기가 절대적이라는 테마를 의심하는 고고학적 방식에 따른 차이. 결과중심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기존의 역사 연구에 변화는 있을지언정 변환은 없었겠지 싶습니다.
실증성을 말하는 푸코에게서 우리는 현존하는 구체적인 장에서, 실제 있는 것들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다르게 생성시킬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래도 모르고 저래도 모르고 사는 게 삶이라면 그래도 다르고자 하는 의지를 응원받는 배치 안에, 다르고자 하는 이웃들 사이에서 사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푸코를 공부하면 사람이 이렇게 됩니다. '이래도 모르고 저래도 모르고 사는 게 삶이라면 그래도 다르고자 하는 의지를 응원받는 배치 안에, 다르고자 하는 이웃들 사이에서 사는 게 최선', 샘의 심오한 통찰에 한표 던집니다~!!